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무명 순교자 이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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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29

신유박해 순교자들 (11) 무명순교자 이종국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하느님 자비로 천당 가오"

 

 

1795년 말에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지방관리들에 의해 다시 체포되어 고향인 천안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6년 동안 관헌의 감시를 받으며 연금생활을 하였는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그를 신문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아전들은 그들이 존경하고 있고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 헌신적으로 글을 가르쳐 주었던 이존창을 그다지 괴롭히지는 않았다. 이존창은 1801년 재판을 받고 순교하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연금 당한 채 지내면서도 굳굳한 태도를 보이며 모든 사람들이 다 알도록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말과 모범으로 그 지방에 큰 이익을 주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여사울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보기 위해 잠시 다녀올 허락을 받았다. 그는 여사울로 가서 가족들을 만나면서 당시 천주교의 현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때, 그는 교우들이 무서움에 못 이겨 천주교 서적들을 모두 동네 광장에 모아놓고 불살랐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듣고 이존창은 눈물을 흘리며 몹시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단 한 권의 서적이라도 불태움을 모면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토록 주님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여기던 이존창은 신유년 2월 26일 서울로 이송되어 정약종, 최창현과 같은 날 사형선고를 받고 조정의 명에 따라 공주에서 사형집행을 당했는데, 그의 순교일은 서울의 순교자들보다 이틀 뒤인 2월 28일에 치러졌다(가톨릭신문 2246호 참조). 그의 머리는 여섯 번째 칼질에 가서야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친척들이 며칠 뒤에 유해를 거두어 가족묘지로 옮길 때, 떨어졌던 머리는 목에 단단히 붙어있었고 단지 희끄무레한 실낱같은 흉터만이 남아 있는 것 외에 다른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해 갈 무렵 수많은 무명순교자들 또한 함께 승리의 영광에 동참하고 있었다.

 

무명순교자들의 묘지에 서면 더욱 절실하고도 숙연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상상하며 앙모하게 된다. 지극한 고난의 한 순간을 장엄하게 또는 애절하게 남긴 한 토막 이야기만이 남아 있을 뿐, 이름도 출신도 모르는 순교자들의 사연은 더욱 강하게 우리들 가슴에 여운을 남긴다.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이종국은 다만 그 이름만이 전해질 뿐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순교자들 중 한 분이다. 이존창이 순교한 보름 후에 그가 순교한 바로 그 자리 공주읍내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무명이라 할 한 교우의 사형집행이 있었다. 그에 대한 이 한 대목에 전해진 이야기는 마침 그 때에 어떤 사정으로 옥 근처에 갔다가 그 곳에서 일어난 일을 똑똑하게 보고들은 80세 노인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

 

가족도 세례명도 자세히 알 수 없고 다만 이종국이라고만 전해지는 사람이 청주에서 잡혀 공주로 압송되었다. 그 사람이 죽기 전날은 3월 보름 무렵이라 달이 환히 밝았는데, 그는 밤새껏 옥 문지방에 기대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새벽녘에 그는 문을 열고 동쪽을 쳐다보며 "왜 날이 이렇게도 더디 새느냐!"하고 여러 번 부르짖었다. 그리고 총소리를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저게 좋은 신호다. 곧 나를 부르러 오겠구나" 하고는 더욱 열심한 마음으로 다시 기도를 시작하였다.

 

몇 분 후에 다시 총소리가 한번 울린 다음 옥문이 열리고 옥졸들이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이 바로 '사자밥'이었다. 조선시대 수많은 순교자들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듯이 옥중생활은 언제나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사형수에게는 사형집행 전에 마지막으로 근사한 밥상을 차려주었다. 그래서 사형수들은 이 마지막 밥상을 받으면 곧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형수들은 죽음을 알리는 그 마지막 밥을 차마 먹지 못한 채 울다가 형집행장으로 간다.

 

이종국은 마지막 밥상을 받고는 이 세상에 좋은 것을 그렇게도 많이 창조하신 것을 오랫동안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나서, 그에게 준 음식을 골고루 다 맛보았다. 그가 밥상을 물리고 다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을 때에 갑자기 "이종국을 끌어내어라"하는 호령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듣자 이종국은 곧 일어나서 함께 갇혀있던 교우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성모 마리아님의 도우심으로 이제 천당의 복을 누리러 가오. 여러분도 신뢰하는 마음을 잃지 말고 나처럼 하시오!"

 

그가 이렇게 큰 소리로 교우들을 열렬히 격려하고 있을 때 형리들이 그를 재촉하였다. 그리고 그를 옥에서 끌어내어 형장으로 가는 말에 태웠는데, 말안장에 거꾸로 앉도록 했다. 이렇게 형장으로 가던 이종국의 얼굴은 기쁨에 빛나는 모습이었다. 참수형으로 순교의 승리를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얼굴에 어린 기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쁨에 찬 모습으로 목숨을 바친 때는 1801년 3월 13일(음)이었고, 그의 나이 스물 일곱이었다.

 

무명순교자들은 그 이름과 함께 그 행적 또한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이름만이 전해지고 있는 한 순교자의 이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며,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을 영원토록 기리고자 한다.

 

[가톨릭신문, 2001년 5월 20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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