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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9세기 중엽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인식과 문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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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27 ㅣ No.654

[학위논문 소개] 조현범, <19세기 중엽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인식과 문명관>*

 

 

조현범의 논문인 〈19세기 중엽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인식과 문명관〉의 목적은 1831년부터 1866년까지 약 35년간 조선에 들어온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낸 서한들을 분석하여, 그들이 어떻게 조선을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인식이 조선 천주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표된 파리외방전교회와 천주교 선교사에 관한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호교론적인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거나, 프랑스 측의 일차 사료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이 글에서는 호교론적인 성향을 배제하고, 프랑스 측의 일차 사료를 적극 이용하였다. 이를 통하여 해방 이전 시기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이해하는데 관건이 되는 파리외방전교회와 소속 선교사들이 선교지 조선에 가지고 있던 인식 태도를 보다 총체적으로 다루고자 하였다. 


가장 먼저 살펴본 것은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성향과 활동에 관한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우선 선교사들이 파견되던 19세기의 프랑스 천주교회에 대하여 알아보고 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 천주교회는 전통적으로 왕정주의적 입장을 계속 유지하였고, 이 때문에 자유주의 정부나 공화주의 정부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특히 혁명 기간 동안 영국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혁명 이전 사회처럼 전제군주정이 복구되고 아울러 교회와의 관계가 다시 밀접해지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제군주정과 천주교회를 한편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과 천주교 박해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대혁명 당시 전제군주정이 혁명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것은 교회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전제군주정으로의 왕정복고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이고도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왕정복고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이후 펠리시테드라므네(Felicitede Lsmennais)와 같이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가톨리시즘(Catholic liberal)의 흐름이 형성되었지만, 당대의 천주교회는 이러한 사상을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보수화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834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라므네주의를 이단적 사상으로 판단하고 단죄하였다. 결론적으로 19세기 프랑스 천주교회는 반공화주의적 정치 성향과 함께 정교분리의 거부라는 반근대주의적 사상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 천주교회의 반근대적인 사상은 프랑스의 지방 사회로 갈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하였다. 특히 프랑스 국가에로의 통합이 늦었던 지역일수록, 그리고 지방 전통 문화의 뿌리가 깊게 남아 있는 지역일수록, 보수주의와 반근대주의가 강하였다. 그래서 혁명 세력의 천주교회 탄압이 잠잠해지고 반혁명적 분위기가 비등해진 1815년부터 1830년 사이의 왕정복고기에는 광범위한 신앙회복운동이 지방 사회를 중심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19세기 중엽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 대부분을 배출한 브르타뉴 지방과 피레네 지역, 그리고 알사스-로렌 지역이 이러한 신앙회복운동의 경향이 강하였다. 즉 이들 지역은 왕당파를 지지하였으며, 다른 어떤 지역보다 성직자의 권위가 강력하게 유지되는 등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낭만주의 운동은 프랑스 사회의 대중적 신앙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초반 등장한 샤토브리앙(Chataubriant)이나 게랑제(Gueuranger)와 같은 인물들은 천주교회의 문화적이고도 예술적인 측면들에 주목하여, 계몽주의자들의 반종교적 가치관에 대항하여 대중들의 종교적 열정과 경건성을 예찬하는 등, 낭만주의적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대중적인 신앙운동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 지방 사회에서의 종교열과 대중적 신앙운동은 대혁명 이후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신앙갱신운동을 촉발하였다. 결국 19세기 중엽 종교적 열정은 프랑스 국내에서 더 이상 팽창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강렬한 신앙적 열정만으로 무장한 다수의 청년 성직자들이 해외 선교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19세기 프랑스 사회에서는 종교적 영성이 강력하게 대두되며 선교운동이 급격히 부상하였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프랑스 대혁명 당시 천주교회가 당한 파멸적인 위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프랑스 대혁명 이후인 19세기 초반 각종 선교 단체들이 재건되거나 새로 창립되면서, 프랑스 사회에 해외 선교의 바람이 불어 닥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프랑스 천주교회의 해외 선교운동은 선교 단체들의 활동 덕분이기도 하였지만, 실질적인 동력은 대중적인 차원에서 펼쳐진 해외선교자원운동이었다. 1808년 리용에서 창간되어 널리 읽히기 시작한 《교훈적인 편지들》(Letters edifiantes)의 영향으로 다수의 젊은이들이 ‘야만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원하였다. 아울러 때를 맞추어 당시 교황청에서 실시하던 영성 부흥 운동과 해외 선교 지원도 젊은이들의 해외 선교를 이끄는 한 요인이었다.

프랑스의 이러한 사회 분위기로 인하여, 비오 9세가 사망할 당시(1878년) 전세계에 파견된 천주교 선교사들의 약 3/4이 프랑스인일 정도였다. 이것은 선교적 열정에 대한 프랑스 천주교회의 동원력을 들 수 있는데, 그 대다수를 차지한 것이 바로 평신도들의 후원이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평신도 단체는 해외 파견 선교사들에게 물질적인 후원을 하는 傳敎會(l’Oeuvre de la Propagation de la Foi)와 중국을 비롯한 극동지역, 그리고 세계 각지의 어린이 양육을 후원하는 聖?會(l’Oeuvre de la Sainte Enfance)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프랑스 천주교회의 해외 선교 열풍은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주의와 결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문화적인 측면으로는 이국 동경의 취향과 연결되어 있었다. 즉 이국 동경과 동양에 대한 열정은 넘치지만 실제적인 여행은 소수만이 가능한 시기에, 먼 나라에 가서 신앙을 전하는 모험가들의 증거자적인 이야기에 고무된 어른들에게 상상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 사업은 그리스도교의 변두리 지역에 대한 정복 사업인 동시에, 한 세기 이상 프랑스 천주교회의 심장부에 새로운 유토피아를 제공해 줄 수 있었다. 아울러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프랑스 정부의 식민주의 정책이나 간섭주의 정책의 경우, 자국인 프랑스 정부에 이로운 방향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잦았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프랑스 천주교회의 영향 아래 1831년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던 때부터 조선 선교의 단절을 가져오는 1866년 丙寅敎難 때까지 조선에 파견되었던 선교사들은 모두 21명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었다. 그리고 40대에 입국한 앵베르 · 베르뇌 · 메스트르를 제외하면, 선교사들의 입국 당시 평균 연령은 29세로 비교적 젊은 편이었다. 그러나 21년 동안 생활한 다블뤼와 10년 동안 생활한 베르뇌, 프티니콜라, 푸르티에를 제외한 선교사들은 2∼5년 정도 밖에 활동하지 못했다. 아울러 이 시기에 파리외방전교회가 아시아에 파견한 선교사와 비교하였을 때, 조선에 파견한 비율은 약 4%에 불과한데, 이것을 본다면 19세기 중엽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는 조선 선교지의 비중을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에 파견된 21명의 선교사들은 모두 지방 농촌 출신으로, 지방 귀족 출신인 브르트니에르, 선박업을 가업으로 하던 리델, 이름 있는 부르조아 출신인 다블뤼를 제외하면, 대부분 농부 또는 수공업자의 아들들이었다. 또한 대부분이 프랑스 지방 사회의 군소 교구 출신으로,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종교적 활동성이 왕성한 지역들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선교사들이 보수적인 프랑스 천주교회의 성향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성장한 선교사들의 교육 양상을 살펴보면, 이들 대부분은 프랑스 천주교회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서 종교적 지향성이 강하게 담긴 교육을 받았다. 특히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지방 출신이라는 점은 이러한 보수적인 천주교회 교육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파견 선교사들이 서구 근대 문명에 대해서 익숙하지 못하였으며, 과거 절대 왕정 시대의 교육을 몸에 밴 습관으로 가진 사람들이었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는 방법은 2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먼저 사제서품을 받은 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먼저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한 후에 사제서품을 받는 것이었다. 이들은 철학 · 신학에서는 일반 신학교와 비슷한 수업을 받았지만, 선교지에서 성무를 집행하는 데에 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어느 지역으로 떠날 것인지가 결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 지역의 언어를 배울 기회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파리외방전교회의 회칙과 일반적인 선교 방침에 대한 지도서들을 숙지하는 일에 치중하여 교육 받았다. 한편 파리외방전교회의 회칙에는 수도 사제들이 아닌 재속 사제들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인다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수도 서원은 하지 않았다. 다만 ‘굳은 말’(de bon propos)이라는 이름의 서약서 제출이 전부였으며, 이것은 매년 갱신되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에야 파리외방전교회의 정식 회원으로 등록될 수 있었다.

아울러 선교사들은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역으로 가기를 더 선호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파리외방전교회 회칙 194항에서는 전통에 따라 선교 지역으로의 출발은 돌아온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지로의 출발은 매우 격정적인 것이었으며, 출발과 작별의 의식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행하여졌다.

그렇다면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방침은 어떠했을까? 파리외방전교회는 1685년 재속 사제들을 회원으로 받아서 선교 활동을 펼치는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 직할 선교 단체로 창설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685년 8월 17일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이 창립자인 팔뤼(Pallu)와 랑베르(Lambert) 주교에게 내린 훈령에 창립 정신이 잘 드러난다. 특히 이 가운데 주목할 점은 피선교 지역에서 자체적인 성직자를 확보하라는 것과 선교지 현지의 전통적인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는 동시에 선교지 국가와 정치적인 문제로 얽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성직자 확보는 이후 나름대로 충실히 잘 지켜졌지만, 후자의 것들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제대로 지켜졌다고 보기 힘들다. 그 대표적인 예로 중국 및 아시아 지역의 조상 제사금지와 베트남 왕실 전쟁의 개입 등을 들 수 있다.

아울러 1664년 팔뤼와 랑베르가 선교 활동을 위한 첫 번째 기착지인 샴에 도착하여 제정한 지침서인 《모니타》와 이 지침서를 토대로1700년 만들어진 파리외방전교회의 회칙을 살펴본다면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정책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회칙에 따르면 파리외방전교회의 창립 이유와 활동 목적은 동인도와 아시아 지역에서 현지인들이 중심이 된 천주교회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목표를 성취하였을 때는 지체없이 선교 지역을 교황에게 반납하고 다른 선교 지역을 개척하러 떠나도록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파리외방전교회는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교계제도를 설립할 때까지 임시적으로 설치한 교황대리 감목구를 맡아서 이끄는 사명을 부여받은 단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식교구로서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는 하였지만, 교황청의 기준에 부합하는 신앙만을 허용하는 경직성을 보인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모니타》에서 드러난 창립자의 정신은 ① 기독교인들의 구원을 통한 사도직의 성화, ② 비신자들의 개종, ③ 교회 조직의 건설로 간추릴 수 있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일반적인 규칙들을 제시하며, 선교사들의 물질적 재산과 관련한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학문이나 예술적인 관심을 가급적 배제하고 오직 복음 전파라는 고유한 사명에만 몰두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결국 이것은 적응주의적인 선교 방침에 대한 명백한 거부의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방침을 토대로 1857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조선에서는 조선교구 제1차 시노드가 열렸다. 이 시노드에서는 1803년 9월 개최된 사천성 시노드를 기본으로 하여 몇 가지 규칙을 새로 첨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첫 번째는 부동산 매입 금지 조항이며, 둘째는 선교사들의 생계비 중 남은 돈의 환수 조항이었다. 이렇게 통일된 지침을 마련한 것은 점차 조선 선교지로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보다 세부적인 활동 지침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어떤 생활을 하였을까? 초기에 입국하였던 모방, 샤스탕, 앵베르 등은 조선과 중국 국경지대에 위치한 책문을 이용하는 육로로 잠입하였지만, 이 육로가 적발된 뒤에는 상해에서 출발하여 서해안을 통해 입국하는 해로를 이용하였다. 하지만 파리 본부나 홍콩의 극동대표부와 연락을 취할 때에는 양쪽 통로를 모두 이용하였다.

이렇게 입국한 선교사들은 매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정기적으로 교우촌을 순방하는 성사 여행을 하였다. 이 성사 여행 기간 중에 선교사들은 교우촌을 방문하여 미사 성제를 거행하고 고해 · 세례성사를 주었으며, 교우촌에서 일어나는 각종 업무들을 판결하고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위한 지침들을 제시하였다. 당시는 박해 기간인 동시에, 신자수가 급증하고 있어서 소수의 선교사에게 있어 성무 집행은 매우 과중한 업무였다.

그러다가 베르뇌가 입국한 이후 선교 활동은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게 되면서, 파리 본부나 홍콩 극동대표부와 정기적으로 연락을 통하여 선교자금을 들여올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선교사들의 생활도 안정적으로 자리잡아 갔다. 특히 철종대에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이 소강 상태를 보이면서 그들의 활동은 보다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이 기간 동안 선교사들은 미사 거행과 성무 집행을 위하여 제구나 제복을 비롯하여 상본과 묵주 · 십자고상 · 교리서들을 밀반입하였고, 포도주 · 코냑 · 설탕 · 커피 · 시계 등의 생활 용품도 상당수 들여왔다. 즉 선교사들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조선의 생활 방식에 적응해야만 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식 생활 용품과 식료품들을 반입하며 서구적인 생활 방식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19세기 중반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을까?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 가운데, 조선 사회 모습에 관하여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주로 남긴 베르뇌와 프티니콜라의 견해를 살펴보자. 프티니콜라는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조선에는 정치나 상업, 산업이란 것이 모두 형편없으며, 특히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해서는 조선에는 체계적인 정치 질서나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아울러 국왕에 대해서도 언제나 술에 취한 채 성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 또는 악마라고까지 칭하면서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다블뤼는 조선의 국왕은 힘이 없기 때문에, 양반들로부터 고통 받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만약 조선이 대외적으로 개방을 선언한다면 더 큰 불행과 혼란이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다블뤼가 프랑스 대혁명을 거친 19세기 프랑스 천주교회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즉 공화주의적 정치 질서보다는 현명한 군주가 지배하는 전제군주정을 선호하는 사람으로서, 유럽의 근대 · 자유주의적 물결이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정치 질서가 붕괴될 것이라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정치 질서와 국왕에 대한 다블뤼와 프티니콜라의 평가는 차이가 있었지만, 조선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정치적 지배 집단인 양반 관료들에 대한 부정적 입장은 동일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조선의 양반들과 관료들은 지독한 착취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일반 백성들의 삶에 대해서는 매우 동정적이었다. 특히 프티니콜라의 경우에는 조선인들은 성격 자체가 유순하고 통치하기 쉬운 민족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며, 민란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정부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 지방 고을의 수령들에 대한 폭동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일반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양반 지배계급의 탐학과 전횡에 대한 분노가 작용한 탓도 있지만, 조선 천주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선교사들이라는 입장이 더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조선의 천주교회와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장본인들이 바로 양반 지배계급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블뤼는 조선의 외교 정책에 대하여 개방 정책이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유럽의 상인과 군인, 탐험가들이 조선의 문명화 정도가 미숙하다고 판단한 것과 차이가 있다. 즉 다블뤼는 강대국들 사이에 끼인 조선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아무런 침략의 가치가 없는 가난한 나라처럼 보이게 만드는 능란한 정치적 책략을 취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매우 이색적인 것으로, 장기간 조선에서 생활한 사람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한편 일반 백성들에 대하여 다블뤼와 프티니콜라가 비록 동정적이기는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조선인의 성격이나 사고 방식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다블뤼의 경우에는 조선은 문명화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조선 사람들 역시 야만인 특유의 까다로움, 변덕스러움, 탐욕스러움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다블뤼의 이러한 생각에는 근대 유럽인으로서의 합리주의적 사고 방식에 입각한 판단과, 당시 유럽 천주교회의 엄숙주의적인 신앙관에서 나온 판단이 동시에 작용하였다. 즉 자신들의 합리주의적 사고 방식으로 볼 때 조선인들의 언행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당시 선교사들이 일방적으로 가지고 있던 금욕주의적이고 엄숙주의적인 태도로는 조선인들의 탐욕과 무절제, 그리고 거짓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프티니콜라 역시 이 견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당시 조선 사회의 정신적인 상태가 짐승의 수준이며, 물질적인 면보다 훨씬 더 열악하다고 평가하였다. 이 역시 금욕주의적 생활 관습을 훈련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이들이 이렇게 조선인들의 민족성을 폄하하였던 것은 천주교 신앙의 타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야만 인간적인 모습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던 조선인들의 삶과 성격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강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조선인들의 성격에 대한 선교사들의 묘사 가운데 외국인이 아니면 가지기 힘든 시각도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리지르기 습관이다. 다블뤼는 조선인들의 어조가 매우 높으며, 이것이 다양한 조선의 문화나 생활 습관에도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고 말하였다. 예를 들어 아이들의 글공부하는 소리, 노동요를 부르는 소리, 관아에서 명령을 반복하여 외치는 소리 등, 이 모든 것들을 격렬하게 높은 어조의 공통점으로 묶어 조선인들의 관습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활기찬 모습으로 묘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블뤼는 시끄럽기만 하고 어리석은 짓으로 평가하고 있다. 결국 다블뤼의 이러한 묘사에는 서구 유럽인의 입장에서 비서구인을 타자화하는 시선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블뤼와 프티니콜라는 조선인들의 음식과 음주 습관에 대해서도 야만적인 사회 사람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폭식과 폭음이라고 평가하였다. 폭식에 대하여 다블뤼는 조선인들은 자제를 할 줄 모르고, 기후가 습하여 식량 보관이 용이하지 않으며, 가난하여 언제나 굶주려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또한 폭음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습관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폭음에 대하여 프티니콜라는 과도한 음주 습관 때문에 국가 재정이 낭비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즉 조선에서는 쌀로만 술을 빚기 때문에 곡물 낭비가 심해져서 물가 상승의 요인이 된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인들의 음주와 같은 생활 습관을 피상적인 차원에서 묘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분석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블뤼는 조선인들의 사고 방식에 대하여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멀리 떨어진 남편과 아내가 어느 날 잠자리를 함께하는 꿈을 꾼 후, 그로부터 10달 후 아이를 낳았고, 국왕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이 아이의 혈통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 일화를 소개한 것에는 함축적인 문화적 일화를 활용해 타자의 행동과 관행 및 제도를 비웃는 행위가 숨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는 난제를 회피한 채, 자신의 문화적 생성물이나 사회적 행동의 우수성을 암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19세기 중엽의 조선 사회에 대한 선교사들의 인식 가운데서 극단적인 편차를 보이고 있는 부분은 조선의 관습과 사회생활에 대한 묘사이다. 특히 다블뤼의 경우에는 초기와 후기에 따라 그 인식이 크게 달라진다. 다블뤼는 입국 초기에는 조선인들의 가족 생활이나 성생활, 자녀 교육 등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조선에 적응하면서 조선인들의 관습과 생활 방식을 이해하게 되고, 또 그 가치를 재인식하였다. 그러므로 따뜻한 가족애를 가지고 자녀들을 책임감 있게 양육하는 조선인들, 상호 부조와 공동체적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해학적인 오락과 놀이 문화 속에서 순수하면서도 단순한 즐거움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모습은 다블뤼에게 있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물론 이러한 인식에는 조선 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자적 이해만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 대한 묘사들 중에는 자신이 태어난 유럽이 근대 사회로의 이행기라는 격변을 거치면서 상실할 것을 낯선 이방의 땅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심성도 깃들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다블뤼의 인식이 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는 여전히 조선인들의 야만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조선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와 부정적인 이미지가 혼합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선교사들이 인식한 조선의 종교에 대하여 살펴보자. 사실 선교사들은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건너온 사람들이었으므로, 조선의 종교적 상황이나 종교 생활을 관찰하고 기록할 때에 자신들의 종교적 입장이 개입하게 된다. 또한 특정한 종교적 관념이나 종교적 실천 행위들은 고도의 상징적인 의미 체계를 수반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 관찰자들은 필연적으로 어떤 오해나 초점의 불일치를 담게 된다. 그러므로 19세기 중반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의 종교 생활에 대하여 기록한 내용들에 대하여 엄밀성이나 객관성을 부여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전제하여야 한다.

우선 불교에 대한 시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블뤼는 고려시대 반포되었던 법령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불교에 대한 지식이 월등하였는데, 19세기 불교에 대해서는 이미 쇠퇴하였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프티니콜라는 자신의 국한된 경험이나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에 기반하여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불교 승려들의 생활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사악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는 잠재적인 경쟁 세력에 대한 의도적인 폄하와 개인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자의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민간 신앙에 대해서도 다블뤼와 프티니콜라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아울러 조상숭배 또한 민간신앙과 함께 미신과 우상숭배 등의 용어로 집중 비판되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굿 등의 활동을 자주 접하였던 까닭인지 그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기까지 한데, 굿을 행하는 무당과 점쟁이 등을 모두 악마의 하수인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은 모두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불교와 민간 신앙과는 달리, 유교에 대해서는 다블뤼와 프티니콜라의 견해가 다소 차이가 난다. 다블뤼는 유교적 사회 질서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이것은 유교의 근본적인 가르침 자체가 종교적 신성의 문제를 담고 있지 않다고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유교의 종교성을 전면 부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이전에 유교 이념을 사회적 원리로서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다블뤼는 조선인은 지고한 존재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상제나 하늘이라는 말속에 나타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다블뤼의 견해는 중국 의례 논쟁의 쟁점들과 정확히 일치하며, 다블뤼는 조상 제사 허용을 주장한 예수회 측의 주장과 유사한 견해를 전개한다. 물론 조상 제사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취했지만, 조선의 외교인들조차 특별히 위대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혼이 소멸하지 않고 계속 지속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 제사를 드린다는 不遷之位를 설명하였고, 불천지위를 인정하는 사고는 영혼 불멸설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교리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이에 비하여 프티니콜라는 공자가 내세운 원리나 도덕적인 가르침은 이미 외면되고 있으며, 조상들에게 바치는 제사 행위만 유지되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특히 죽은 조상의 넋에 제사를 바치면서도 조상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조선인들의 무신론적인 경향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조선에는 종교가 없으며, 신도 숭배도 어떤 소망도 없다고 보았다.

조선의 종교에 대하여 이렇듯 선교사들 사이에서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다블뤼와 프티니콜라 모두 조선인들의 종교적 가능성과 천주교 선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낙관적이었다. 다블뤼에 비하여 비교적 조선에 비판적이었던 프티니콜라는 조선에 천주교와 세력 다툼을 벌인 만한 종교 자체가 아예 없다는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조선인들이 미신에 빠져 있는 것은 다른 종교적 신앙이 없어서 그쪽으로 쏠린 것에 불과하며, 원래 조선인들이 미신에 얽매인 민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주 문제를 비롯한 관습의 개혁이 이루어진다면 천주교 전파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았다.

19세기 서양인들에게 문명화의 사명(mission civilisatrice)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지배적인 가치로서, 모두가 공유하는 일종의 시대 정신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들 또한 문명화의 사명을 어떤 형태로든지 공유하고 있었고,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에게는 조선을 개항시키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이들이 얘기하는 문명화는 문명 국가들과 통상 조약을 맺어 서로 물자를 교환하면서, 서양의 종교, 즉 그리스도교가 들어가 그 풍속을 교화할 수 있도록 종교 자유의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주교회와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을 서구 근대 문명의 전파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특히 프랑스 천주교회의 경우에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근대화를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였고, 때로는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프랑스 함대의 조선 출병론에 대해서, 조선 내 프랑스 선교사들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들은 대부분 선교사들이 프랑스 함대의 조선 출병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의 태도는 식민주의와는 무관하며 다만 종교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연구자들은 조선 출병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한 직접적인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만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서 종교 자유를 승인받기 위한 방책으로서 프랑스 함대의 조선 출병을 지지하였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프랑스 함대가 출병함으로써 조선 정부가 함부로 박해를 할 수 없었고, 이에 조선 내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종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이 주장의 요지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때로는 선을 넘어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기도 하는 것은 방법적인 면에서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당시 아시아 각지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던 프랑스 성직자들 중 일부 인사가 품고 있었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 입장은 비록 선교사들이 종교적인 명분을 내세웠다고 하더라도, 프랑스 함대의 조선 출병을 지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프랑스 정부의 대외 식민정책에 부응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선교사들은 프랑스 제국주의적 침략자들의 첨병으로, 그리고 砲艦 외교의 앞잡이로 입국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에 진출하던 1831년부터 한불조약이 체결된 1886년까지 프랑스 정부의 대외정책을 제국주의라는 틀로 분석하기도 하였다. 즉 당시 선교사들은 프랑스 함대의 조선 출병과 무력을 사용한 강제적인 개항과 종교 자유 강요를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들은 선교사들의 입장이 모두 동일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실 함대의 출병에 대해서 페레올의 경우처럼 신앙의 자유를 양심의 자유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이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무력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과 이에 반대하는 메스트르처럼 선교사들 간에도 의견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그러한 차이점들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1860년을 전후하여 발생한 북경 사태와 코친차이나 사태로 인하여 극동지역 전체는 본격적인 서세동점의 판도로 재편되었다. 우선 1858년에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중국 사이에 맺었던 텐진조약은 1860년 10월북경조약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선교사들은 중국 내륙지방까지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며, 서양인 선교사뿐만 아니라 중국인 신자들까지도 지방 관리들이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가 추가되었다. 이러한 조항이 포함된 조약으로 인하여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괄하는 반기독교 운동과 반선교사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19세기 말까지 외교상 분쟁거리로 비화된 교안의 숫자가 400여 건에 이를 정도였다.

아울러 1858년부터 1862년 사이에 발생한 코친사이나 사태의 결과로 프랑스는 베트남 전역에 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유럽인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지의 천주교 공동체들이 파괴되었다. 이러한 점은 조선 내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본국의 함대를 끌어들였을 때 생길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사실 1860년대 이전부터 조선에서 활동한 천주교 선교사들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함대의 조선 출병을 지지하였으며, 이를 위해 조선의 지리와 침략 방책 등 출병에 필요한 정보들을 자발적으로 제공하였다. 물론 이것은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들이 본국의 식민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조선인 신자들이 지배세력으로부터 착취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천주교의 탄압이 계속되자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조선을 문명화되지 못한 야만적인 나라로 판단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이는 문명화를 표방하며 식민주의정책을 펼치던 유럽 열강들의 모습과 그 맥을 같이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선교사들의 함대 출병 지지 입장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1860년 전후로 발생한 사건들로 인해 수정이 가해진다. 즉 북경 사태와 코친사이나 사태로 인하여 선교지 내부에서 천주교에 대한 반발이 커지는 동시에, 선교지에서의 박해가 초래될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아울러 당시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순교 영성의 측면 또한 출병 지지 입장과 상치되었다. 선교사들의 경우 세속 국가의 힘을 이용한 개항과 선교 활동보다는 순교를 통한 속죄와 구원이라는 복음화의 관점에서 천주교의 미래를 전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세기 중엽 조선에 들어온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장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리고 조선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따라 선교사들 간의 입장은 차이가 났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조선에 대한 이중적인 인식은 공통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인식의 이중성은 프랑스 본국의 침략주의적 대외 정책과 근대 서구문명에 대해서도 이중적이면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이야말로 당시 선교사들의 의식 구조, 선교사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조선 천주교회의 일반적인 성향, 나아가서 그 이후까지 이어지는 한국 천주교 종교문화의 기저에 깔려 있는 정서를 형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분석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의 인식 태도를 알아보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조현범은 이 논문이 가지는 몇 가지 한계를 지적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우선 자료상의 한계를 들고 있다. 이 글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직접 작성한 글에만 의존한 탓에, 조선 정부의 공식 기록과 조선 신자들의 기록, 그리고 비신자들의 기록은 활용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향후 함께 검토해야 할 부분이라고 밝히고 있다. 둘째, 선교사들의 서한이나 보고서 내용을 객관적으로 검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객관적인 사실인지 선교사들의 주관인지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관계 및 생활 양식에 대해 다각도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선교사들의 각종 사회 문화 활동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점을 밝히며 후속 연구의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 이 글은 조현범의 박사학위논문인 〈19세기 중엽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인식과 문명관〉(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02)을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게재한다.

[교회사연구 제28집, 2007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가람(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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