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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한국의 첫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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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30

한국의 첫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

 

 

김범우(1751-1787년)는 경주 김씨 충의공파 62세손으로 역관 가문의 출신이다. 그는 조선조 영조 27년(1751년) 음력 4월 23일 서울 명례방에서 부사맹 벼슬을 하던 김의서와 남양 홍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정지’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잘하여 중국어에 능통하였다. 

 

김범우는 스물두 살 때인 영조 49년(1773년)에 국가의 통역관 시험인 역과 증광시에 2등급으로 합격하여 역관이 되었고, 학문을 좋아하여 당대를 풍미하던 학자들, 그 가운데서도 서학이란 신학문을 하던 양반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는 양반 선비들 가운데서 특별히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추종을 받고 있던 이벽의 인품에 끌려 스승으로 모시며 따랐다. 김범우는 이렇게 한국교회 창설 공로자인 이벽을 따르면서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듣고 심취하여 신봉하게 되었다. 

 

정조 8년(1784년)에 김범우는 초기 한국교회의 입교 절차가 행해졌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토마스로 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김범우 토마스는 당시 남인계 실학자인 정약전/약용 형제와 권일신 부자 등과 함께 이벽의 집에 드나들며 교리를 배우고 교회 예절에도 참례하였다. 그러다가 입교자가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집에서 모임을 갖기가 어려워져 안타까워하는 이벽의 근심을 알아차리고 김범우 토마스는 곧 자신의 집을 임시 성당으로 내놓고 모임 장소로 사용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벽은 이 청을 받아들여 정기 집회의 장소를 수표동 자신의 집에서 명례방 김범우의 집으로 옮겼다. 이렇게 1784년부터 김범우의 집에서 갖게 된 정기 집회가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기점이 되었다. 이 모임을 기점으로 보고 1984년에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했던 것이다. 

 

이들은 주일이 7일째에 온다는 것을 생각하여 1784년 늦가을부터 매월 1일, 7일, 14일, 21일, 28일에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교리를 공부하며 첨례와 기도를 바쳤다. 수표동 이벽의 집이, 이벽과 정약전/약용 형제, 권일신, 최창현, 김범우 등이 이승훈으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았던 곳으로 한국교회의 최초의 천주교 입교 절차가 행해진 장소라고 한다면, 명례방 김범우의 집은 초기 신자들이 모여 정기적인 신앙 집회를 가졌던 곳이라는 점에서 천주교의 창립과 확산, 김범우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수용은 양반 선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천주교의 학문적 연구와 수용 과정에 중인들의 참여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신분제도 아래의 조선 사회에서 양반가에 서민이 드나드는 것은 제한되어 있었고, 서로 쉽게 통교하는 처지도 못되었다. 이러한 제약은 양반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천주교의 포교와 확장에 한계가 되었다. 그런데 김범우의 집은 비교적 통교와 출입이 자유로운 중인의 집이었기에 천주교 확장과 서민에 대한 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실제로 김범우의 집에는 「천주실의」, 「칠극」 등 천주교 서적이 비치되어 있었고, 서학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이 신분을 초월하여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초기 한국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순교자 최인길, 최필공, 김종교 등 중인 출신의 인재들이 모두 김범우를 따라서 입교한 사람들이었다. 

 

홍익만, 변덕중, 윤지충 등의 양반들이 중인인 김범우의 집에 드나들며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입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입교한 역관 출신 중인과 특히 그뒤에 의관 출신 중인들이 활동과 출입이 자유로웠던 이점을 활용해 남긴 복음 선교의 업적과 열의가 모두 김범우에게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가족도 신앙생활로 이끌었는데 그의 동생인 김이우/현우가 모두 1801년 신유박해 때 장렬히 순교하였다. 그리고 명례방의 그의 집이 중국 사신들이 거처하던 장례원에 가까이 있었고, 또 그 자신이 역관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오던 천주교 관계 서적을 입수하고 중국 사신들한테서 중국 천주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도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785년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정기집회를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형조의 순라군에게 발각되었고 집주인인 김범우가 투옥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이만채가 천주교 박해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벽위편"에 이렇게 적혀있다. 

 

"을사년(1785년) 봄에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등이 장례원 앞 중인 김범우 집에서 설법을 하였다. 거기에는 이벽이라는 자가 있었다(이는 지퇴당 이정형의 후손이요 병사 이격의 동생이며, 동시에 병사 이석의 형이다). 이벽은 푸른 수건으로 머리를 덮어쓰고 바람벽을 의지하여 앉아있었다. 이승훈과 정약전/약종/약용 삼 형제와 권일신 부자가 모두 스스로 이벽의 제자라고 칭하며 책을 들고 둘러앉아 있었다. 이벽이 설법하고 가르치며 꾸짖곤 하는데, 우리 유교에서 사제지간에 갖추는 예의보다 훨씬 더 엄하였다. 

 

날짜를 정하여 함께 모이기를 이미 수개월 동안이나 하였으며 양반, 중인 등 여러 선비들이 수십 명씩이나 되었다. 그런데 추조금리가 그 모임을 술 마시고 도박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들어가보니 거의 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수건을 쓰고 손가락으로 이상한 손놀림을 하므로 그 예수 그림과 책과 물건들을 압수하여 추조에 가져왔다. 추조판서 김화진은 양반집 자제들이 잘못된 길에 빠지게 된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잘 타일러서 내보내고 다만 김범우를 가두었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김범우가 양반들과 함께 교회 예절을 거행했는데 양반들은 돌려보내고 김범우만 옥에 가두고 배교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배교를 거부하자 여러 가지 고문이 가해졌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앞서 풀려났던 권일신 등이 다른 여러 신자들과 함께 “우리도 김범우와 같은 종교를 신봉하니 같이 처벌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화진은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고 김범우에게만 계속해서 배교할 것을 강요하며 형벌을 가했다. 이 사건을 이른바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천주교회가 받은 최초의 박해이다. 

 

중인이었기에 혼자만 문초를 받게 된 김범우는 형조판서 앞에 불려가서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배교를 끈기있게 거부했다. 여러 가지 고문이 계속되었지만 그는 잠시도 굽히지 않았다. 김범우 토마스의 행적과 옥중 형벌의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형조에서는 여러 가지 형벌을 가하며 배교를 재촉했으나 그의 불굴의 의지와 굳은 신앙을 꺾을 수 없자 매질하여 귀양보냈다. 그는 귀양지에서도 큰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가르쳤다. 그의 강인한 용기와 인내심은 조금도 변함없었다. 그러나 모진 형벌에서 얻은 깊은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귀양지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최근 김범우 토마스의 귀양지가 경남 밀양의 단장임이 밝혀졌다. 우리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조정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는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윤지충이다. 그러나 비록 관아에서 사형선고를 받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그보다 앞서 박해와 형벌 속에서 신앙을 증거했으며, 그 형벌의 상처로 죽은 김범우는 한국의 첫 순교자이다. 그리고 서울의 명동성당은 한국교회 창설의 기점이 된 집회가 이루어졌던 명례방 김범우의 집을 역사적으로 기념하는 성당이기도 하다. 

 

[경향잡지 2000년 3월호, 김길수 요한(전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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