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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본 나가사키 대교구 교회 문화유산 순례 (2) 돌아오지 않은 카쿠레 키리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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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2-15 ㅣ No.1074

[현장 취재] 돌아오지 않은 카쿠레 키리시탄

일본 나가사키 대교구 교회 문화유산 순례 (2)


- 1902년에 세운 쿠로미사 성당 내부.


카미로 콘스탄치오 신부 기념비가 있는 야이자 공원을 순례하는 것으로 나흘째 아침을 열었다. 금교령 하에 잠입하여 선교를 하다 화형을 당해 순교한 성직자다. 1597년 니시자카 언덕에서 26성인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자 이 모습을 보고 오히려 신자들의 신앙심이 굳건해져 이후에는 화형이나 참수형을 했다고 한다.

이어 아이우라 항구에서 배를 타고 50분, 검은 화강암으로 유명한 섬 쿠로시마에 이르렀다. 1797년 나가사키의 소토메 지역 신자들이 고토 섬으로 이주할 때 일부가 이곳 쿠로시마로 들어왔다.

작은 섬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성당이 눈길을 끈다. 1873년 금교령이 해제되고 1897년 마르만 신부가 들어와 1902년에 세운 쿠로시마 성당이다. 지금도 인구 479명 가운데 신자가 400여 명이라니 교회가 번성했던 때를 짐작하게 한다.

검은 화강암으로 유명한 쿠로시마는 소와 말을 기르는 무인도였는데, 1803년 불교도들이 들어와 코오센지라는 절을 세우고 개간을 할 때 카쿠레 키리시탄들도 함께 들어왔다.

카쿠레 키리시탄 7대손으로 쿠로시마 지구 공민관 관장인 야마우치 카즈나리 요셉 씨(67세)를 만났다. 이곳에는 당시 600명의 카쿠레 키리시탄이 있었는데, 1년에 한 번씩 관청에서 ‘후미에’(신자를 색출하려고 성화상을 밟게 함)를 실시했단다. 절의 주지가 이들을 살리려고 불교도로 등록해 주었는데, 세월이 흐른 뒤 절을 개수할 때 보니 불상 뒤에 관음상을 닮은 마리아 상이 모셔져 있더란다.

박해가 끝나고 성당을 짓게 되었는데, 돈을 못 내는 신자는 노역으로 봉사하고, 값이 싼 판자를 사서 나뭇결무늬를 그리는 등 신부와 신자들이 힘을 합쳐 지은 쿠로시마 성당은, 쿠로시마 화강암으로 된 검은 제대와 마르만 신부가 손수 만든 층계가 달린 정교한 강론대가 아름답다.

스테인드글라스 4색(청홍황녹)은 물 · 공기, 불, 땅, 작물 곧 사람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상징한다. ‘一菜募金(일채모금)’, ‘금요일에 반찬 한 가지를 덜 차려 헌금을 하자.’는 일본교회식 표어가 눈길을 끈다.


- 화형을 당해 순교한 카미로 콘스탄치오 신부 기념비.




- 마르만 신부와 신자들이 힘을 합쳐 지은 쿠로시마 성당.





돌아오지 않은 60%의 카쿠레 키리시탄

“금교령 철폐 후에도 왜 카쿠레 키리시탄들은 가톨릭교회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뭍으로 나와 소토메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리구치 씨가 질문을 던진다. 힌트는 이미 주었다며 답을 찾아보란다. ‘언제 다시 닥칠지 모를 박해가 두려웠을까?’

소토메 바닷가 가파른 산비탈에, 120호의 카쿠레 키리시탄 가운데 가톨릭교회로 돌아온 26호를 위해 지었다는 자연석을 쌓아 만든 우리 시골 공소 같은 작은 오노 성당이 있다.

근처 바람 센 바닷가 산비탈에 프랑스 선교사 도로 신부가 1882년 세운 소토메 지방 최초의 성당인 시츠 성당과 어망공장, 국수공장 등 기념 유적이 있다. 도로 신부는 가난한 주민들 생계를 도우려고 고국에서 밀을 들여와 산밭을 일구어 재배하여 국수나 마카로니 등을 만들어 나가사키 외국인 거류지에 내다 팔았다는데, 산밭 창고 자리에는 무너진 벽만 남아있다.

고토, 히라도와 쿠로시마 등지로 흩어져 간 카쿠레 키리시탄들을 위해 교회 달력을 만든 전설적인 일본인 평신도 선교사 바스찬의 집도 이곳에 있다. 소토메 해안도로에는 소설 「침묵」의 작가인 엔도 슈샤쿠의 문학관이 있다. 카쿠레 키리시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곳 소토메를 찾아온 작가는, 1627년부터 시작된 5년의 박해기에 선교사나 유력 신자들을 배교시키려고 고문을 한 처절한 실화를 바탕으로 이 소설을 완성했다.

소토메 지역 신자 가운데 30%가 가톨릭교회로 돌아오고, 10%는 아직도 자기들끼리 모여 기도를 드리는 카쿠레 키리시탄으로 살아간다. ‘그러면 나머지 60%의 신자들은?’ 의문을 안고 카쿠레 키리시탄들이 기도를 드리던 너럭바위와 위장한 무덤을 지나 산길을 오르자 카레마츠 신사가 보인다. 열어둔 위패함의 덮개를 닫자 십자 표시가 그려져 있다. 신사 관리책임자 마츠카와 다카하르 씨(73세)가 빙긋 웃는다.

가톨릭교회로 돌아오지 않은 카쿠레 키리시탄들에 관한 의문은 그에게서 비로소 풀렸다. 불교 신자로 절에 등록하지 않으면 죽음을 당하던 박해 시절, 살아남게 해준 게 바로 불교였다. 카쿠레 키리시탄들이 다 가톨릭으로 돌아오면 절은 신도가 없어질 정도란다. 그래서 60%는 선조들을 지켜준 불교에 감사하며 가톨릭 신자이자 불교 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집에서는 물론 성물도 갖춰놓고 가톨릭 전통을 지킨다고 한다.

마츠카와 씨는 끝내 세례명을 안 밝힌다. 선조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절에서 묵인해 주었기 때문이라며, 카쿠레 키리시탄들이 깨트리면 안 되는 계율 같은 것, 불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고 싶다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일본의 박해 역사가 낳은 유례없는 존재 ‘카쿠레 키리시탄’, 그들의 삶을 생각하며 밤길을 달려 이른 곳은 관광지이자 순교지인 운젠 지역의 유서 깊은 온천 호텔이었다. 일본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 저녁상을 앞앞이 받아들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정담을 나누었다. “다 잊어도 좋다. 그러나 사랑은 담아가라.”는 이리구치 씨의 당부를 새기며 노천탕에 몸을 담갔다.


운젠 지옥 온천과 시마바라 반도

아침에 일어나 본 운젠은 매캐한 유황 냄새, 허옇게 변한 바위, 부글부글 끓는 물, 하얗게 치솟는 증기로 지옥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듯했다. 이곳에서 고문을 받고 순교한 33명 가운데 26명이 시복되어 188위 복자에 포함되었다. 운젠 지옥 순교자 기념비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잠시 두 손을 모으고는 시마바라 반도로 향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키리시탄 영주 아리마 하루노부의 토지를 몰수하자 아리마 영내에 신자들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가신들을 여럿 죽였다고 한다. 시마바라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방파제에 작은 표지판이 붙어있다. 중신 우치보리의 아들 셋을 비롯해 신자 15명을 헤엄을 못 치도록 손가락을 잘라 수장했다는 슬픈 사연이 적혀있다.

시마바라 성당에 들렀다. 일본 최초의 사제인 나카우라 주리안(1568-1633년)의 동상과 의사요 선교사인 루이스 데 알메이다(1527-1583년) 동상이 서있다. 마당 한쪽에 복자 우치보리 가족의 동상이 눈길을 붙든다(12쪽 사진).

손가락이 잘린 손을 쳐든 어린 아들, 부모는 말없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키리시탄 묘지로 가는 길에 눈물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일본식 입식 묘비가 아니라 둥근 어묵을 반으로 잘라 엎어놓은듯한 특이한 복비 (伏碑)가 선교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히노에 성터에 이르자 빗줄기가 굵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랑을 받던 키리시탄 영주 아리마 하루노부가 살던 곳이다. 그는 추방되어 살해당하고 가신들은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을 당해 순교했다. 폐허가 된 성 들머리에 일본 최초의 신학교인 아리마 세미나리요 옛터 표지비가 번성했던 시절을 증언하고 있다.

근처에 하라 성터가 있다. 시마바라 성을 지으려고 기근에도 세금을 과하게 거둔 영주의 폭정에 항의하던 시마바라와 바다 건너 아마쿠사의 농민들이 함께 난을 일으켰다가 도쿠가와의 대군에게 포위되어 전멸당한 곳이다.

가톨릭 신자로 추정하는 전설의 농민군 지도자 아마쿠사 시로의 동상이 비에 젖고 있다. 결전을 앞두고 총알로 묵주를 만들고 십자가를 만들던 농민군들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본다. 성터에서 내려다보이는 검은 바다 위로 비는 내리고 까마귀만 “까악~까악~” 울어대며 무리지어 난다.

바다가 보이는 멋진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순례를 마감하는 시간, 아리마 영주의 가신 세 가족 8명(11세 소년도 있었다.) 이 배교를 거부하고 화형당한 옛터를 찾았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8개의 기둥을 세운 기념비 앞, 불교 신자가 희사했다는 작은 터에 하얀 자갈을 깔아놓았다. 이곳 아리마 순교지를 끝으로 숨차게 달려온 순례 일정을 마감하며 우산을 든 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삼종기도와 주모경을 바쳤다.

후쿠오카 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주변에 하나같이 반듯한 집들이 이어진다. 가난 때문에 입 하나라도 덜어야 했던 시절, 고토의 섬들에서는 ‘마비키’(솎아냄 : 생활고로 산아를 죽이던 일)가 행해졌다고 한다. 그 고난의 시절, 감자와 고구마로 겨우 연명하며 숨죽여 살아가면서도 끝내 신앙을 버리지 않고 250여 년을 견디게 한 힘은 무엇일까?

“7대만 기다려라. 그러면 서양에서 사제가 흑선을 타고 성모상을 안고 나타나리라.” 전설적인 선교사 바스찬의 예언, 바로 ‘희망’이 그 답이었으리라. “저들이 품고 있는 것과 똑같은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사도 24,15) 고난의 시기를 견뎌낸 우리 신앙 선조들을 생각하며 닷새간의 여정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감했다.

“아리가토 고자이마스(고맙습니다)!”

[경향잡지, 2012년 12월호, 글 · 사진 배봉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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