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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가쿠레키리스탄의 발자취: 숨어서 피운 신앙의 꽃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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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28 ㅣ No.892

가쿠레키리스탄의 발자취 - 숨어서 피운 신앙의 꽃 (하) 박해 속 이어온 순교영성, 미래에 이어질 신앙유산

 

 

1865년 251년간 잠복해 있던 가쿠레키리시탄들의 존재가 드러났던 ‘신도발견’의 장소인 오오우라천주당. 이곳으로 향하는 거리에는 서양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가쿠레키리시탄의 숨은 뜻

 

나가사키 순례센터 마츠카씨는 “우리가 흔히 쓰는 ‘가쿠레키리시탄’이란 말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과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박해를 피해 자신의 신분을 가장하고 살며 259년간 잠복신앙을 지켜오다 금교령이 해제된 이후 가톨릭으로 돌아온 이들을 이른다.

 

두 번째는 금교령이 해제된 이후에도 가톨릭으로 돌아오지 않고 자신들만의 방식대로 오라쇼(구전으로 전해온 라틴어 기도문)를 바치고, 세례를 주는 등 현재까지도 예전의 잠복신앙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크게 히라도의 마츠우라 영주 통치 아래 신앙을 받아들였던 이들과, 오오무라·아리마 영주 통치 아래 세례를 받았던 이들로 나뉜다. 이키츠키섬 지역에 남아있는 가쿠레키리시탄은 마츠우라, 소토메 지방에 남아있는 이들은 오오무라의 가쿠레키리시탄으로 구분된다.

 

우라카미교회당에 있던 목제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상. 원폭으로 다 타버린 교회당 안에서 성모상의 머리 부분만이 기적적으로 남아 발견됐다.

 

 

세 번째는 금교령이 해제된 이후 가톨릭으로도 돌아오지 않고, 잠복 신앙 형태를 유지하지도 않고 있는 가쿠레키리시탄을 뜻한다. ‘가쿠레’란 말 그대로 ‘숨어있는’ 신자들이다. 어린시절 가쿠레키리시탄의 지도자에게 세례를 받아, 세례명은 갖고 있지만 이들은 더 이상 오라쇼를 바치지도, 자녀들이나 가족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지도 않는다. 이 경우 가쿠레키리시탄 전통의 대가 끊긴다. 나가사키 순례센터 마츠카씨도 이에 해당한다. 그는 “어릴 적 세례를 받았으나, 자녀도 아내도 세례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들은 내 세례명이 무엇인지, 신앙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그에게 ‘신앙심’이 있냐고 묻자 그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며 “이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그는 현대의 ‘가쿠레키리시탄’이었다. 아무에게도 내비치지 않는 속내엔 어릴 적 이야기로 들었던 주님에 대한 믿음과 갈망이 있으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신앙을 밝히지 않은 채 숨어있는 신앙인. 그는 “너무 오랫동안 간직한 신앙이라 선뜻 밖으로 드러내기가 어려웠다”면서 “하지만 늘 마음속에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아픔을 간직한 나가사키

 

박해를 피해 259년간 잠복신앙을 이어왔던 일본의 옛 신앙선조들은 금교령이 해제된 이후에도 쉽사리 가톨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언제 또 박해가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히라도에 처음 신앙이 전파된 이후, 1873년 금교령이 해제되기까지 30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순교하거나 박해받았다. 1597년 히데요시에 의해 처형당한 일본의 첫 순교자 26명의 순교지 니시자카를 비롯해, 마츠쿠라의 박해와 착취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킨 대가로 죽어간 신자 3만 명의 유골이 묻힌 시마바라 지역, 그 시마바라의 난 이후 코오리 마을 동굴에서 발견돼 411명이 처형된 코오리 쿠주레(박해)가 일어난 현재의 마츠바라·다케마츠·후쿠시게 지역 등은 빼 놓을 수 없는 박해의 현장이다. 온천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는 운젠의 유황온천물도 박해의 도구로 사용됐다. 1627~1631년 바오로 우치보리 등 16명의 순교자들은 펄펄 끓는 유황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빼기를 반복하는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손가락을 잘라 수영을 하지 못하게 한 후 겨울 바다에 던져 수장하는 등 잔인한 방법으로 박해는 진행돼 갔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때문에 우라카미천주당은 붕괴됐다. 당시 우라카미천주당을 장식하고 있던 종탑이 성당 근처에 떨어져 있다. 나가사키 정부는 이 자리를 있는 그대로 보존해 관광지로 개발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의 우라카미교회당은 박해의 현장 위에 세운 교회다. 이 마을에선 1790년, 1839년, 1856년, 1867년 네 차례에 걸쳐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다. 후미에(십자가 밟기)로 신자를 가려내 처형했던 박해의 현장에 신자들은 교회당을 세웠다. 하지만 이곳에 또 다른 아픔이 찾아왔다.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이 떨어져 교회당이 붕괴된 것이다. 당시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을 준비하고 있던 신자들과 사제들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8600명의 신자들도 운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원폭으로 붕괴된 그 자리에 또다시 교회당을 세웠다. 박해와 아픔의 자리에 신앙의 꽃을 피운 것이다.

 

 

숨어서 핀 신앙의 꽃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우라카미교회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오우라천주당이 자리잡고 있다. ‘신도발견’으로 유명한 성당이다. 1865년 오오우라천주당 프치쟌 신부 앞에 나타난 가쿠레키리시탄들은 ‘산타 마리아 상’을 찾으며 ‘당신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고 그로써 1614년부터 1865년까지 251년간 신앙을 지켜온 가쿠레키리시탄의 존재가 드러났다.

 

국보로 지정된 이 천주당에는 관광객이 북적대고 있었다. 성탄을 기다리며 마련한 구유 앞에 경배 예절을 드리는 이들도 있었다.

 

나가사키 순례센터 이리구치 히토시씨는 “오오우라천주당을 비롯해 타비라교회(국가지정 중요문화재), 호오키교회당(현 지정 유형문화재), 쿠로시마교회당(국가지정 중요문화재) 등 여러 유적지를 세계 문화유산 후보에 올렸다”면서 “이 모든 유적지는 일본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고 말했다.

 

쿠비즈카. 코오리 쿠주레(박해) 131명 순교자의 머리를 묻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엔 순교자들의 몸통이 묻힌 도오즈카가 있다. 키리시탄들의 목이 다시 붙어 부활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박해자들은 머리와 몸통을 따로 묻었다.

 

 

3박4일 간 순례여정에서 돌아본 곳은 모두 과거 박해의 현장이었지만, 동시에 현재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추진 중인 미래의 일본 문화유산이기도 했다. 이미 폐허가 된 옛 신자들의 생활터전이나 박해 현장 터, 작은 돌무덤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정부 차원의 관리를 하고 있었다. 기자단을 초청해 여러 순례지를 소개하며 널리 알려줄 것을 당부한 것도 모두 이 유적지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현재 우리보다 교세가 미약하다고는 하지만, 과거 가쿠레키리시탄들이 지켜왔던 굳건한 신앙심이나, 이 문화유산들을 보호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현재 일본 정부의 노력은 우리 교회가 배울 점이란 생각이 들었다. 순교자의 피와 가쿠레키리시탄들의 숨은 삶 위에 세워진 일본교회 순교영성은 그렇게 지켜지고 있었다.

 

3박4일의 순례는 은총의 여정이었다. 259년간 지켜온 가쿠레키리시탄의 잠복신앙도, 박해의 현장에 교회당을 짓고자 했던 옛 신자들의 마음도, 박해의 역사와 순교 영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 미래 문화유산으로 발전시키려는 일본 정부의 노력도 모두 감동적이었다. 11월 27일 저녁 후쿠오카 공항을 떠나면서 이리쿠치씨가 남긴 마지막 당부를 떠올렸다.

 

“한국교회와 일본교회에 순례단이 오가며 교류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이 일본교회의 유산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듯, 한국교회도 한국교회의 유산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주십시오. 일본교회의 주교단과 신자들을 초청해주십시오. 서로의 순교 역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후쿠오카 공항을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우리 교회가 생각해봐야 할 과제를 또 하나 실어왔다.

 

아리마 순교지. 배교를 거부한 아리마 나오스미의 세 중신과 그 가족이 1613년 2만 명 이상의 신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순교한 곳이다. 그 가운데에는 11살의 소년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2008년 시복됐다.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26일, 임양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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