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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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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6: 가난한 백성 돌보는 예수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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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2-13 ㅣ No.2058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6) 가난한 백성 돌보는 예수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평등정신 바탕으로 애덕 구현에 힘써

 

 

- 최양업 신부가 교우촌 신자들과 미사 봉헌하는 모습. 양업교회사연구소 제공.

 

 

신앙 지키다 비극 당하는 여성 신자들에 대한 비통함

 

유교 문화권인 조선에서, 여성들은 혼자서 집 밖에 나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낯선 남자를 만나기만 해도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최양업이 사목할 당시 여성 신자들은 사제에게 성사를 받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동해야 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여성 신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비통함을 느꼈을 최양업. 그래서인지 일곱 번째 서한에는 신앙을 지키고자 한 여성 신자들의 이야기가 줄곧 등장한다.

 

“어떤 양반집의 처녀는 천주교를 봉행할 마음이 간절하나 자기 아버지 집에서는 종교를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집에서 도망쳐 나와 교우들을 찾으러 가던 도중, 길에서 어떤 외교인 남자에게 납치를 당해 억지로 그의 아내가 됐습니다.”

 

“양반 출신 안나라는 여교우는 19년 동안 철저한 외교인 집안에 갇혀 지내면서 신자들과 연락을 하지 못했고 따라서 성사를 받지 못한 채로 지냈습니다… 안나는 외로움을 달래느라고 가끔 유럽에서 생산된 자그마한 천 조각을 집어 들고 들여다보면서 유럽과 선교사 신부님들을 생각하곤 했답니다.”

 

- 한국교회 초기, 사목방문하는 사제를 기다리는 신자들. 출처「전동100년」 화보집.

 

 

“과부들은 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항상 밤에 성사를 받으러 옵니다. 이렇게 여자들이 밤길을 다니는 모험 중에 얼마나 많은 비극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바르바라라는 여교우와의 만남도 최양업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일곱 살에 하느님을 알게 된 양반집 막내딸 바르바라는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결혼을 권하는 가족들을 피해 산속에 숨어들길 여러 차례. 산꼭대기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힘든 일을 마다않던 그는 결국 병을 얻게 됐고 열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항상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바르바라는 죽음을 앞둔 순간 “지금 이 시각에도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특별히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대해 아직도 충분히 감사드리지 못하는 것 외에는 다른 고통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최양업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저는 여러 해 동안, 바르바라의 죽음에서 느낀 것만큼 회한과 가책과 하느님 사랑의 감정을 충격적으로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라고 전한다.

 

 

조선사회의 부조리 목격한 최양업, 그리스도의 평등정신 새기다

 

조선 후기 농민 중 일부 상층은 중소 지주층이었고, 대다수는 소규모 자영농이나 소작농이었다. 정약용의 저술을 정리한 「여유당전서」에 따르면 전라도 지방의 땅 100호 중에서 지주가 5호, 자작농이 25호, 농지를 빌려 쓰는 소작농이 70호에 달했다. 대토지 소유자는 점점 더 많은 땅을 가졌고, 가난한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유랑하는 경우가 많았다. 피지배층이 대부분이었던 신자들 역시 비참하고 궁핍한 삶을 이어갔다. 귀국 직후 조선 5개 도를 쉬지 않고 다녔던 최양업은 힘들게 살아가는 신자들과 수없이 만났고, 그들의 궁핍한 처지는 최양업에게도 큰 아픔이었다.

 

- 19세기 한 식복사의 가족 모습.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백성은 각종 세금과 수탈과 착취에 짓밟혀 극도의 불행에 빠져있습니다. 조정 관원들이나 포졸들이나 양반들이나 모두 하나같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가렴주구에만 눈이 먼 약탈자들입니다. 가난한 백성은 1년 내내 고달프게 일하지만 겨우 온갖 종류의 세금을 내는 것이 고작입니다.”

 

가난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생활뿐 아니라 신분상의 갈등과 계급주의는 최양업의 사회관에 영향을 미쳤다. 비판적으로 조선사회를 바라봤던 최양업은 그리스도의 평등정신을 바탕으로 애덕을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졌다.

 

귀국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최양업이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갔다. 실성하거나 간질에 걸리는 등 병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위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비위생적인 물을 개량할 처방을 요청하는가 하면 불쌍한 신자들에게 위로가 될 성물을 보내줄 것을 청하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22년 2월 13일, 민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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