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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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김풍헌 토마스 - 순교 열망 이루지 못한 청빈과 극기의 증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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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28

신유박해 순교자들 (10) 김풍헌 토마스


순교 열망 이루지 못한 청빈과 극기의 증거자

 

 

정조 말기의 천주교 박해는 고루한 집권세력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정치적 주도세력을 차지한 그들은 천주교를 탄압하는 것보다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는 그들의 반대파인 이가환 등 남인의 중요한 지도자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에도 크다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노론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왕이 취한 태도는 미온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지방관리들의 지나친 행태가 천주교 신자들을 더욱 부당한 처리에 희생되게 하였다. 왕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황사영은 그의 백서(帛書)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선왕은 중국에 대한 염려가 없지 않았다. 중국인 신부가 조선에 와 있다는 사실을 북경 정부와의 사이에 어려운 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었다. … 한편 선왕의 성격은 과격한 조치를 싫어하였다. 왕은 신부를 조용히 처치하고 천주교인들을 형벌보다는 유혹과 위협으로 배교시키기를 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신하들에게서 국가기강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의 탈을 쓴 정치적 증오심을 잘 간파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지방의 여러 관리들이 왕의 이름으로 천주교인들에게 저지르는 과격한 처사를 눈감아 주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지방관리들은 조정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그들의 탐욕과 원한을 마음껏 만족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희생된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 한사람이 김풍헌(金風憲, ?∼1801) 토마스였다. 그는 충청도 청양 고을의 중인 가정에서 태어나 약간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질고 꿋꿋한 성격으로 고향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를 신뢰하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풍헌(風憲 : 조선시대 면이나 리의 일을 맡아하는 사람. 오늘날의 면장과 이장에 해당됨)이 되게 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자가 된 후에도 계속 풍헌의 일을 맡아보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열성을 다해 기도하며 교회의 본분을 지켰다. 그리고 신심서적을 읽는데 전심하면서 가족들을 정성껏 가르치고 모든 이웃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냈다.

 

그의 모범적 신앙생활은 모두에게 알려져 1796년 병진(丙辰)박해 때 붙잡혀 청양관아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쑥잎을 말려서 항문에 넣어 쑥뜸을 뜨게 하는 등 잔인하고 가혹한 형벌을 그는 의연히 견디고, 빨갛게 달아오른 보습 위를 맨발로 걷고자 할 때는 관장이 오히려 당황하며 그를 만류하였다. 그 어떤 가혹한 형벌도 그의 신앙을 흩트려 놓지 못하였다. 그의 가슴에 달아오른 보습보다 더 뜨겁게 순교의 열망이 타올랐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하려 했다. 마침내 그에게 사형언도가 내려졌다. 청양현감은 김풍헌 토마스의 사형이 집행되기 사흘 전에 그의 얼굴에 회칠을 한 채 북소리에 맞추어 시장마당을 세 번 돌게 하였다. 이는 죄수에게 모욕을 줌과 동시에 일반인들에게는 경종이 되게 하려는 조선시대 행형의 일종이었다. 그런데 이 장마당 조리돌리기까지 해놓고 갑자기 청양현감이 파면되어 김토마스의 사형집행이 연기되고 말았다. 때문에 그의 순교열망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의 간청은 거절되었고, 신관의 부임을 기다리게 되었다. 신관은 재판기록을 검토한 후 김토마스를 옥에서 내어놓고 보석으로 한 개인의 집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리고는 며칠이 지난 뒤 그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김토마스는 만나는 사람마다 순교의 행복을 얻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며, 이승의 삶이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추방당하여 더는 고향에 머무를 수가 없어서 부여, 금산, 고산 등으로 옮겨 살면서 교우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더 없는 청빈으로 극빈한 생활을 했다. 신자들이 그에게 옷이나 새 신을 주면, 그는 아름다운 옷은 교만을 길러주기 쉽다하여 사양하고, 거지를 만나면 곧바로 옷을 바꾸어 입었다. 그는 또 하루에 한끼 밖에 먹지 않았으며 그 한끼도 아주 허술하여 변변치 못했다.

 

1801년 다시 박해가 전국에 미치자 김풍헌 토마스는 그의 가족들을 산골로 데려가 숨겨두며, "여기서 주님 섭리의 명을 기다려라! 나는 순교를 하지 못한 것을 늘 마음 속으로 원통히 생각해 왔는데, 마침 기회가 좋으니 자수하련다"

 

사람들은 그가 없으면 가족이 굶어 죽을 것이라고 만류하고 끝내는 "그대 역시 주님 섭리의 명을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하여 겨우 진정시켰다.

 

순교의 열망을 가슴에 품고 잠시도 긴장을 놓지 않았던 증거자! 청빈과 단식으로 무섭게 절제하며 자신을 이겨낸 승리자인 그는 1801년 7월 추방당한 채 순례의 삶을 살았던 용담고을 안고개에서 병들었다. 주님은 그의 열망을 거두어 주시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것조차도 주님의 뜻이라 생각하며 다만 기뻐할 뿐이었다. 죽기 전날 그는 죽음을 예견하여 자신이 살고 있던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그는 뜰에서 내려 마당에 무릎을 꿇고 겸손한 자세로 합장한 체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의 청빈과 절제와 극기는 모든 신자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과 흠모의 강물이 되어 끝없이 마음과 마음으로 흘러내렸다.

 

[가톨릭신문, 2001년 5월 13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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