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기타 자료 기타 가톨릭자료실 입니다.

파티마 발현의 시대적 의미

스크랩 인쇄

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05 ㅣ No.145

파티마 발현(1917년)이 일어난 지

거의 1세기가 되어가고 있는 지금에 와 마리아의 뜻은

함께 출발한 두 체제에 대해

확고히 승리하였음을 역사는 드러내 주고 있다.

 

그야말로 사탄은 마리아의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 머리를 밟힌 꼴이 되었다.

사실 파티마는 사탄의 도전에 대한 마리아의 대응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을 떠올리게 만든다.

 

골리앗처럼 시끄럽게 떠들며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까지 싸움을 걸어온 그 사탄에 대응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다윗처럼 보잘 것 없기만 하다.

마치도 개울가에서 주운 다섯 개의 다윗의 자갈돌을 연상시켜 주는

다섯 단의 로사리오만을 들고서 그 격심한 도전에 응해 갔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마리아는 사탄의 정수리를 강타하고

전쟁과 핵무기를 극복하면서 참 평화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

참으로 평화는 칼이나 창 따위로 오지 않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소련 공산주의·미국 자본주의와 전쟁 횡포는

오히려 인류를 각성시켜 주고, 양심을 일깨워 주었으니,

그것은 제 칼로 제 목이 잘리우게 된 골리앗의 신세를

사탄에게 안겨 준 꼴이 되었다.

 

사실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으로 등장한 소련 공산주의체제는

이제 분명 실패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며 개혁의 길로 돌아섰고,

역시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을 깃점으로하여

세계사의 주역으로 올라선 미국도

그 자본주의체제가 지닌 구조적 모순 때문에 몸살을 앓으며

지금 모두에게 시대적 회개와 반성을 촉구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기실 그 둘은 각기 평등과 자유의 기치를 드높이며

자신을 경쟁적으로 드러냈었지만

그 차이란 단지 빵 모양 바꾸는 짓일 뿐

그 뿌리가 모두 물질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

결국 둘은 한 몸인 것이다.

 

마치 묵시록의 두 짐승이 큰 용으로부터 모두 힘을 받았듯,

그것의 원천은 모두 맘몬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인 것이다.

설사 그들이 표방하는 바 이상사회를 온전히 이룬다 할지라도

물질주의의 바벨탑만을 쌓는 자기 한계를 벗어날 순 없는 것이다.

한데 그 물질주의야말로 참된 인류사회공동체의 실현을 저해하면서

현대문명의 온갖 병폐적 현상을 낳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빵만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살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깊이 새겨 볼 것이다.

그 말씀은 중요한 것은 빵 모양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빵에다 말씀을 부여하는 것

곧 말씀의 의미 안에서 빵을 나누는 것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이 빵(물질) 그 자체에만 매달려 아귀다툼하다

빵 모양 바꾸는 것이 낳은 환각의 연쇄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비참한 이 세계를 구하려면 무엇보다 영혼의 변혁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성체의 의미를 구현하는 것이다.

참 사랑만이 모든 것을 만족케 한다.

 

파티마의 메시지, 곧 마리아의 길은 이 물질주의를 극복하면서

자유와 평등간의 상호 모순을 하나로 해소시키며

그를 실현시킬 수 있는 제3의 길이다.

그것은 참사랑의 길이다.

단지 사랑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가 너무나도 훼손되어져 있기에

혹 아름다운 빈말로써만 그칠까 봐

참사랑에 이르는 길을 보다 단순한 방법으로 제시해 주신 것이다.

 

마리아께서 요구하신

’보속·희생·봉헌·기도’ 그 모두는 참사랑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또한 그것은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

곧 참된 공동체를 실현시킬 수 있는 디딤돌이기도 한다.

그것은 이기적인 나를 없이하고 모두에게 모든 것이 되는

사랑과 봉사와 친교를 낳는 까닭이다.

 

본회퍼는 "사랑의 길은 끝없이 지체되는 길"이라고 했다.

사랑은 관심과 동참(루까 10,33-34)이니

이웃에 무관심한 채 휑하니 바람처럼

그냥 지나칠 순(루까 10,31-32) 없는 까닭이다.

참으로 그 도정의 순간 순간이

바로 궁극의 도달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사랑의 길이다.

그 사랑만이 참된 공동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결국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의 기치에로 돌아간다.

평등·자유와 함께 사랑을 내세웠던 그들.

참으로 그 모두는 이 제3의 길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제3의 길이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1917년 함께 드러난 세 갈래의 길 가운데

하필이면 참된 길은 제쳐놓고 물질주의에 노예화된 채

나머지 두 길로 제멋대로 나아가 좌충우돌하며 방황하다

이제야 비로소 함께 사는 길을 깨닫고서 어리석음을 회개하며

돌아온 탕자처럼 깊은 좌절감에 휩싸인 채

참된 길을 찾아가려는 우리들에 있어

파티마의 메시지는

그 참된 빛을 확연히 드러내며 우리는 이끄는 등불이 되고 있다.

 

이제 한 시대가 지나고 새 시대, 마리아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그때 마리아는 하느님나라로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여정에 있어 이끄시는 분이 되고

동시에 태양보다 앞서 솟아 아침을 알리는 샛별처럼

다가올 하느님나라의 길을,

제3의 엘리야 이 시대의 세례자 요한 되시어

"회개하라, 보속하라, 봉헌하라, 희생하라, 기도하라" 외치며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계신다.

진정 마리아는 나아가는 인류의 선두요,

동시에 다가오는 하느님나라의 선두이시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제3의 길에 의해 펼쳐질 새 시대의 주춧돌로서

파티마의 메시지를 깊이 성찰하면서

그를 온 몸으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1,10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