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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심포지엄: 한말 일제시대 선교회의 한국 진출과 천주교 종합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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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2 ㅣ No.666

[2007년도 심포지엄] 한말 · 일제시대 선교회의 한국 진출과 천주교 종합토론

 

 

* 한말 일제시대 한국 교회와 선교회 (염수정)

*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대목구의 분할 (조현범)
*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과 선교활동 - 일제시대 한국과 만주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 (선지훈)
*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활동 (김수태)
* 머나먼 동쪽을 찾아온 선교사들 - 1945년 해방까지 광주교구의 골롬반 선교회 - (옥현진)


종합 토론

사회자
이석재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총장)

토론자
김정환 신부 (대전교구사연구소)
장정란 교수 (가톨릭대학교)
손숙경 교수 (동아대학교)
김주영 신부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사회자 : 인천 가톨릭대학교에 있는 이석재 신부입니다. 신학교 책임을 맡다 보니까 제가 스케줄을 잡는 것 말고도 다른 스케줄들이 있어서, 오늘 이렇게 시간을 많이 줄여서 발표하게 된 첫 번째 원인이 저한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시간상 7분 질문하고, 7분 대답하시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제1 주제를 발표해 주신 조현범 박사님의 주제에 대해서 김정환 신부님께서 질문을 먼저 해주시면, 그것에 대해서 조 박사님께서 대답을 해주시는 걸로 하겠습니다. 먼저 시작해 주십시오.

김정환 : 먼저 1번이요(모두 웃음). 발표자께서는 조선 대목구 분할 배경에 대해서 1910년의 한일합방이 오히려 뮈텔 주교와 선교사들에게는 호기로 느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이것은 1910년을 전후하여 조선 대목구의 분할이 논의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합니다. 이 글에서는 사료상으로 1910년 3월 5일에 조선 대목구 분할이 공식적으로 논의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이미 분할이 예상되었습니다.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님은 이미 1901년에 조선 대목구 분리를 예상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1901년 화재로 소실된 대구 계산동 성당을 다시 건축할 때 이미 주교좌 성당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 대목구 분리와 한일합방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두 번째 질문으로는 교섭 과정에서 조선 대목구는 두 개, 혹은 세 개로 분할하는 안이 검토되었는데요, 세 개로 분할했을 경우 각 지역은 어떻게 분할될 예정이었고, 이때 거론되었던 북쪽 지역의 분할안과 1920년대에 베네딕도회와 메리놀회에 대목구가 분할될 때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묻고 싶고요.

세 번째로는 뮈텔 주교님이 다른 선교회한테 선교지를 분할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을 때, 정말 그런 선교회가 있어서 한 얘기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1908년에 뮈텔 주교님이 한국에 진출할 선교회를 물색하러 유럽에 갔을 때, 한 군데도 한국에 오겠다고 한 선교회가 없었는데, 1910년에 이르러서 갑자기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궁금합니다.

네 번째로 이 글에서는 조선 대목구의 분할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막상 한국인에 대한 얘기가 없습니다. 한국인 성직자들이 이런 분할 과정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가 궁금합니다. 대전교구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맡고 있다가 방인 교구로 넘어간 역사인데요. 그때 보면 프랑스 주교님을 뽑으라는 투표가 있을 때, 한국 신부님들이 거부하는 그런 사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911년에 대구 대목구 초대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님 선출 과정에서는 한국 신부님들한테 투표권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없었던 것인지, 실제로 없었다면 한국인 신부님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 그것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사회자 : 이 질의에 대해서 대답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조현범 : 토론문을 작성하시고, 유익한 토론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간단히 대답을 하겠습니다. 조선 대목구 분할과 한일합방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이 무리가 있지 않느냐 하셨습니다. 저도 이것이 직접적으로 합방 때문에 분할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는 보지 않고요, 여러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로써 이런 부분도 첨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901년 계산동 성당 재건축에서 로베르 신부님께서 대목구 분리를 예상하였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그런 것 같습니다. 대목구장의 입장으로서 장기적인 플랜(plan)을 언제부터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추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한일합방과 연관 짓는 문제는 간접적으로만 정치적인 문제와 연관지어 살펴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3개로 분할했을 때 북쪽 지역이 어디인가에 대한 문제는 아마 강원도, 경기도, 그리고 이북 지역인 것 같습니다. 평안도 · 함경도 · 황해도 그리고 간도까지를 하나의 북쪽 지역으로 생각했던 것 같고요. 결국에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관할을 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시다시피 1910년대에 발생하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선교사 수가 격감하면서 애초에 뮈텔 주교가 생각했었던 계획은 실현되기가 어려워졌고, 따라서 어떤 사정에 의해 베네딕도회에 본당 사목까지도 맡기는 식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3번 문제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자면, 뮈텔 주교를 비롯한 조선대목구의 지도자급 선교사들이 외국에 가서 마리아회라든지 베네딕도회나 예수회에게 한국으로의 진출을 제안할 때, 본당 사목을 제안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교육 활동의 일부 보조를 위해서 그들을 초빙하려고 하였던 것이지, 이것을 할양해 줄 생각은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나중에 지정환 신부님께서 뮈텔 주교의 일기를 검토하시면서, ‘뮈텔 주교는 한국을 자기 개인 혹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가진, 남한테 넘겨 줄 수 없는 소유물처럼 생각했다’는 비판도 하십니다. 그런 의식도 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 성직자 반응이 궁금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이 부분은 제가 미처 검토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뮈텔 문서에는 분명히 그분들의 서한이 있을 것 같은데, 한 번 검토를 해보고 보완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에 관련 한국인 성직자는 4명이었습니다. 김성학 신부, 김승현 신부, 김양홍 신부, 김명제 신부. 이분들인데 제일 고참인 김성학 신부는 41살이었습니다. 그리고 1897년 서품을 받으셨으니까, 서품 받은 지 15년이 되셨고, 그러니까 충분히 자기 의견을 피력하실 수 있는 입장이셨을텐데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찾아보겠습니다. 다만 파리 외방전교회의 회칙상 ‘이 투표는 결정적인 투표가 아니라 포교성성에서 대목구장을 임명하는 데 참고할 자료로 사용한다. 그때 필요하다면 방인 성직자들의 의견도 투표에 반영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대목구장의 고유 권한 관할이었기 때문에 아마 4명의 방인 사제까지에게 의견을 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인 사제들에게 의견을 묻고 그들 자체에 의해서 토착 교회가 성립되어야 한다라는 것들이 교회 전반적인 정신으로 자리잡는 것은 비오 11세 교황이 1926년에 〈레룸 에클레시에〉(Rerum ecclesiae) 교서를 발표하면서, 방인 사제들을 양성하여서 교계 제도를 육성하라고 동아시아 주교들에게 권고하실 때 그때 가서야 시대의 정신으로서 떠오르지 않았나 합니다. 이 1910년이라는 시점에는 방인 사제들과 방인들에 의한, 또 자치 교회 운영이라는 것들은 아직 시대 정신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단계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 : 혹시 김 신부님 다시 재질문 있으십니까?

김정환 : 아니. 없습니다.

사회자 : 그러면 두 번째로 선지훈 신부님의 발표에 대해서 가톨릭대학교 장정란 교수님께서 질의해 주시겠습니다.

장정란 : 네. 장정란입니다.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과 선교활동〉에 대해서 선지훈 신부님께서는 논문의 목적을 선교 베네딕도회가 서울, 덕원 그리고 연길수도원을 중심으로 펼친 선교 활동의 방법과 특징을 밝히는 데 두셨습니다. 그 연구방법으로는 세 가지 주요 논점을 제시하셨는데, 첫째, 성 오틸리엔 수도원과 성 오틸리엔 연합회의 창립 역사를 창립자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와 한국 진출 당시 최고 장상이며 오틸리엔 수도원 초대 아빠스인 노베르트 베버의 선교사상과 이념의 고찰, 둘째로는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의 근원적 동기를 밝히고, 그리고 셋째 선교 활동의 방법과 특징, 특히 선교회의 선교사상과 이념에 기초를 둔 수도생활 · 교육활동 · 전례활동에 대한 분석입니다.


이는 베네딕도회 설립 초기와 한국 진출 초기 40년 선교에 나타난 선교의 특징을 밝히는 데 적절한 연구이며 방법론적인 설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의 공식 창립 과정과 1867년부터 17년에 걸쳐서 이루어져 회헌의 기초가 된 창립자 암라인 신부의 일곱 가지 기본 사상 및 베버 아빠스의 여섯 가지 전교 이념에 대한 연구는 선교회의 일원인 선 신부님이 아니시라면, 이렇게 정확하고 상세하게 제시하지 못할 귀한 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논평자로서 연구에서 보완되기를 희망하는 몇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시대적 배경으로 일제강점기라는 우리 역사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설명이 배제되어서 좀 아쉽습니다. 예를 들면 발표자는 숭신학교 폐교의 원인으로 사우어 아빠스가 든 두 가지 현실적인 이유, 즉 교회의 재정적 압박과 합병 이후 미션스쿨의 수가 끊임없이 감소했지만 전쟁 때문에 그 해결이 용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논평자의 관점으로는 폐교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교육을 통제하고 특히 한국인이나 외국인 교사 양성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있었다고 봅니다. 1911년 8월 23일에 일제는 식민지에서 시행할 교육지침으로 ‘조선교육령’을, 그리고 곧 이어서 10월 20일에는 조선총독부령 제114호로 ‘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합니다. 학교 설립에 총독의 인가를 절대시하던 이 법은 민간인 설립 학교는 물론이고, 어느 정도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던 선교사 운영 기독교 학교도 규제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일제는 종교기관이나 개인에 의한 고등교육을 제지하고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에는 더욱 엄격하였는데, 이 교육령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 바로 숭신학교였습니다. 또한 한국 실업학교의 모범이었던 숭공학교의 경우에는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시대적 배경으로 작용합니다. 전쟁으로 베네딕도회는 학교 확장에 따른 경비를 마련하기 어렵게 되었고, 교사로 일하던 네 명의 수사들도 징집되어서 학생 증원이 불가능하였습니다. 그 뒤에 독일이 일본의 적성국이 되자 일제의 숭공학교에 대한 사찰과 압박도 심각하였습니다. 종전 후에는 일제가 일본과 조선의 독일인들 소유 재산을 敵産으로 압류하기로 결정하며 숭공학교도 적산으로 몰수하려 하자 서울교구에 형식적으로나마 숭공학교 경영권을 넘김으로써 학교를 구제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패전국이 된 모국으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 설명이 된다면 베네딕도회 선교 활동의 실상이 명확히 납득될 것입니다.

둘째로 보완되기를 희망하는 사항은 당시 한국 가톨릭 교회의 내부적 상황이 검토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베네딕도회 원산교구 진출의 근본 원인은 국적을 달리하는 파리 외방전교회와 베네딕도회와의 관계를 살펴서 규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 조금 전에도 파리 외방전교회와 그 분할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그것도 이것과 조금 같은 맥이 아닌가 싶습니다. 뮈텔 주교는 교육사업을 맡을 수도회를 찾을 때부터 교육 이외에 사목은 하지 않을 것을 강조하여 자신들의 사목 영역이 침범당하지 않도록 제한을 두었습니다. 이는 뮈텔 주교뿐 아니라 프랑스 선교사 대부분의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베네딕도회 신부들 상당수는 학교 교사로서의 간접선교보다는 오히려 본당사목의 직접선교를 원하였는데, 이와 같은 두 선교회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서로의 입장이 갈리면서 그 관계도 달라졌던 것이 결국 서울의 베네딕도회가 함경도로 이전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던 듯싶습니다. 이 같은 당시 한국교회 내부의 여러 상황이 《뮈텔 주교 일기》 등 베네딕도회 외부의 다른 자료들을 참조하여 고찰된다면 선교활동에 대한 한층 균형 잡힌 실상과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셋째로는 이 논문에 원산교구 시대의 중요하고 성공적 교육선교활동의 사례인 해성학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유감입니다. 해성학교는 빈민아동을 위한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1921년 5월 베네딕도회 원산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에카르트(A. Eckhardt, 玉樂安) 신부는 부임 직후 빈곤층 아동을 위한 일종의 무료 야학 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원산교구 해성학교의 효시입니다. 이를 필두로 베네딕도회는 함경도의 다른 본당에도 잇달아 해성학교를 설립하였고, 만주 지역에서 새로운 학교가 설립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전교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성당이 있는 곳에 학교가 있고, 학교가 있는 곳에 성당이 있다”라는 말은 바로 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같은 해성학교를 통한 교육선교 활동에 대한 고찰은 베네딕도회의 또 다른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리라 사료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이 논문에서 희망하는 것은 핵심적 선교활동에 관해 아주 상세히 연구하셨지만, 이 시기의 또 다른 선교활동이었던 의료 및 출판활동에 대한 연구도 이후 이루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두 가지만 질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잘 몰라서 여쭤보려고요. 첫째는 베네딕도회 설립자 암라인 신부의 선교소명은 소명의식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시대사적인 요구와 선교지 국가로부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논문에서 말씀하셨는데, ‘시대사적 요구’란 결국 이 시대의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및 동양 진출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해석될 수도 있겠습니다. 반드시 베네딕도회가 아니라도 이 시기 제국주의와 그에 편승하는 선교활동에 대한 암라인 신부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있는지,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베네딕도회는 한국에서의 교육사업 이전에 아프리카 선교에서도 교육활동을 펼쳤었는지요? 또한 선교지민을 수도회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프리카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초기부터 고려되어서 1914년 숭공학교 출신 3명을 지원자로 받아들였다고 하였는데, 그런데 두 대륙을 다르게 인식하고 차별하였던 원인이 특별히 있었는지 그것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사회자 : 네. 고맙습니다. 장 교수님의 질의에 대해서 선 신부님께서 답변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선지훈 : 이 논문에서 부족하다고 지적하신 세 가지, 그리고 마지막에 의료 활동 및 출판 활동에 대하여 내용을 더 풍부하게 해야겠다는 高見 받아들입니다. 40년 동안의 활동의 특성들을 다 수렴하기 어려운 한계들이 있었습니다. 하여튼 저는 베네딕도회적인 특징과 또 이 회의 창립, 초기의 선교 정신, 이런 것들을 연관해서 한국교회, 특별히 일제시대 안에서 함경남·북도, 간도까지 포함하는 넓은 선교 지역 안에서 이들이 수도회를 중심으로 펼쳤던 선교 방법의 특징이 뭔가를 집중적으로 규명해 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특별히 해성학교에 대한 부분은 그 당시에 원산 대목구 안에서는 거의 모든 본당들에서 본당 학교 이름을 해성학교라고 동일하게 불렀습니다. 그런 특징들이 베네딕도회에서만 독특하게 이뤄진 것이 아닌 부분도 있고, 학교 안에서 이루어진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이 지적을 받아들입니다. 독일 말 표현으로는 이분들이 쓴 연대기를 보면 우리는 그냥 본당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본당으로 번역을 하는데, 이분들의 표현에 의하면 ‘미션스타지온’이라 부릅니다. 영어로 스테이션입니다. 지금 독일 말로서는 보통 본당을 ‘본당 신부님이 계신 곳’이라 하여 ‘파라이’라고 부르는데요. 보통 파라이하고 미션스타지온하고의 차이는 미션스타지온에는 몇 명이 수사들이 같이 사는 수도 생활과 병원도 있을 수 있고, 철공장도 있을 수 있고 하는 본당 안에서도 종합적인 본당 개념이었습니다. 특별히 아프리카에서는 그런 본당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서는 선교사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적어도 사제 2명 내지는 수사 1명,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선교 수녀님들과 같이 공동체를 이루면서 선교를 하려는 개념들이 있습니다. 지금 지적해 주신 그런 부분들을 보충해서 연구소에 제출할 논문들에는 좀 더 그런 내용들을 담아 논문을 정리하도록 하겠고요.

첫 번째 암라인 신부님과 제국주의에 편승하려는 활동이 있는가 하는 부분은, 특별히 암라인 신부님의 경우 특별히 제가 논문 초반 부분에 창립사를 좀 많이 다뤘습니다. 그 이유는 어떻게 생각해 보면 암라인 신부님이 정부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었거든요. 의도는 수도원을 세우고 중상적인 이상을 실현하려는 것이었지만, 정부에 대해서는 우린 지금도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거라고 표현을 하면서 설립을 하게 되고, 설립자의 설립 이후 20년 만에 새로운 베네딕도회 연합회가 탄생한거죠. 그 이후의 삶들은 굉장히 정상적인 베네딕도회의 삶에 충실했고, 선교적인 목표를 계속했고, 특별히 덕원수도원 같은 경우에는 초기 정신을 우리 연합회 전체에서 가장 잘 실현했던 곳이라 합니다. 연합회의 초기 정신이 가장 잘 실현된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이 한국에서 먼저 실현되고 다시 유럽으로 이어져서, 아프리카에 역으로 영향을 줬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기도 합니다. 제국주의적인 측면에서는 창립하자마자 아프리카로 가니까, 이분들이 교육도 부족하고 또 초기정신을 아프리카에서 잘못 실현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암라인 신부님은 특별히 편승하기 보다는 특별한 자기의 소명을 받은 수도생활에 집착하고 그것에 충실한 선교 생활을 하라는 주장을 하였지요. 오히려 아프리카에 나와 있는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의 관리들과 너무 친해져서 그런 어려운 점들이 많이 발생하고 수도원을 떠나게 된 선교사들도 있었습니다. 특별히 초기에는 독일의 유일한 선교회였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힘을 잘 좀 이용했다고 대답할 수 있겠고요.

두 번째 아프리카에서의 교육 활동이 있었는가. 당연히 학교는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로 미션스타지온이었기 때문에 큰 본당 2개가 나중에 교구로 발전하고 그리고 다시 이것을 분할해서 수도원 자치구로 만들어집니다. 탄자니아만 하더라도 지금 현재 11개 교구가 생겼습니다. 교육활동을 아프리카에서도 했는데, 당연히 아프리카에서도 신학교를 세워서 방인 성직자를 양성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까 발표할 때도 조금 언급하였지만 유럽 수도원을 아프리카에 옮겨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그대로 수도생활을 하면 그 이후의 비젼이 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점에서 제일 먼저 발전했던 2개의 수도원에서는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한국은 초기부터 그것이 실현되었습니다. 오틸리엔이 생기고 나서 두 번째 아빠스좌 수도원이 된 곳이 서울 수도원입니다. 진출하자마자 그해 12월에 원장좌 독립 수도원이 되고, 1913년에 아빠스좌 수도원이 되었지요. 그래서 수도원 제도를 먼저 실현하려고 하였던 거죠. 그런 초기 사상이 한국에서 제일 잘 나타난 것이고, 한국은 학교 제도를 통해서 숭공학교를 통해서 방인 수도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신학교를 통해서 방인 성직수도자들을 받아들였고. 어떻게 보면 굉장히 천천히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제법 빨리 정착하려고 노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자 : 네. 저도 베네딕도 수도회 모원 오틸리엔을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다녀왔습니다. 또 100주년 기념집을 보면서 신부이니까 뮈텔 주교님이 명동 성당을 지을 때,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을 때, 베네딕도 성인한테 기도하고 그렇게 해서 ‘성공적으로 성당을 지을 수 있으면 당신께 제단을 하나 봉헌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명동 성당 부지 문제가 잘 해결이 되어 성당을 봉헌하고, 그래서 성당 우측에 베네딕도 성인을 위한 제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뮈텔 주교님이 유럽에 가서 많은 수도회를 한국에 초청하는 데 계속 거부당하다가 오틸리엔 베네딕도회에서 허락을 하고, 그래서 1909년에 한국에 진출하게 된 것도 또 하나의 기적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싶은 점도 많았습니다. 장 교수님과 같이 사회 학문을 하시는 분들이 성직자들의 공부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들로 많은 지적을 해주셔서 성직자들의 논문이 보완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두만강을 중심으로 함경도 쪽하고 북간도 쪽하고 베네딕도회 수도회 멤버들이 와서 선교사로서 애를 썼고, 잠시 후에 듣게 되겠지만 압록강을 중심으로 남쪽 평안도하고 또 심양 지역에 메리놀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메리놀 선교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에 대해서도 우리들이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토론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세 번째 발제를 해주셨던 충남대 김수태 교수님의 발표에 대해서 동아대 손숙경 교수님께서 질의해 주시겠습니다.

손숙경 : 김수태 선생님이 발표하신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활동〉은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진출한 이후 1930년대 평양교구에서 추진한 선교활동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밝혀주신 글로 생각됩니다. 이를 통해 교회와 사회의 시대상과 관련하여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정책과 활동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한국 천주교의 실상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가 아직 부족한 점을 고려할 때, 선교회를 통해 한국 천주교회의 정책과 활동을 파악한 의미 있는 논문이라 생각됩니다. 특히 오늘 발표하신 이 글은 선생님께서 최근까지 아주 의욕적으로 계속 연구해 오신 작업을 총괄적으로 정리한 것이므로, 제가 여기에서 구체적인 논의보다는 조금 더 논의를 진행시키자는 차원에서 덧붙여 생각해야 할 부분에 관해 크게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평양교구 지역을 맡게 되는 이유가 이 지역이 개신교가 성행하던 곳이라서 개신교 선교사들과 국적이 같은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맡겼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함께 평양 지역이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 데 개방적이었으므로 새로운 선교회가 진출하여 전교를 하기에 적합하여 파리 외방전교회가 동의한 것도 고려해 보면 어떨까요. 말하자면 선교회가 한 지역에 진출하는 데 있어 그 지역 사회의 배경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좀 더 들어간다면 이후 진행시킬 부분들이 설명이 잘 될 것 같습니다.

둘째, 메리놀 외방전교회에서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평신도 쇄신운동을 벌였는데요, 이것뿐만 아니라 천주교회사사업, 문서선교사업 등도 벌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발표하시면서 제 토론문에 관하여 약간 언급을 하셨지만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이런 사업들이 선교 방침인지, 다른 지역에 가서도 이런 사업들을 벌인 것인지, 아니면 이 시기 한국 천주교회의 당면과제로 필요한 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이 시기 한국의 상황과 관련하여 천주교회에서 평신도 역할의 중요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메리놀 외방전교회에서 그 나라의 지역 상황에 맞추어 선교방침을 정한 것이라면 평양교구에서 이러한 운동이 아주 활발히 이루어졌다는데, 이러한 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으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특수성과 관련하여 한국 순교자들의 신심에 의미를 둔 것인지 아니면 이 선교회가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순교라든지 문서라든지, 방금 말씀드린 평신도 쇄신 운동이라든지 이런 것에 목적을 둔 것인지 조금 더 명확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네 번째,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활동이 이 시기 파리 외방전교회, 베네딕도 수도회 등 당시 한국에 진출한 수도회와 전교회들의 활동과 공통점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요. 이러한 점이 고려된다면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한국 선교활동이 가지는 의의가 좀 더 부각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섯 번째는 선생님께서 앞부분에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진출할 수 있게 되는 배경 설명으로 미국 천주교회와의 관련성을 말씀하셨는데요, 물론 여기에 대한 사료가 굉장히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만 이러한 부분을 언급하셨기 때문에, 미국 천주교회에서 이 시기 한국 천주교회에 대하여 얼마만큼의 인식이 있었는지 보충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선생님께서 계속해서 평양교구에 관해서 메리놀 외방전교회를 통하여 평양교구의 모습과 당시의 천주교회사를 복원하려는 작업을 계속 해오셨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앞으로 평양교구사를 이야기하는 데 굉장히 큰 지침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사회자 : 네. 손 교수님의 질의에 더해서 김수태 교수님 답변을 해주실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플로어에서 이런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일제시대에 천주교는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이것은 한국 천주교가 일본 천주교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더욱이 일본은 일본 · 독일 · 이탈리아 삼국 군사 동맹을 맺고 있어 바티칸에서 조상 숭배를 위한 행위는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일본 천주교회의 질의에 답변하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미 발제에서 조금 얘기가 된 걸로 저도 기억을 하는데, 조금 더 보완해서 설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수태 : 손숙경 선생님 질문을 거꾸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섯 번째 문제제기로 얘기를 했는데요.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 활동하면 일반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사실은 이것이 미국의 외교 정책하고 아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고 알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알려져 있는데도 ‘미국의 외교정책하고 천주교와 어떻게 관계되냐’는 연구는 현재로써는 거의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제가 서문에서 밝힌 샌즈(W.F. Sands) 같은 사람은, 번역된 책도 있기는 하지만, 아주 전문적인 직업적인 전문 외교관입니다. 그 책도 서문에 보면 외교가 어떤 기능을 하냐에 대하여 철두철미하게 방법론 같은 것도 써놓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외교정책하고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한국 진출에 대한 사후관계에 대해서 앞으로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을 해왔습니다. 한국에 대한 미국 외교정책들이 인물별로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지금은 크게 친한파, 반한파로 분류합니다. 앞서 말한 샌즈는 知韓派로서 아주 유명한 사람인데, 정부의 방침하고 일반 외교관하고 또 다른 사람하고 어떻게 다른 것인가 하는 부분도 관심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뮈텔 주교 일기》에 왜 그렇게 미국에 대한 부분이 나오지 않는가 하는 부분도 뮈텔 주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입니다.

네 번째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 활동이 다른 수도회의 선교 활동과 어떻게 같고 다르냐 하셨습니다. 저도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다른 전교회나 수도회하고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를 알고 싶어서였는데, 명확히 드러난 다른 점은 베네딕도회나 골롬반 같은 경우에는 교육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메리놀 외방전교회 같은 경우에는 서울에 들어와서 보니까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고등교육기관에 대하여 왜 관심을 안 가지느냐고 생각했습니다 . 또 우리나라 연구에서 파리외방전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고등교육기관을 만드는 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메리놀 외방전교에서는 학교 설립에 관심을 가지지만 《가톨릭 연구》와 《가톨릭 조선》을 보면 문서 선교가 우선이냐, 학교 설립이 우선이냐, 성당 건축이 우선이냐에 대해서 대대적인 논쟁을 벌이고 다양한 토의를 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이 천주교 신자라든지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읽을 것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읽을 것을 만들어 준데다 읽은 것 안에다가 무슨 얘기를 담을 것인가입니다. 아까 골롬반 얘기도 나왔지만 메리놀 외방전교회에서 한글 학교도 만들고, 선교사 들어올 때 한국 말 가르칠 자기 나름대로의 기관도 만들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문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모리스(J.E. Morris, 睦怡世) 몬시뇰을 쓰면서 그분의 선교를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 도보 선교에서 문서 선교. 도보 선교라는 것은 그분이 평양교구 지역을 샅샅이 걸어다니는데, 현지에 대한 실정 파악과 같은 부분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세 번째 메리놀 외방전교회에서 천주교회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이 선교 방침이냐 하셨습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 방침이라는 것이 무언가 있을텐데, 제가 오랫동안 개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도 한국에서 본 그분들의 활동이 너무 다양했기 때문에, 어떤 선교를 하였다고 정의할 수 있을까 생각 끝에 내린 저 나름대로의 정의는 그분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역시 현지 사정이 아니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현지에 와서 현지 사정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할 때, 패트릭 번(J.P. Byrne, 方溢恩) 주교님이라든지 모리슨 몬시뇰들이 보기에 미국에서 있을 때 봤던지 어쨌든 보니까, 한국 천주교회의 수용 과정이라든지 발전 과정이 남다르다는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본인들이 보기에 교회사 연구에서 당대사에 관심을 가졌으니까, 그 속에서 세계 교회사라든지 천주교회 연구를 통해야 사람들의 인식이 넓혀지니까 이렇게 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평신도 쇄신운동도 선교 방침인지 그 당시의 지역 상황에 맞추어 나온 것인지 질문하셨는데, 제가 모리스 몬시뇰에 대해 쓸 때, 평화방송에서 나온 모리스 몬시뇰 관련 비디오를 한 번 봤습니다. 봤는데, 거기에 담긴 내용 가운데 저것이 미국 문화에서 나온 것인가, 선교회에서 나온 것인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신부님들이 한국 평신도들을 대할 때 제일 감격한 것은 미국 신부님들은 한국 신자들을 대등하게 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부님들은 수직적인 관계에서 상당히 종속적으로 대하였는데, 이 신부님들은 사제지만 우리를 상당히 대등하게 대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계속해서 강조되어 나와요. 또 메리놀 신부님들을 만났던 신자들, 제가 부산에 가서 만났던 신자들 등등의 이야기에서도 그분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합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을 만났을 때 과연 그럴 것인가 아닌가, 저 개인적으로 보면 과거에는 그렇게 진보적이던 신부님들이 요새는 저렇게 보수적인가 하는 이중적인 생각도 합니다. 1920년대 상황에서 본인들이 볼 때, 평신도의 지위라든지 위치라는 것이 교회가 움직여 가기 위해서는 평신도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한데, 평신도의 역할을 무시하고 교회를 어떻게 움직여 갈 수 있겠는가 하였던 것 같습니다. 평양교구에 그러니까 김구정 같이 대구에서 3·1 운동을 벌이다가 신학교에서 쫓겨난 분도 평양교구로 들어오죠. 제가 지난번에 가톨릭 신문에서 조천수인가 하는 분도 발표하였는데, 조광 선생님도 그래요. 그 사람도 경상도 사람이라고. 다른 평신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평양교구로 이렇게 몰릴 때, 몰린 이유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니겠죠. 평신도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주고, 생각할 수 있는 틈을 줬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평신도에 대해서 좀 더 강조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첫 번째 평양교구로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진출할 때, 파리 외방전교회가 어쩔 수 없이 동의를 했겠죠. 어떻게 된 사안인지 모르겠지만 왔으니까 동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 지역 사회에 대해서 배경 설명이 필요할 것인가 하셨는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개신교 수용사에서는 평양이 자립적 중산층이 많은 곳이어서 들어갔다 했습니다. 그 당시 평양이라는 곳은 소돔의 도시라 언급할 정도로 문제가 많은 도시였습니다. 거기서 개신교 신자들이 들어가서 개화시키고 등등까지 삽니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글을 통해서 일제시대 평양지역의 상황 같은 것들을 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해봤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역부족이었어요. 그래서 더 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첨부하고 싶은 것은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활동의 제 글에서는 강조하지 않았지만 다른 선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어떤 천주교회의 수도회나 전교회의 진출 이런 것들을 가지고, 여전히 너무 선의론적이라든지 기적적이라든지 하는 접근은 천주교회사 연구에 바람직한 접근은 못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어느 지역에서든지 가톨릭은 보편 종교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하고 우리나라 사람하고 만날 때는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라든가 우리나라 문화하고 그 당시 어떤 시대인가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 만날 수 있는가를 고려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하고 면밀한 분석이 따라가야지, 그것을 하고 나서 그 다음에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했는지는 몰라도, 자꾸 그것이 전제되어서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논문 쓸 당시만 하더라도 윤선자 선생님이나 정 신부님이 신사참배에 관해 쓰신 게 있는데, 거기서 그렇게 상세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한글 자료집보다 영문 자료집에 신사참배에 대한 얘기가 더 많이 모여 있는데, 천주교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이라는 것은 개신교의 신사참배 거부운동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라고 그 논문에 제가 상세히 썼습니다. 민족의식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고, 천주교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앞으로 조금 더 자세하게 시간이 되면 그런 자료집을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보급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개신교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강했다 한다면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한국 역사 속에서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미신숭배를 거부하는 것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입니다. 또 아까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안중근을 그렇게 취급하는 가운데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를 계속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될 때는 미국의 용인하에서 그렇게 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한국에 들어와서 왜 그렇게 민족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던 것인가 싶습니다. 제가 아까 서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샌즈라는 외교관은 다른 외교관, 루즈벨트와 같은 외교관들과는 달리 왜 친한적이며, 한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졌는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인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앞으로 더 자세하게 살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답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회자 : 고맙습니다. 자료들을 보면 심양 지역의 교구장으로 있던 블루아(J.M. Blois) 주교님하고 서울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님이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에 발발해서 1918년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을 계속 국가에서 징집해 가서 사제들이 너무 모자라,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선교사들을 청하자 하여 블루아 주교님이 청한 남만주 지역에서는 1925년에 메리놀이 진출을 하게 되고, 또 평양 쪽으로는 1922~1923년 이때 메리놀 신부님들이 진출을 하는 것으로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1차 대전 끝무렵에 미국이 참전하면서, 1800년대 말부터 여러 지역을 식민지화하고 제국주의화해 갈 때, 미국이 뒤늦게 그 제국주의화에 참여했습니다. 아메리카리즘이라는 것을 1911년 메리놀의 창설과 연관지어 볼 때 미국의 정치적인 면에서도, 오늘 발표해 주신 김수태 교수님께서도 샌즈 얘기도 해주셨지만, 이와 깊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이 점을 연구해서 발표해 주시면 저도 참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국이 아주 공격적으로 메리노러들을 도와주면서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었던 자료들을 저도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머나먼 동쪽을 찾아온 선교사들〉을 주제로 발표해 주셨던 옥현진 신부님의 발제에 대해서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의 김주영 신부님께서 질문을 해주시겠습니까.

김주영 : 찬미예수님! 감자가 많이 나는 강원도에서 온 신부입니다. 광주하고 춘천이 골롬반하고 상관이 있기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있게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오늘 수녀님들이 많이 계신데, 오늘 복음 말씀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천사들 앞에서 너희를 안다고 증언한다”고, 이 말씀을 오늘 아침에 읽으면서 머나먼 땅에 와서 그분을 안다고 삶으로 살아가신 여러 선교회 · 수도회에 대해서 그동안 덜 알아보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한국에서도 많이 외국에 나가서 선교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가 뒷 날을 더듬어 보는 것이 나가서 더 잘하기 위해서 그런 어떤 씨앗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옥현진 신부님 제 학교 선배입니다(모두 웃음). 그렇다고 절대로 짜고 하지 않았습니다(모두 웃음). 10여 년 동안의 기간을 정리하시면서, 골롬반 선교회가 초창기 광주에 와서 일제강점기 때 했던 교회 선교 활동, 그리고 그러한 교회의 어려움에 대해 잘 설명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골롬반 선교회 하면 제가 자란 곳이 바로 주교관 옆에 있는 춘천의 효자동 성당입니다. 항상 신부님들 어렸을 때부터 뵙고 오설리반 신부님이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가난하게 살려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찾아간 곳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했다”는 얘기가 정말 공감이 갑니다. 그분들, 자그마한 본당에서 아끼기 위하여 난방을 하지 않아 병이 들고, 병이 든 채로 끝까지 선교 활동을 하셨던 모습. 또 항상 소임을 옮기시든, 여행을 하시든 효자동에 주교관이 있으니 잘 지나다니시는데, 가방 1~2개 가지고 옮기시는 모습을 보면서, 교우들뿐만 아니라 우리 교구 사제들에게도 많은 모범적인 생활을 보여주셨던 그런 선교사들이 아니었는가 생각해 봅니다. 옥현진 신부님께서 골롬반 교회 창설 · 영성, 그리고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됐는지, 또 선교사들이 활동한 지역의 선교 환경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잘 발표하여 주셨다고 생각하면서, 발표문 읽으면서 나름대로 생긴 의문점을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다른 토론자들께서 해주셨지만, 먼저 박해시대 때를 거친 파리 외방전교회와 달리 골롬반 선교회는 박해가 지난, 물론 일제강점기이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선교 방식에 약간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차이점에 대하여 신부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제가 춘천교구 신부이다 보니까, 신부님께서 작성하신 발표문에서 몇 가지 바로 잡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한국가톨릭 어제와 오늘》이라는 책 296쪽을 인용하시면서 “1940년에는 서울교구로부터 춘천교구가 떨어져 나와 아일랜드 골롬반 선교회로 하여금 맡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 8일 골롬반 선교회의 퀸란(Thomas Quinlan) 구인란 신부가 초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라고 인용을 하셨는데, 맞지 않습니다. 저희 교구는 1939년 4월 25일에 초대 교구장으로는 구 신부님이 아니라, 당시 광주 지목구장으로 계시던 맥폴린(Owen Macpolin) 신부님이 맡으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알아보니까, 교구가 작아서 저의 교구에 대해서도 아직 책을 내지 못하고 그래서 그런 것 같습니다. 신부님 발표문의 다른 곳에서는 1939년으로 바로 잡고 계십니다. 이것들은 책들이 다르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초대 교구장으로 퀸란 주교님이라고 얘기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고 맥폴린 신부님이 초대 지목구장을 하신 것이 맞기 때문에, 이곳에서 정정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에드워드 피셔(Edward Fischer)의 책 Light in The Far East를 보면 42년 동안 현(Henry Harold) 주교님께서 한국에서 생활하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고, 그 현상이 어떤지 많은 얘기를 해주시고 계십니다. 도움이 참 많이 되지만 그분의 일기라고나 할까요, 기억으로 쓰신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고 저도 읽으면서 많이 도움이 되었는데, 거기 보면 전쟁 때 신부님들이 춘천에 새로 설립된 북동 주교관에 억류되었다고 나오는데, 그때 저희는 주교관이 없었습니다. 아마 오역인 것 같고, 주교관에 억류된 사람들의 이름이 다 틀려요. 그게 항상 문제인데, 우리가 뮈텔 주교님을 민 주교님이라고 불렀다가 뮈텔 주교님이라고 불렀다가, 또 골롬반 신부님의 경우 성을 따라서 도 신부님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러한 여러 이유 때문에 이름들이 자꾸 틀리고 하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아까 신부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10명이 왔는데, 9명의 이름만 있고 1명의 이름이 빠진 착오도 이런 데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그 다음에 제가 항상 의아해 했던 것인데 서강대에서 한국사를 가르치셨던 최선혜 선생님께서 2003년 4월 21자 《부산교회사보》 38호를 통해 발표하신 〈한국 근대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활동 -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관련 서한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라고 글을 쓰신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선교 · 교육 · 의료 · 재정 · 인사 · 사회 · 문화 · 정치에 대해서 문서들을 요약하여 분류하신 것이 있는데, ‘기존 신부들의 건강이 위협되고 있다’는 내용과 ‘교구 실정을 잘 아는 그리고 한국에서 선교 경험이 있고 언어도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서한을 쓰는데, 제가 궁금한 것은 베네딕도회를 보면 오자마자 방인 사제와 선교사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데, 그 당시 왜 골롬반 신부님들께서는 방인 사제 양성이나 그런 쪽에 신경을 쓰지 않으셨을까라는 생각에, 혹시 다른 문서 보시면서 있었는데 잘 안 되었다라든지 하는 것이 있다면 여기서 함께 나누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광주하고 춘천교구가 같이, 골롬반 선교회와 함께 우리가 지나온 날들을 연구하다 보면, 선교회에 대하여 연구하여야 하는데,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는지 신부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상입니다.

사회자 : 대답해 주시지요.

옥현진 :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드리겠습니다. 올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광주 신학교 부제의 강론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새남터에 가보면 그곳에서 순교한 성직자들의 초상을 담은 큰 걸게 그림이 성당 외벽에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 그림 밑 부분에 쓰인 기록들을 보면 성 유스티노 브르트니에르 신부 1864년 26세에 사제서품, 1865년 27세 때 조선입국, 1866년 3월 7일 28세를 일기로 새남터에서 순교. 성 헨리코 도리 신부, 1864년 25세에 사제서품, 1865년 26세 조선입국 1866년 3월 7일 27세를 일기로 새남터에서 순교, 성 루이 볼리외 신부, 1864년 24세에 사제서품 1865년 25세 때 조선입국, 1866년 3월 7일 26세의 일기로 새남터에서 순교. 사실 이렇게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서품을 받고 곧바로 낯선 이국땅으로 오셔서 채 1년도 되지 않은 사목 생활을 하다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신부님들의 초상 앞에 서니 실로 가슴이 저리고 커다란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다며 강론을 통하여 전하였습니다.

선교를 위해 먼 길을 떠나와서 청운의 꿈을 다 펼치기 전에 순교하신 그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초연한 마음과 우리들 역시 깊은 사명감을 느끼게 합니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이러한 아픔을 겪었기에 일제 강점기 때는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선교 방법을 선택합니다. 또한 정교분리 정책을 고수하면서도 때론 협력적으로 때론 거리를 두며 탄력적인 자세로 식민지 통치자들의 협조를 얻어 전교에 힘씁니다. 샘물교회의 선교 방식에 대한 비판처럼 순교를 각오하고 먼 길을 찾아온 선교사들의 삶은 오늘날 새로운 해석 속에 논란이 되고 있기에 이 자리에서 다 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목숨을 내놓고 선교하신 선교사들의 피와 땀방울들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든 토대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식민지를 지배하고 있었던 프랑스 출신의 선교사들은 당시 조선의 식민지 상황을 인식하고 통치자와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반면 정치적인 노선에 있어서 아일랜드 출신이 다수였던 골롬반 선교회는 정부의 반대를 최대한 피하면서도 실리를 얻을 수 있는 선교 방식을 채택합니다. 본문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식민지 상황에 대한 동료적 이해와 연대의식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김주영 신부님께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광주교구 중심으로 조사하다 보니 춘천교구의 상황을 제대로 점검하지 못했습니다. 신부님의 지적을 받고 다시 기록들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신부님의 지적이 옳습니다. 1939년 4월 25일 경성대목구에서 춘천지목구로 분리되어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되었습니다. 이미 1937년 4월 13일 대구대목구에서 분리되어 설정된 광주 지목구장이었던 임 맥폴린 신부가 겸임을 하게 됩니다. 임지에 가서 직접 사목 활동을 하지 못하고 얼마 후 춘천에 와 있던 퀸란 신부를 대리로 임명하였고, 퀸란 신부는 1940년 12월 8일 제2대 춘천 지목구장으로 임명됩니다. 퀸란 신부가 지목구장이 됨으로써 춘천지목구는 비로소 실질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도 골롬반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오기와 오역를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아직 여러 자료를 비교 검토하진 못했습니다. 북동 주교관이라는 번역은 북동쪽에 새로 설립된 춘천교구의 집을 가리킵니다. 에드워드 피셔의 책 Light in The Far East 65쪽을 보면 아실 수 있습니다.

또한 《다블뤼 주교 비망록》이나 《리델 문서》, 《뮈텔 주교 일기》, 《드망즈 주교 일기》 등의 기록을 통하여 순교사화나 일제 강점기 때의 교회의 삶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아마도 프랑스인들의 철저한 기록문화이기도 하고 순교사화를 작성하고자 한 노력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종교적인 박해 상황이 끝난 시기에 들어온 골롬반 선교회 신부님들은 의아스럽게도 기록들을 많이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이번 발제문을 준비하면서도 기초사료 조사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정치적 상황이 일제 강점기였기에 선교를 하는 데 정치적인 간섭을 많이 받게 됩니다. 심지어 성당이나 공소 부지를 선교사 명의나 교구 명의로 매입하는 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소회장이나 열심한 신자 명의로 토지를 매입하고 나중에 해방을 맞이하여 교구 재산으로 재등록하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또한 간첩행위를 하는 것으로 의심받던 시기에는 더더욱 자료들을 보관하기 어려워 폐기하는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시기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기록을 많이 남겼던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님들과 그보다는 평화로운 시기의 골롬반 선교사들의 기록의 결핍은 두 선교회 사이의 차이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미국인 중심으로 되어 있는 평양교구의 메리놀 사제들은 신사참배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앞에서 차이점에 대해 언급하였듯이 방인 사제 양성에 주력하였던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에 비해서 골롬반 사제들의 한국 방인 사제 양성에 있어 다분히 엄격하였다는 결과들을 보게 됩니다. 광주 신학교가 설립되고 그 양상은 달라지지만 당시 골롬반 사제 밑에서 신학생 생활을 하셨던 원로 사제들의 말씀에 의하면 다소 개별차는 있었지만 골롬반 출신 본당 신부님들의 엄격한 생활 요구로 인해 그 고충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Light in the Far East에 언급된 선교지에 대한 선교, 생활, 문화, 의료, 교육, 정치 등에 대한 짧은 글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기록 정리되지 못했고 약간의 번역을 통해 정리해 가고 있습니다.

이번 주제를 통해 더 많은 자료 번역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아직 다 살피지 못한 내용들에 대한 공동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작은 시작을 하였고 가능하다면 춘천교구의 골롬반 사제들의 활동과 광주교구의 활동을 비교하며 서로 보완하는 작업들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을 꼼꼼히 읽어주시고 질문해 주신 김주영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사회자 : 네 고맙습니다. 이상으로 한국교회사연구소 주최 “한말 · 일제 시대 선교회의 한국 진출과 천주교”라는 주제하에 한말 일제시기에 한국에 진출한 각 수도회와 한국 천주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박해시대에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진출하여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 선교 활동을 하였고,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에도 일제시대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여러 선교회가 진출하여 한국에서 전교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천주교회는 거듭된 성장을 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으셨던 것은 물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의 선교회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오늘의 시간이 그 연구의 초석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들을 발굴하여, 선교회의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바라면서 시간상 오늘의 토론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발표와 토론에 참여하여 주신 신부님들과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긴 시간 함께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교회사 연구 제29집, 2007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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