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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건축칼럼: 성당, 찾지 않는 자를 찾는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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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11 ㅣ No.900

[건축칼럼] 성당, 찾지 않는 자를 찾는 건축

 

 

유럽에는 오래된 성당이 관광 명소가 되는 예가 많습니다. 그만큼 성당이 이루어내는 풍경 전체가 모든 이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성당도 동네의 사랑받는 풍경이 되어 있을까요? 야곱이 하느님의 집을 세우고 그 고장의 이름인 루즈를 베텔로 바꾸었듯이, 성당은 대지 안에 지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로 인해 지역의 성격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지역의 성격을 바꾸는 힘은 성당이 폐쇄적이지 않고 들어오기 힘들지 않으며, 신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게 하는 데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사회에 대해 열린 성당입니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미사가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하여 찾아오고 싶은 성당, 거룩한 공간을 찾아 아직 자기도 모르는 초월자를 향해 마주하고 싶은 성당, 이런 성당이 진정한 의미에서 가톨릭적입니다.

 

건축가 루이스 칸은 성당에는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을 위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혀 성당에 들어가지 않는 이들을 위한 공간, 성당 건물 가까이에 있지만 그 안에는 들어가지 않는 이들을 위한 공간, 그리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을 위한 공간.” 사실 많은 사람이 매일 성당 옆을 지나 어딘가로 바쁘게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성당에 들어가지 않는 이들’ 중에는 성당 건물을 지나다니며 뭔가를 체험하는 이들이 있고, 성당 건물 안에는 들어가지 않아도 계단에 앉아서 앞에 있는 마당을 바라보며 누구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성당 건물이 좋아서 벽면을 만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당은 ‘전혀 그 안에 들어가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도 존재하며, ‘가까이에 있지만 그 안에는 들어가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도 존재합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보다 훨씬 많습니다. ‘가까이에 있지만 그 안에는 들어가지 않는 이들’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과 ‘전혀 성당에 들어가지 않는 이들’ 사이에 있습니다.

 

안토니 가우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당은 특권층이 다니는 곳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모든 이가 성당을 드나들 권리가 있다. … 그리스도교 성당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나이와 성별, 사회적 조건이나 지위의 구별이 없다. 심지어 악한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은 당연히 큰 자와 작은 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모두를 온전히 품는 성당의 헤아릴 수 없는 넓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성당의 헤아릴 수 없는 넓음’이란 건축 공간이 넓고 높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온전히 품는 것에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문의를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만나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이사 65,1) 성당은 어떤 건축인가? 그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을 공간으로 부르는 건축입니다.

 

[2022년 12월 11일(가해)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서울주보 7면,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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