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33: 김대건 부제, 조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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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1-10 ㅣ No.2050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33) 김대건 부제, 조선으로


묵주기도에 의지, 강추위와 싸우며 국경 넘어 한양으로

 

 

김대건은 1845년 1월 1일 봉황성 책문을 출발해 보름 뒤인 15일 한양에 도착했다. 김대건은 의주를 통과하는 데 3일, 의주에서 평양까지 5일, 평양에서 한양까지 7일을 여행했다. 사진은 분단 이후 길이 끊긴 의주대로 남측 최북단 임진강 화석정 전경.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일 봉황문 책문에서 페레올 주교와 함께 자신들을 데리러 온 김 프란치스코와 조선인 신자 2명을 만났다. 페레올 주교는 이들로부터 자신의 조선 입국이 어렵다는 말을 듣는다. 이에 그는 마카오로 돌아가기로 하고, 김 부제 홀로 신자들과 입국해 조선 정세를 파악하고 중국 강남에서 만나기로 했다.

 

 

눈 쌓인 숲 속에서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에게 강복을 받고 그날 한밤중에 신자들과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그는 다음날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읍내가 바라보이는 의주 변문 입구에 다다랐다. 통행증이 있는 조선 신자들은 변문으로 입국하고, 김대건 자신은 홀로 밀입국을 하기로 했다. 김대건은 1842년 12월 말 홀로 의주에 들어갔다 빠져나온 경험이 있던 터라 두려웠지만, 자신감은 넘쳤다. 그는 자신이 의주에서 빠져나왔던 길을 기억해 그 길로 무사히 의주로 잠입했다. 그리고 의주 읍내에서 약 8㎞ 떨어진 깊은 산골짜기 울창한 숲 속 나뭇가지 밑에 은밀하게 몸을 숨겼다.

 

“눈이 사방에 깊이 쌓여 산촌이 모두 하얗고 싸늘한데 밤이 되기를 기다리자니 너무나 지루해 묵주 기도를 수없이 거듭했습니다. 해가 지고 천지가 어둠에 잠겼을 때,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그곳을 떠나 읍내를 향해 가는데, 발소리마저 없게 하려고 신발을 벗고 걸어갔습니다. 강들을 건너고 길도 아닌 험한 곳을 달려갔습니다. 어떤 곳은 눈이 바람에 불려 다섯 자(1m 50㎝) 혹은 열 자(3m)나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김대건 부제가 한양에서 1845년 3월 27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대건은 신자들과 만나기로 한밤이 될 때까지 불씨 하나 없는 눈 쌓인 숲 속에서 묵주기도를 수없이 거듭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그는 숲에서 나와 의주 읍내로 향했다. 그는 눈 밟는 소리마저 적게 하려고 신발을 벗고 버선 차림으로 걸었다. 강을 건너고 길도 아닌 험한 곳을 그렇게 달려갔다. 그렇게 김대건 부제는 신자들과 만나기로 약속 장소에 때맞춰 도착했다. 하지만 이미 와 있어야 할 신자들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온몸의 털이 바짝 서고 소름이 돋았다. 피가 솟구쳤다. 너무 놀라 소리죽여 헛구역질도 했다. 변고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자 김대건은 주저 없이 읍내로 달려 들어갔다. 신자들이 변문에서 잡혔다면 분명 읍내가 시끄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두 번이나 읍내로 들어가 사방을 찾아보았으나 헛일이었다. 변문 일대가 소란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다행히 신자들이 잡히지 않았으리라 판단한 그는 다시 약속 장소로 되돌아와 밭 거름더미에 숨어 신자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저 혼자서 여행을 계속해 서울로 가자니 극히 위험할 뿐 아니라 여비도 없고, 옷도 없고, 그렇다고 중국으로 되돌아가자니 그것 역시 지극히 어려운 일이며, 더구나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모셔올 길이 아주 끊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등등의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추위와 굶주림과 피로와 근심에 억눌려 기진맥진해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거름더미 옆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고대하면서 먼동이 틀 때까지 녹초가 된 채 있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해 선교 자금으로 신자들이 미리 마련해 둔 남별궁 뒤편 돌우물골 집에 거처했다. 사진은 1910년대 경의대로를 따라 한양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돈의문’ 전경이다.

 

 

생사의 기로에서

 

평균 기온 영하 20℃가 되는 한겨울 의주에서 최소 3일간 먹지도 자지도 못한 김대건 부제는 탈진해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맥이 빠지고 몽롱해져 잠에 떨어지려는데 인기척이 났다. 김대건은 무의식적으로 거름더미에 몸을 바짝 숨겼다. 다행히 그토록 찾던 김 프란치스코 일행이었다. 김대건은 전광석화처럼 뛰어 나가 그들을 껴안았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신자들에게 왜 인제야 왔느냐고 타박하기도 했다.

 

사실, 조선 신자들은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했었다. 약속 시각이 지났는데도 김대건이 나타나지 않자 이들도 김 부제를 찾으러 2㎞ 지점까지 갔다가 찾지 못하고 꼬박 밤을 새웠다. 길이 엇갈린 것이다. 낙담한 이들은 김대건 부제가 조선 입국에 실패했다 생각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약속 장소에 들렸는데 그때 김대건이 거름더미에서 불쑥 나타난 것이다.

 

해가 뜨자 신자 둘은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뒤따라 오기로 하고 김대건 부제는 신자 한 명과 의주대로를 따라 한양길에 올랐다. 그러나 김대건은 조선 입국 때 들키지 않으려고 신발을 벗고 다녀서 동상에 걸렸다. 그는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12㎞를 걸었다. 더는 걸을 수 없었다. 날도 어둡고 해서 김대건과 동행은 주막에 들러 치료도 하고 휴식을 취했다. 날이 밝자 김대건과 일행은 말 두 필을 세내어 5일 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성 현석문 가롤로. 김대건은 평양에서 현석문과 이재의를 만났다. 이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이들은 충실한 협력자로 활동했다.

 

 

김대건 부제는 평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현석문(가롤로)와 이재의(토마스)를 보자 그제야 긴장을 놓았다. 김대건은 현석문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현석문은 1834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한 이후 해마다 가을에 은이 교우촌을 찾아가 몇 달간 머물면서 신자들을 가르쳤다. 김대건과 현석문은 이때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고, 현석문은 세 신학생이 유학길에 오를 때 국경까지 배웅하기도 했다. 이재의는 이승훈의 손자이고 이택규의 아들로 앵베르 주교의 복사로 활동했다. 현석문과 이재의는 이날 만남 이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그의 충실한 협력자가 된다.

 

한편, 김대건 부제가 1845년 3월 27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현석문과 이재의를 평양에서 만났다”고 밝힌 것과 달리, 현석문은 포도청에서 “자신과 이재의 등이 함께 의주로 갔다가 자신은 평양으로 돌아와 기다렸고, 이재의 등이 의주에서 김대건 부제를 영접했다”고 진술했다.(「일성록」 병오 윤5월 23일) 이렇게 두 사람의 말이 어긋나는 것은 아마도 현석문이 신변이 드러나지 않은 김 프란치스코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 자백했을 가능성이 높다. 1812년 포항에서 태어난 김 프란치스코는 1834년부터 조선 교회 밀사로 활동했지만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지 않았고, 1884년 시복 재판 증인으로 참석했다. 김 프란치스코가 세 차례 박해를 거치면서도 체포되지 않고 교회 중추인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현석문과 같은 지도자들이 그의 신분을 철저히 숨겨줬기 때문이다.

 

김대건 부제는 평양에서 이들과 함께 출발해 7일 만에 1845년 1월 15일 한양에 무사히 도착했다. 김대건은 선교 자금으로 미리 조선 신자들이 마련해 둔 한양 남별궁 뒤편 돌우물골 집에 거처했다. 김 부제는 “어머니에게마저도 자신의 귀국을 알리지 마라”고 현석문 등에게 엄중히 당부했다. 자신으로 해서 또 한차례 박해가 일어날까 봐 염려해서다. 조정에서는 이미 세 명의 조선 소년이 마카오로 유학 간 것을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된 신자들의 진술로 알고 있었다.

 

김대건은 한양에 도착한 며칠 뒤 큰 병에 걸렸다. 아마도 1836년 12월 유학길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9년간 단 한 순간도 놓지 않았던 긴장의 끈이 단박에 끊겼기 때문일 것이다. 오장육부가 끊어지듯이 가슴과 배, 허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고통이 보름간 그를 괴롭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1월 9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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