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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대구의 동정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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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5-21 ㅣ No.517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대구의 동정녀들


한국사회에서 독신이라고 하면 종교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라고 하면 수긍하는 편이다. 가톨릭 신자 사이에는 독신생활이 그리 낯설지 않다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결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왔다. 조선왕조시대에는 가뭄이 들면 혼기를 놓친 사람들을 찾아서 결혼을 시켜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일정한 나이를 넘긴 사람은 관에서 주도하여 결혼시켰다. 심지어는 오늘날까지도 영혼 결혼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사회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천주교는 들어오면서 바로 동정생활을 실천했고, 동정녀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결혼하지 않는 일이 극도로 억압되었던 사회풍습 때문에 신자들은 스스로 기혼자처럼 머리를 얹고 동정생활을 했다. 그들은 초기교회에서 순교자의 후손이었고, 교회 일을 돌봤으며, 순교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고 수녀원이 세워지자 그들 중 일부는 수녀원에 들어갔다. 동정녀들 집안에서는 수도자나 성직자가 배출되었다.

우리 대구 지역에도 일찍부터 동정을 동경한 사람들이 있었다. 1816년에 순교한 이시임 안나는 동정녀들이 사는 곳을 찾아가다 변을 당했다. 그래도 그는 교우촌으로 가서 신자들과 살다가 결국 관덕당 형장에서 순교했다. 대구에 본당이 자리잡게 될 무렵에는 이미 동정녀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의 중심인물은 서 마리아였다. 서 마리아는 서상돈의 작은 아버지인 서태순 베드로와 김 데레사의 딸이다. 서태순은 대구에서 1860년 전후로 일어난 경신박해로 옥에 갇혔다. 이때 부인 김 데레사도 함께 갇혔는데, 해산달이 가까워 풀려났다. 부인은 친정이 있는 풍기로 가는 길에 딸 마리아를 낳았다. 경신박해가 가라 앉으면서 서태순도 풀려났다. 서태순 가정은 1866년 병인년 다시 박해가 시작되자 문경 한실로 피난갔다가 문경 포졸들에게 잡혔다. 그는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옥에 갇혔고, 그해 12월경에 순교했다. 서태순이 순교하자 부인은 일곱 살 된 마리아를 데리고 서상돈이 살고 있는 대구로 왔다. 이 어린이는 자라서 동정녀로 살았다. 그는 1886년 영남지방의 첫 본당이며 대구본당의 전신인 신나무골에 로베르 신부가 부임했을 때부터 교회 일에 봉사했다. 서 마리아는 권아기(權兒女), 서희, 김선이 등을 데리고 있었으며 신앙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박금성 도로테아를 받아 들였다.

동정녀들은 드망즈 주교가 펴낸 『대구대목구 사목지침서』(1912년)에도 그 존재가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실체를 찾을 수 있는 기록은 계산성당의 성모회 조직에서이다. 동정녀들은 성모회 조직의 기반이 되었다. 계산성당 성모회는 1921년 300명의 회원으로 창립되었는데 자선부, 전교부 두 개의 활동부서가 있었다. 전교부는 일반 부인, 자선부는 동정녀 그룹이었다. 이 두 부서를 아우르는 회장단이 있었으나 두 조직은 독자적으로 운영된 것 같다. 서 마리아는 1917년 58세로 선종했기 때문에 박금성은 동정녀 그룹이 성모회 자선부로 옮겨가는데 다리 역할을 하게 됐다. 박금성은 성모회 창립 이래 30여 년 동안 자선부의 책임자로서 활동했다. 그는 완고한 유교가정의 딸로 혼자 은밀히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어느날 부친에게 발각되었다. 부친은 집안을 망칠 계집애를 죽여 버리라면서 하인들에게 우물에 넣으라고 명했다. 하인들은 지엄한 상전의 명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어 아가씨를 샘에 빠뜨렸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잠든 틈을 타 딸을 건져 도망치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서 마리아와 살게 되었다. 박금성은 신체도 남성처럼 장대하고 성격도 억센 면이 있어 여장부라는 별명을 가졌다. 박금성은 1952년 75세로 선종했다.

한편 동정녀의 활동은 자선부의 사업을 통해 알 수가 있는데, 자선부원은 그 결속과 질서가 엄격했다. 자선부의 입회금은 10원 이상으로, 당시로는 고액의 이 입회비는 일종의 복지보험료와 같은 역할을 했다. 자선부원들은 동료들끼리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비록 가세가 넉넉하고 부모형제가 잘 산다고 해도 독립해서 살아야 했다. 따라서 그들 상호간의 상부상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들 중 누가 세상을 떠나면 공동체로서 연도와 위령미사를 봉헌했고 상복을 입어 자매로서의 정의를 표했다. 입회비는 여기에 드는 비용으로 적립되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동정녀들은 교회로부터 허락을 받았고, 주문모 신부는 동정을 원하는 이순이 누갈다와 유중철 요한을 그 시대 상황을 감안하여 부부처럼 위장해서 살아가도록 배려해 주었다. 최양업 신부 때에는 주교가 조선사회에서는 동정으로 살기가 위험하다며 발바라라는 여성에게 동정생활을 허락하지 않았던 예도 있었다.

또한 동정녀들은 서약을 하고 머리를 올리는 예식도 있었는데, 머리는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얹어 주었다 한다. 이를 보면 공동체 안에 리더가 있었던 듯하다. 동정녀들은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쪽을 졌는데 해방 이후에는 비녀 없이 틀은 ‘양머리’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계산성당 부근에 집을 얻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산 것 같다. 동산 언덕 올라가는 계단, 일명 선교사의 길 왼쪽, 또 최근 현대백화점 주차장으로 편입된 곳 등에 동정녀들의 집이 있었다. 이 집들은 그들의 주거인 동시에 여러 행사의 집합장소가 되기도 했다. 동정녀들의 모임인 성모회 자선부는 자선사업과 전교활동을 했는데, 특히 전교활동으로 예비신자 지도와 병자위문, 임종자 대세 수여 등의 활동을 했다. 동정녀 제(諸) 데레사는 300여 명에게 대세를 주는 전교 실적을 올렸는데, 제 데레사는 김현옥 바오로(1821~1896) 회장의 수양딸이었다.

해방 이후 동정녀들은 성물이나 옷감 등을 들고 지방에 나가 그것을 팔아 생활하면서 교리를 가르치고, 전례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또 동정녀들은 미사 때 기도를 맡기도 했다. 당시 전례, 독서, 기도 등은 특별히 허락된 사람에게만 부여되었던 사도직의 일부였다. 그들은 교회 내 갑자기 닥친 크고 작은 일들도 도왔다. 지방에서 대첨례를 지내러 올라 온 사람들이 행사가 끝나고 통행금지에 걸리거나 차편이 끊겼을 때 이들을 재워 주기도 했다.

교구에서는 6·25전쟁 때 신자들이 성모당에 모여 ‘평화신공’을 바치던 자발적 기도모임이 있었다. 이때 홍정옥 마리아(1892~1979) 등 동정녀들이 크게 기여했고, 교회 구성원들도 그들을 존경하며 따르고 돌보았다. 태진당 한의원 등에서는 동정녀들에게 무료로 진료를 해 주었다고 한다.

동정녀 그룹은 5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흩어진 듯하다. 이 과정을 1949년부터 성모회 3대 회장을 맡았던 홍정옥 동정녀의 생을 통해 볼 수 있다. 홍정옥은 젊은 시절 서울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에 입회했다가 위장병을 얻어 치료차 대구로 귀가하였다. 병이 낫지 않아 수녀원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으나 그는 처음 발한 허원대로 동정녀로 살았다. 그런데 홍정옥은 1954년부터 동생네 가족이 흩어지게 되자 조카 홍명연 데레사(현 92세)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때쯤에는 차 루시아, 서 말다 동정녀 등도 부근에 집을 얻어 살았다고 하니, 이 무렵부터 공동생활이 해체된 것 같다. 그럼에도 홍정옥은 평생 남의 장례를 돕는 등 궂은 일을 했고, 호열자가 돌 때 대세를 주러 다니다가 순경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꾸준히 흰 광목으로 한복을 만들어서 시장에 팔았다. 그리하여 그는 재물도 모아 덕산파출소 뒤와 남산 2동 문우관 근처 등에 작은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홍정옥은 1979년 감기로 약 2주일 누웠다가 87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대녀가 130여 명인 홍정옥의 장례에는 대녀들이 상복을 입고 오는 등, 엄청난 사람이 몰렸다. 그의 상여가 현재의 범물동 묘지로 가는데 묘지까지 가는 조문객들이 너무 많아 버스 6대로도 모자랐다고 한다. 그를 모시던 홍명연의 아들이 신부가 되고, 홍명연의 동생은 수녀가 된 일도 우연은 아닐지 모른다.

위에 말한 서 마리아, 박금성, 홍정옥 외에도 서 도로테아 동정녀(서정덕 주교의 고모할머니) 등 10여 명의 동정녀 이름이 문헌에 나타나며, 또 다른 동정녀 10여 명이 구전으로 남아 있다. 대구에서 성모회가 동정녀 회원들로 자선부를 편성할 무렵, 대구 지방은 30여 명의 동정녀가 있었으며, 동정녀가 많기로 전국에서 첫째라고 한다. 그러나 동정녀들은 1960년대 이후 평신도사도직 단체가 많이 생겨나고 수녀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더 이상 활기를 띠지 못하게 된 것 같다.

동정과 모성을 함께 지닌 여성이 가장 완벽하다고 한다. 이는 성모 마리아만이 지닌 속성이다. 그러나 여성은 언제나 동정과 모성을 함께 지닌 성모 마리아를 닮고 싶어했다. 또한 이들은 함께 모여 그 힘든 과정을 헤쳐 나가고 싶어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둘만 모여도 나는 함께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둘이라면 개인적인 이기(利己)를 고집할 수가 없다. 즉 예수님은 공동의 선, 공동의 목표를 원하신 것이다. 동정녀는 이러한 말씀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 독신이 늘어나는데, 독신생활을 사회는 물론 자신도 임시적 상태처럼 생각하고 평생을 보내지는 않는지? 신앙을 가진 독신자가 굳센 목표를 가지고 살 수 있도록 교회와 사회는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동정녀들의 삶을 찾아내 그 의미를 음미하는 일은 또 다른 가치가 있다. 우리 교회사의 한 축인 그들의 믿음과 삶을 밝혀주는 증언이나 자료가 기다려진다.(도움 : 『빛』(1984.4), 홍명연 가족, 관덕정 발바라회)

*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2년 5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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