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백)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가톨릭 교리

예비자교리.....200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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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7-01-07 ㅣ No.129

 

제 3 편 성총을 받는 방법

                                                                  <2006-11-03>       

이제 ‘가톨릭 교리’의 제3편입니다.  제3편의 주제는 ‘은총을 얻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이 은총이란 하느님의 영역의 특정한 부분을 가리키는데 쓰는 용어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살아가는 순수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이 말로 표현하는 것은 없습니다.  억지고 그 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의 의미에서라면 말입니다. 


이 3편은 ‘믿을 교리’와 ‘지킬 계명’을 알아듣고, 우리가 삶에서 따르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영역에 닿을 수 있는 내용을 다루는 부분입니다.  물론 인간이 하느님의 영역에 닿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이 갖는 오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순전히 인간의 생각을 높이고자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 입장에서 표현하는 일이라면 하느님도 우리를 충분히 이해해주실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영역에 닿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이 하는 일과 그 정성에 따라 달라집니다.  믿을 교리와 지킬 계명의 내용을 통해서 강조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하느님은 인간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저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큰소리치는 분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소리를 내시지 않습니다.  다만 현세라면, 그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전하는 교회의 입장에서 큰소리를 치는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이런 사항, 저런 사항을 내세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교회를 통한 강조사항을 크게 두려워 할 것은 없습니다. 이 교리를 통해서 말씀드리는 내용들은 인간의 생각과 감정에 따른 사항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고, 교회의 정신에 맞춰 거기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을 인간의 입을 빌어서 하는 것뿐입니다.  시작은 인간이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각각을 주장하는 인간들의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앙인 자신의 보다 나은 삶,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은총’은 인간이 하느님께로 나아갈 힘을 주시는 길, 하느님의 힘이 인간에게 내려오는 전달통로입니다.  사람들의 세계에는 일정한 규정과 규칙이 있습니다.  이 규정과 규칙은 ‘아무 죄 없이 순수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정한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삶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저절로 이 세상에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신앙에서는 사람이 생겨난 원인이 하느님의 창조에 있다고 합니다만, 과학에서는 사람 생명의 시작에 대하여 합당한(?)(사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합당한 응답) 응답을 주지 않습니다.  기껏 설명하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 ‘진화(進化)’이론입니다.  진화란 것은 애초에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독특성, 개체성과 유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 과정을 설명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뭔가에 종속돼 있는 것이죠.  생물학적이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합니다만, 나보다 앞선 어떤 존재에서 발전하는, 그 어떤 존재에서 나아진 것이라고 하는, 그 존재들에 종속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명하는 인간이 어찌하여 세상 만물의 지배자가 되었는지 과학에서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아니 설명할 능력이 없습니다.  왜 동물원을 꾸미고 다른 동물들을 가두어놓고 연구하는지, 너도 나도 똑같은 인간이면서 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벌을 주거나 다른 대상을 존경해야 한다고 말하는지, 법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대답도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이야기합니다.  답을 줍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 사람들에게 위탁관리권을 주셨다고 말입니다. 


여기 여러분 앞에서 이 교리시간을 통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과학에 의한 입장 설명은 아닙니다.  다만, 과학을 언급하는 것은 우리가 좀 더 잘 알아듣는데 사용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설명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모르시는 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시초부터 하느님과의 관계를 뗄 수 없는 사람, 인간이 하느님의 영역에 해당하는 그분의 의지를 알아듣고 실천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해서 인간이 다른 대상과 비교해서 열등한 존재, 뭔가 모자라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인간을 하느님보다 못한 존재라고 이야기한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을 그대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과학의 입장에서 인간을 하느님과 같은 위치(=품격(品格))에 놓고 서로 맞부딪히게 할 때 나오는 현상입니다.  오히려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와 할 수 없는 범위를 구별하고 그 안에서 효과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3편의 처음 두 항목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180.(문) 사람이 다만 자기 힘으로 교리를 믿고 계명을 지킬 수 있느뇨?

   (답) 못하느니, 반드시 천주의 은총이 있어야 하느니라.

181. (문) 천주의 은총을 얻는 방법은 무엇이뇨?

   (답) 특별히 기도와 성사(聖事)니라.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 가까이 할 수 없는 부분을 인정하고 우리를 이 세상에 있게 한 원인[=제 1 원인]이었던 ‘하느님’께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으로, 교회가 제시하는 방법이 은총과 기도, 그리고 성사입니다. 은총은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고,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서 행하는 ‘무형(無形)’의 행동이며, 성사(聖事)는 하느님께 인간이 나아가는 길을 우리가 눈에 볼 수 있도록 교회가 정한 행동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그 방법을 분류하기는 합니다만, 어떤 것이나 사람의 노력이 따라야 하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이나 하느님이 도움과 힘이 있어야만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구별하여 다루는 것이 3편 ‘은총을 얻는 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처음 부분은 은총에 대한 것부터 시작합니다.  여기 교리에서 이야기하는 은총(恩寵:높은 이로부터 받는 특별한 은혜와 사랑,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출발점 또는 주도권을 쥔 대상은 인간이 아니고 하느님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소극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는 존재(存在)일뿐이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분의 힘을 받을 수 있도록 마땅히 우리가 할 일을 존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을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보거나 환경에 순응해야 한다거나 하느님 앞에서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바라보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이러한 한계를 지닌 인간에게 일단 선물로 다가오는 은총은 두 가지로 구별합니다.


제 1 장 은 총  

182. (문) 은총은 무엇이뇨?

   (답 은총은 사람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천주께 공(=무료)으로 받는 초성은혜(初性恩惠)니라.

183. (문) 은총이 몇 가지 있느뇨?

   (답) 상존은총(常存恩寵,성화은총)과 조력은총(助力恩寵,도움은총)  두 가지가 있느니, 상존은총은 그저 ‘은총’이라 부르고, 조력은총은 ‘성우(聖祐)’라 하느니라


하느님의 선물을 상존성총과 조력성총으로 구별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잘 알아듣고 좀 더 잘 이해하자고 말입니다.  자체로서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 있고, 하느님에게서 오기는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일 때에 참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선물이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하여 각각 성화은총도움의 은총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전에는 이 말을 상존성총과 조력성총이라는 한자(漢子)의 표현을 빌려 말하기도 했습니다.


제1 절 : 상존성총 (常存聖寵) 혹은 성화은총(聖化恩寵)     

184. (문) 상존은총(gratia habitualis)은 무엇이뇨?

   (답) 상존은총은 사람에게 항시 있어 그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 초성지위니, 이로 인하여 사람이 천주성에 참여하고, 성전의 궁전이 되고, 천주의 벗과 의자(義子)되어, 선공(善功)을 이루어 영생을 받을 자 되느니라.

185. (문) 상존은총이 영생을 얻기에 필요하뇨?

   (답) 절대로 필요하니, 누구든지 어린 아이라도 이 은총 없이는 절대 영생을 얻지 못하느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선물입니다.  그러나 같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선물로 받아들이겠다는 사람에게는 선물로 오지만, 다른 입장을 갖고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선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적당량의 비가 논이나 밭을 일구는 입장에서는 도움이 되는 선물의 요소이지만, 사무실에 출근하는 사람이거나 페인트칠을 하여 그것을 말리고 상품으로 내놓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생명의 근원이 하느님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는 신앙인들, 그 신앙인이 하느님께 나아가려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성화은총’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이 은총입니다.  애닯은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죄가 없는 어린이라고 우리가 부르고 싶은 아이라도 세례를 통하여 이 성화은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교회의 입장입니다.

186. (문) 상존은총은 처음으로 어떻게 받느뇨?

   (답) 상존은총은 본시 성세(聖洗=세례)성사로써 받느니라.

187. (문) 상존은총은 어떻게 잃어버리느뇨?

   (답) 상존은총은 대죄 하나만이라도 범하면 곧 잃어버리느니라.

188. (문) 잃어버린 상존은총을 어떻게 회복하느뇨?

   (답) 잃어버린 상존은총은 고해나 상등통회로 회복하느니라.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할 수 있는 성화은총을 처음으로 받는 때는 우리가 자의나, 타의로 생명의 씨앗을 받을 때입니다. 곧 세례(洗禮) 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자기 의지를 표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도 유아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찾아온 은총이 우리를 떠나가는 때는 우리가 보내는 경우뿐이고, 우리가 보내는 때는 ‘대죄(大罪)’ 또는 ‘사죄(死罪)’를 범한 경우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발동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위치할 자리와 같은 위치를 자리하는 성화은총은 인간의 선택에 의해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택에 의하여 자리를 비워주게 된 은총에게 다시 자리를 회복시켜주기 위해서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을 ‘통회(痛悔,contrition)’라고 합니다.  ‘통회’라는 말은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에서 비뚤어져 있던 우리 마음과 삶의 자세를 하느님을 향하여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등지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의 반대방향으로 산다면, 통회가 필요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리가 되기도 합니다.


제 2 절 도움의 은총 - [ 조력 (助力) 성총 (聖寵) ]

다음은 우리에게 힘이 돼주시는 은총, 조력은총에 대해서 볼 차례입니다. 

189. (문) 조력은총은 무엇이뇨?

   (답) 조력은총은 우리 영혼의 힘을 돕는 초성은혜니, 이로써 천주 때에 따라 우리 영혼을 비추시며 그 마음을 움직이사,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여 능히 천당 영복을 얻게 하시느니라.

190.(문) 조력은총이 우리에게 필요하뇨?

   (답) 필요하니, 이는 다만 우리 본성의 힘으로는 영원한 초성생명을 결코 얻지 못하는 연고이니라.

191. (문) 천주 각 사람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성우(聖佑)를 주시느뇨?

   (답) 천주 각 사람에게 이 성우를 주시느니라.  그러나 명오열린 자는 반드시 이 성우를 잘 받아 써야 하느니라.


힘이 돼 주신다는 것은, 힘을 받을 사람이 그 정신을 갖고 움직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닿을 수 있는 도움의 은총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같은 의미와 이치를 갖습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단 한번으로 현재의 완전하지 못한 사람에서 완벽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우리가 돌아가야 할 길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러나 저러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 새로운 삶의 기준을 갖게 되는 사람들은 그가 인생의 길에서 혼란한 길을 가게 될 때에 올바른 삶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도움의 은총 자체에 대한 전체 설명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데,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하여 우리를 바꾸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말 그대로 ‘도움의 은총’이 갖는 한계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길은 찾는 사람에게 보인다는 소리도 그것이 될 것이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찾는 사람에게 보인다는 말도 같은 목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 낸 소리입니다.  도움의 은총이 작용하는 범위는 사람의 행동에 하느님의 도움을 요청할 때에 더 확실하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여러분에게 제가 하느님의 힘을 보여드릴 재간은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힘이라고 말하는 순간 바로 그것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신비(神秘; mystery)입니다.  신비라는 말은 인간의 상식과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속성에 관련된 것이고, 하느님의 힘은 작용하고 싶은 분야, 그럴 공간이 있는 곳에서만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움의 은총은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힘과 그 능력에서 멀어지지 않게 하는 작용을 합니다. 물론 이것도 우리가 올바른 마음으로 간직할 때라야만 그럴 수 있습니다.  이 은총의 활동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 창조이래, 그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기를 바라면서 그토록 주고 싶어 하신 영원한 생명에 닿을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 됩니다.  만일 사람이 이 힘을 거부한다면서  다른 길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에 일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제3 절 : 공로

다음은 공로(功勞)입니다. 공로는 우리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권리입니다.  먼저 읽겠습니다.

192. (문) 공로는 무엇이뇨?

   (답) 공로는 상급 받을 정당한 권리이니, 이는 은총지위에 있어 성우(聖佑)를 의지하여 선공(善工)을 행함으로 얻는 것이니라.

193. (문) 우리 공로로써 받을 만한 상급은 무엇이뇨?

   (답) 우리 공로로써 받을 만한 상급은 은총의 더함과 영생과 천당 영광의 더함이니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권리로 나오는 ‘공로(功勞)’는 은총의 작용과 같은 목적의 실현입니다.  사람은 움직이는 목적을 올바로 기억해야 얻고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은총을 말하는  이 자리, 우리의 합당한 행동을 말하는 ‘공로’에 대한 이야기에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논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것이야 세상에서 얻어도 그만, 얻지 못해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만,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은 얻어도 좋고 말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 2 장   기도

다음은 기도(祈禱)차례입니다. 아래의 내용에는 기도의 말뜻에 대하여 옛날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현대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겉멋으로만 색다르게 바뀐 것으로 말하기 쉬운 요즘 말이 옛날의 설명보다 낫다는 뜻에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현대에서 말하는 표현의 하나로,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합니다.  현대의 설명은 차후에 하기로 하고, 먼저 세 가지 항목을 읽겠습니다.    

194. (문) 기도는 무엇이뇨?

   (답) 기도는 우리 마음을 들어 천주께로 향함이니, 곧 천주를 흠숭하며, 천주께 기왕(旣往,일본어/=>이왕) 받은 은혜를 사례하며, 죄 사하여 주심을 빌며, 자기와 다른 이를 위하여 요긴하고 유익한 모든 은혜를 구함이니라.

195. (문) 기도가 요긴하뇨?

   (답) 요긴하니, 이는 천주 명하신 것이요, 또한 구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천주 흔히 당신 은혜를 내리지 아니하시는 연고니라.

196. (문) 기도는 어느 때에 할 것이뇨?

   (답) 기도는 예수의 말씀대로 간단(間斷)없이 할 것이로되, 매일 아침, 저녁과 모든 주일과 파공첨례(罷工瞻禮)와 또한 유혹 당할 때에 할 것이니라.


여러분은 독백하는 때가 있죠.  다른 사람을 향하여 푸념하는 경우도 있고, 마주보면 하지 못할 소리를 혼자서 중얼거리는 때도 있습니다.  좀 더 좋게 표현하면, 기도라는 것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독백은 말 그래도 혼자 말하다가 지치면 그만두는 것이지만, 기도는 그러면서도 가끔씩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려고 애쓰는 것이고, 삶의 반성을 통하여 하느님이 내게 말씀하신 때는 언제였는가를 돌이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던 하느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인간의 이름입니다.  이 분도 하느님의 뜻을 인류에게 전해주는 과정에서도 수차례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몰라서 기도한 것은 아닐 것이고, 교회에서 설명하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모범을 남겨주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삶의 확신을 얻을 수 있고,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삶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빛을 향하여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해 본 사람만이 또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5항에서도 강조하는 것처럼, 기도를 하는 자만이 하느님에게서 더 나은 힘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7. (문) 기도가 몇 가지 있느뇨?

   (답) 묵상(黙想)기도와 염경(念經)기도 두 가지가 있느니라.

198. (문) 묵상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뇨?

   (답) 묵상기도는 천주와 담화하거나 그 앞에서 무슨 진리를 궁구(窮究)하는 것이니라. 

199. (문) 염경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뇨?

   (답) 염경기도는 무슨 경문을 사사로이 입으로 외는 것이니, 이는 사사로이 하거나 혹 여럿이 모여 하는 것이니라.


다음은 기도의 종류(種類)입니다. 사람은 구별하기 좋아하니 그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기도는 두 가지로 구별합니다.  말을 통하여 입으로 표현하는 기도와 말없이 생각에 잠겨 하는 것 두 가지로 구별합니다.  또 다른 복잡한 구별은 이 묵상기도를 또 구별하기는 합니다만, 여러분들에게 지식으로 알려드리는 것은 별로 의미 없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내 주변에, 나와 가까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그것도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당에 비치한 가톨릭기도서에는 몇 가지의 기도들이 나와 있습니다.  아래에서 설명하는 가장 모범적인 기도, 주님의 기도와 하느님의 바라시는 뜻을 인간에게 잘 설명하는 미사에 대한 양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충분히 기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가톨릭 기도서에 나와 있는 기도는 구설기도입니다.  시간을 맞추고, 지향을 맞추기만 하면, 누구나 같은 모양으로 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렇게 구별합니다.  반면에 묵상기도는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생각으로, 눈에 드러나는 형태가 아니고, 입으로 표현되는 형태가 아닌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모범적인 기도문에 대한 간단한 설명입니다.  그 기도문은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입니다. 

200.(문) 경문 중에 가장 완전한 것은 무엇이뇨?

   (답) 경문 중에 가장 완전한 것은 예수 친히 지어주신 천주경(=주님의 기도)이요, 그 다음은 성모경(=성모송)이니라.

201. (문) 천주경(=주님의 기도)은 몇 가지 기도를 포함하느뇨? 

(답) 일곱 가지 기도를 포함하느니, 먼저 세 가지는 천주 영광에 관한 것이요, 다음 네 가지는 우리 유익에 관한 것이니라.

202. (문) 성모경은 몇 편으로 나뉘느뇨?

(답) 두 편으로 나뉘느니, 전편은 가브리엘 천사와 엘리사벳이 성모께 인사드리던 말씀이요, 후편은 성교회에서 비는 말씀이니라.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기도를 가리켜 주님의 기도라고 합니다.  같은 의미이긴 했습니다만, 표현이 개정되기 전에는 ‘주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문의 표현을 바꾸면서 저희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여 하느님을 공경하는 표현을 담은 것이 새로운 기도문의 특징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크게 일곱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위에서 분류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인간의 입으로 표현하는 세 가지와 찬미와 인간의 유익을 구하는 네 가지 내용이 그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세 가지와,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가 그것입니다.  다른 내용들은 수식어구들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우리도 이 교리를 진행하면서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아듣고 새롭게 한다면, 우리가 느끼는 의미도 조금은 다를 수 있습니다.  마침도 시작기도도 아니지만, 지금 주님의 기도를 함께 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기도의 간단한 구별이긴 합니다만, 그 의미를 알고 한다면 여러분이 느낄 의미도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말씀드릴 내용은 ‘성모송’입니다. 성모송은 위의 202항에서 구별하고 있는 것처럼, 가브리엘 천사가 하느님의 파견을 받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와서 알려드린 내용이 전반부(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이고, 그 마리아를 기억하는 교회공동체의 바람을 담고 있는 것이 후반부(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입니다.


사람이 항상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기도도 하지 않고, 생활을 한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아니 쉬울 수는 있습니다.  사람을 구성하는 또 다른 한 요소인 영혼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쉬울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이고, 영혼의 음식이며,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알아듣기 위한 방법입니다.  애석하고 안타깝게 여러분의  그 어떤 것도 눈에 보여드릴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나머지는 여러분이 실제 생활에서 함께 체험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 사람을 설명하는 표현 >

1) 세상에서는....인간을 몸(=육신)과 정신으로 구별한다.

2) 신앙에서는....인간을 몸(=육신)과 영혼으로 구별한다.     같은 표현인 몸에 대한 것은 생략하고.....

 

세상의 정신......어떻게 해서 몸과 함께 하는지 설명이 없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설명이 없다. 

               그냥 사라지는 존재인가? 

신앙의 영혼......하느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신 존재.  몸을 어떻게 지도하고 이끌었느냐에 따라, 훗날

               그 결과에 대한 심판도 받는 존재   영원불멸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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