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 성인 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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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1-11 ㅣ No.2051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 성인 공경

 

 

지인들과 유럽 여행을 하다가 어색한 분위기가 될 때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성인의 석상을 예술품으로 감상하다가도, 화려한 보석함에 모셔진 유물, 유골에는 그만 눈살을 찌푸리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리(舍利) 문화에 익숙하지만, 개신교 신자라면 이런 ‘성인 공경’ 문화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겁니다. 교회가 역사적으로 크게 두 번의 분열을 겪을 때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교회의 성인 공경 전통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신학적 이야기는 접어두고 우리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나 그려봅시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로 유다인, 비유다인 차별이 사라진 뒤, 로마 제국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모여 기도를 했을까요? 1~2세기 초대 교회는 유다교의 시나고가 같은 건물이 없었습니다. 박해를 받던 시기여서, 기껏 매주 누구 집에 몰래 모여 성찬례를 거행하고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 시리아의 ‘두라 에우라라포스’ 가정교회(domus ecclesia)도 그런 모임에서 시작되었을 겁니다. 근데 개인 집이 아닌 외부에서 하느님과의 결속을 느낄 수 있다고 여기던 곳이 있었는데요, 바로 ‘순교자의 무덤’입니다.

 

그리스어로 순교자 μάρτυς(마르투스)는 ‘증인’, ‘증거자’란 뜻입니다. 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킨 사람을 가리키죠. 그래서 초대 교회 신자들은 순교자를 성인으로 여기고, 확고한 신앙을 본받으려 했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분 지체”(1코린 12,27)이기에 순교자와 끈끈한 유대감도 있었죠. 신자들은 하느님의 빛나는 사람인 성인의 요청을 하느님께서 거절하지 않으시리라 믿었기에, 순교자들을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특별한 중재자로 공경했습니다. 시쳇말로 든든한 ‘빽’이었던 거죠.

 

 

박해 시기 순교자의 무덤에 모이는 건 큰 장점이 있었습니다. 일단 인적이 드문 곳이었습니다. 법으로 매장은 도시 성벽 밖 지하 공동묘지, 그러니까 카타콤바에서만 가능했거든요. 게다가 장례를 치른 뒤 무덤을 다시 찾아와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는 게 로마 관습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서 성찬례를 한들 의심을 사지 않았습니다. 물론 257년 발레리아노 황제가 그리스도인의 카타콤바를 색출하고, 신자들의 출입을 금지했지만, 그리스도교가 공인될 때까지 카타콤바에 모여 기도하는 전통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초대 교회 신자들은 순교자의 유물과 유해에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유품으로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도행전의 기록(19,11-12)이 있지만, 로마 이교도들은 유해 일부분을 불결하다고 꺼렸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만의 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마소 1세 교황(재위 366-384)은 순교자를 현양하기 위해 아피아 가도 주변에 있던 성 세바스티아노의 무덤을 포함해서 그 일대의 카타콤바 통로와 입구들을 재정비합니다. 이때 마치 오늘날 지하 소성당처럼 순교자 무덤 앞에 대리석으로 치장된 큰 공간을 마련했으며, 제대와 사람들이 음식을 나눌 작은 탁자와 의자도 만들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그곳 순교자를 수호성인으로 삼는 카타콤바 성당도 늘어났는데, 아시다시피 성 베드로 대성당도 베드로 사도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순교자 공경, 성인 공경과 같이 자라납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로 순교자 외에 신앙의 모범이 된 수도자나 성직자도 공경할 성인으로 모셨습니다. 8세기 외세 침입이 잦아지고 법이 바뀌어서 도시 안 매장이 가능하게 되자, 성 밖 카타콤바에 있는 성인의 유물을 안전한 시내 성당으로 옮겨오기 시작합니다. 지금 유럽 성당에 성인의 무덤이나 성유물을 볼 수 있는 건 여기서 유래된 거죠.

 

중세 사람들에게 성유물은 성인과 지상 교회를 이어주는 상징인 동시에, 신앙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천사처럼 성인은 하느님 가까이 있다가 언제든 지상에 내려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성유물이 모셔진 수도원이나 대성당을 찾았습니다. 오딜리아 성녀의 무덤이 있는 몽생오딜 수도원도 그런 순례지였고, 웅장한 독일 쾰른 대성당이나 우르술라 성당도 성인 공경 전통의 소산입니다. 물론 중세 말 이런 순수한 경건심을 악용한 일들이 교회 분열의 빌미가 됩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성인 공경 전통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성상 파괴 운동까지 일어나기도 했죠. 이에 맞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전통을 수호하고자 오히려 성유물 공경을 권장했는데요, 그때 갈등의 여진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듯합니다.

 

일상에서 어려움에 닥치면 어떻게 하십니까? 신앙인이라면 세상의 해결책과 다른 방법을 찾을 텐데요, 성인 공경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하느님께 쉽게 다가가는 방법에서 시작이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21세기 우리도 성인 공경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차윤석 베네딕도 - 서울대교구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친 뒤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중세문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분도통사」를 비롯한 여러 번역을 했으며, 「교양으로 읽는 용선생 세계사」(1-15권) 기획, 집필했다. 현재 <사회평론>에서 단행본 본부장을 맡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1년 겨울(Vol. 56), 차윤석 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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