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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이윤일 성인, 복자일가를 보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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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1 ㅣ No.661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이윤일 성인, 복자일가를 보태다

 

 

2014년 여름 천주교인들은 열기에 타올랐다. 8월 16일 치명자들을 내었던 권좌의 중심인 광화문 한복판에서 124위의 복자가 탄생했다. 이로써 성인 가족에 복자가 더해지는 경사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구대교구에도 이윤일 성인의 장인인 박사의(안드레아)와 처조부 박경화(박보록, 바오로)가 시복되어, 성인 가족에 복자 일가가 보태졌다.



두 아들을 비롯한 숱한 치명자 집안

이윤일의 가족구성은 어떠했는가? 이윤일은 직계로 아들 4명 이상과 1명 이상의 딸을 둔 대가족이었다. 이윤일은 박해 때 식구 10여 명이 함께 잡혔다. 부인 박 말다, 며느리 박 아녜스, 아들 이의서(마티아), 아들 타대오와 그의 가족, 아들 시몬의 부인인 며느리, 손녀, 그리고 딸 등이다. 이외 시집간 딸이 더 있을 수 있다. 이윤일의 사위와 그 사위의 삼촌이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윤일의 아들 이 시몬은 병인년 한 해 앞서 공주에서 치명했다. 그는 1865년 11월 충청도 청풍 부럭이 마을 처가 동네에 가짜 포교가 들어왔다고 해서 장정 10여 명을 데리고 그들을 쫓으러 갔다가 체포됐다. 이때 이 시몬은 전 사베리오 및 이관여와 함께 관으로 끌려갔는데, 이 시몬과 전 사베리오는 ‘교(絞)하여 치명’하고 이관여는 풀려났다. 이듬해 2월 공소방문을 나온 깔래 신부는 “치명자의 시신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때 두 시신은 모두 생시와 같이 온전했다. 그리고 이윤일에게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아들 이 타대오가 있다. 시몬의 동생인 타대오는 이윤일이 치명한 후 처자에게 늘 “잡히면 위주치명(爲主致命) 잘 하리라.”고 했다. 이 타대오는 1868년 영남회장을 맡고 있던 외삼촌 박양여(사도요한)와 함께 체포되어 박양여는 서울에서 치명하고(53세), 이 타대오(22세경)와 그의 또 다른 생질 장 안토니오(20세)는 충주에서 치명했다. 장 안토니오는 상주 태생인데, 부친이 일찍 죽어 외삼촌댁에 와서 살고 있었다.

한편 『치명일기』 743번에는 이 타대오가 통영에서 치명한 이 사도요한의 아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박양여의 당질이며 이윤일 처의 종질이고, 여우목에서 박해 때까지 함께 살았던 박주현은 시복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이 타대오의 부친은 통영이 아니라 대구에서 치명한 이 사도요한이라는 수정요청 서한을 올렸다. 특히 함께 치명한 인척들이 있기 때문에 박주현이 이윤일의 순교지나 가족관계를 혼동할 우려는 없다. 더욱이 박주현 남매는 부친을 잃고 고모와 모친을 따라 박양여 집에서 함께 생활했었다. 이윤일에게는 또 부친의 치명을 증언한 아들 이의서가 있다. 이의서의 부인은 이 마리아인데, 병인년 당시 열다섯 살쯤이었던 그는 박해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후에 결혼한 듯하다.

이윤일의 며느리 박 아녜스는 『치명일기』에 대한 자료 보충 때 이의서와 함께 이윤일에 대한 증언을 올렸다. 이 때문에 한때 이들을 부부라고 여기기도 했지만 박 아녜스는 이의서의 부인이 아니라 또 다른 아들의 부인이다. 박 아녜스의 남편은 병인박해 전에 이미 사망한 듯 한데 분명치는 않다. 최근 박 아녜스가 이윤일의 또 다른 아들인 시몬의 부인이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박 아녜스는 병인년에 33세 가량이었으므로 당시 22~24세였던 이 시몬과 부부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나이차이다. 더욱이 박 아녜스는 증언할 때 자신을 과부라고 하면서도 남편이 치명했다는 말은 없었다. 증언과정에서 치명여부를 특별히 밝히던 재판사례에 비추어보면 아녜스는 치명자의 아내이기 어렵다. 또한 박 아녜스는 상주태생인데 비해, 이 시몬의 처가마을은 충청도 청풍임도 주목된다. 나이로 보아 박 아녜스는 이윤일의 맏며느리쯤 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 시몬의 아내도 남편이 먼저 치명한 이후 시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외에도 이 박해에서 이윤일의 사위 안 요한(23세)과 사위의 삼촌 안창구(45세)도 함께 체포되어 상주옥에서 치명했다. 따라서 이윤일에게 아들로는 현재까지 박 아녜스의 남편, 이 시몬, 이 타대오와 이의서 등 4명이 찾아진다. 그리고 함께 체포된 딸이 있다. 만약 사위가 따로 살고 있었다면 시집간 딸이 또 있게 된다. 앞으로 또 다른 자료가 나와 식구가 보태질지도 모른다.

이윤일은 여우목에서 회장으로서 마을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아들 시몬이 치명하자 그의 시신을 찾아다 장사지내고 일상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때 병인년이 다가왔다. 이윤일은 식구와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30여 명이 함께 체포되었다. 그의 심문사항, 감옥 안에서의 신공과 교우 독려, 그리고 문경관아에서 상주감영에 이수(移囚)된 사실 등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결국 한실공소 회장 김인기 형제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12월 중순 장날에 관덕당에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아미산 자락에 묻혔다가 비산동, 미리내를 거쳐 현재 다시 그 자리에 돌아왔다. 이윤일이 갇혀있던 상주 옥에서는 매일 3명씩 지명하여 처형해 나갔다. 당시 감옥에 있던 신자들은 죽음의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손녀, 아녜스의 두 살배기 딸은 옥에서 죽었다. 이윤일은 살아생전에 아끼는 사람들이 치명하는 광경을 여러 번 눈앞에 두었다.


복자 박사의는 이윤일의 장인 

이윤일의 아들 타대오와 함께 붙잡힌 박양여는 이윤일과 처남매부지간이다. 박양여는 2014년 서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박사의의 아들이다. 물론 그의 할아버지 박경화도 함께 시복되었다. 그러니까 이윤일의 장인인 박사의와 처의 조부인 박경화가 복자인 것이다. 박양여 가족은 충청도 홍주의 구교우의 집안인데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다니다가 상주 멍에목에서 1827년 예수승천첨례 때 체포되었다. 이윤일의 장인 박사의가 연로한 아버지와 함께 심문을 받겠다고 자청하여 늘 그 어려움을 덜어드렸던 일은 유명하다. 처의 조부 박경화는 감사가 승려와 논쟁시키자 천주교 교리를 시원하게 밝혔던 사람이다. 더욱이 박사의는 박해시대 가장 옥살이를 길게 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12년을 옥살이하고 기해박해 때 치명했다.

이윤일의 처남인 박양여는 정해박해 당시 17세였다. 박양여는 모친과 세 누이와 함께 신 장사를 하며 생명을 보존했다. 그는 마음을 모아 성경을 읽어 도리를 밝히고 수계를 착실히 했다. 그는 부친이 치명할 때 자신이 관가에서 에둘러 말한 것이 있다 하여 평생 보속하기로 결심하고 소금으로만 반찬을 했으며 행위가 단정해서 원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주교에 의해 영남지방 회장으로 뽑혔다. 이윤일의 아내 박 말다는 옥살이 하는 아버지와 순교하지 못함을 평생 보속하며 살아가던 오빠를 의지하며 신앙을 다진 여인이었다.

박양여는 여우목에 살던 중 박해가 일어나 교우들과 산골로 옮겨가 충청도 황간 상촌에 피신해 있었다. 이때 앞서 말한 두 생질들도 황간으로 피신해 와 있다가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당(黨)을 대라.’는 혹형에 입 다물었다. 함께 잡힌 사람들에게 ‘교(敎)를 가르쳤느냐?’고 묻자 그는 ‘아는 지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라 가르치지 못했다.’고 답했다. 포졸들이 생질들에게는 천주교를 가르쳤느냐고 묻자, 그는 “저들에게 물으라.”고 했다. 물론 생질들은 외삼촌께 교를 배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포졸들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이웃 사람은 다 놓아 주었다. 관에서는 그를 괴수라 하여 무수히 심문하며 형벌하여 두 다리가 헤어졌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묵묵했다. 그는 서울에서 치명했다. 그 대대로의 굳은 신앙이 이윤일가(家)에 접목 배양되었다.

이윤일은 좀 나이든 아들 타대오를 피신시키고, 어린 아들 마티아를 데리고 있었다. 이러한 아버지 이윤일의 마음은 당시 신자들의 일반적인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피신시킨 아들 타대오도 치명했다. 이윤일의 친인척이 살았던 문경 여우목에서 체포되어 상주옥에서 치명한 이들은 20명이 넘는다. 그들의 이름과 행적은 당시 앓아누워 잡혀가지 못했던 이윤일 처의 종질이며 박양여의 당질인 박주현이 주로 전해주고 있다. 또 박주현 자신의 생을 통해 이윤일 이후 여우목 사람들의 행적을 드러내기도 한다. 박해로 여우목이 해체되고 난 이후 그의 주소지를 보면, 경산 고래골, 경산 모과골, 부산 초량, 울산 탑곡리 등으로 자주 바뀌고 있다. 그는 지속적으로 치명한 사람들의 정보를 보완하고 보고했다. 그러는 사이 약 10여 년간 회장도 지냈다.

한편 이윤일의 아들 이의서도 용인 먹방이, 전라도, 강원도 풍수원 등으로 계속 거주지가 바뀐다. 이렇게 잦은 이주에도 이의서는 전라도에서 회장을 3년 했는데, 이는 교우 사회전체가 이동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교구재판 때 생활이 견디기 어려운 상태라고 답했다. 극빈했던 그들은 가까운 이들이 치명하는 것을 보고 듣고 전하면서 생활 터를 찾아 전전긍긍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윤일은 자신의 당대에 두 아들과 사위, 손녀, 처남 및 그 일가들의 순교를 목도했던 사람이다. 물론 그 선대에도 순교자들이 있다. 정해, 기해, 병인박해까지의 긴 세월,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인데도 대를 이어 희망을 태운 사람들이었다. 한 순교자는 이처럼 수많은 신앙의 혈족들이 피를 흘린 토대 위에서 태어나고 있다. 그리고 결국 성인집안과 복자집안이 한데 묶이게 되었다. 그들 신앙생활의 세세함은 날마다 새로 드러난다.

역사란 현재로 가장 정확한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 내일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내일의 정확한 역사로 변경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이윤일에 대한 증언도 증언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게 아니다. 그렇게 언급하게 된 배경을 파악해야만 사료는 제 가치를 발휘한다. 연구가 진행되어 다른 정황들이 드러날수록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는 열쇠들이다. 따라서 자료가 한정되었던 과거를 고집함도, 그렇다고 현재를 믿지 못함도 역사가다운 태도는 아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야 한다. 그러나 과거를 모르는 이는 현재를 볼 수가 없다. 과거란 매일 새롭게 다가오는 현재이기도 하다. 지속적인 연구를 통한 새로운 과거는 이윤일 본인이 대답하지 못한 사실까지 우리에게 전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한 그루로 서 있던 거목 이윤일이 그가 뿌리내린 숲까지 들고 달려온다.

[월간빛, 2015년 3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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