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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본 신자 발견 150주년 (중) 일본 천주교회사 속 박해와 잠복 키리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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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2 ㅣ No.1448

[일본 신자 발견 150주년] (중) 일본 천주교회사 속 ‘박해와 잠복 키리시탄’


불교 신자 행세하고 후미에(성화 밟고 지나가기)의 고통마저 감내한 믿음



1865년 3월 17일 사라진 줄 알았던 일본 신자들이 오우라 천주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국적 박해로 모습을 감춘 지 250여 년만이었다. 그렇다면 ‘잠복 키리시탄’들은 왜 그 긴 시간 동안 숨어 지내야 했을까. 일본 천주교회사를 살펴보며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복음의 씨앗 심어지다

일본의 복음화는 예수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와 일본 무역상인 야지로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1547년, 야지로는 항해 중 실수로 사람을 죽여 말레이시아에 와 있었는데 그곳에서 선교중이던 하비에르 신부를 만나게 됐다. 하비에르 신부는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야지로를 따라 1549년 일본에 들어와 일본 나가사키현 서쪽 작은 섬인 ‘히라도’에서 복음의 첫 씨앗을 뿌렸다.


짧았던 전성기, 그리고 금교령

항구가 발달했던 히라도는 그 시절 유럽 문물이 오가던 국제 도시였다. 외국인과 그들의 문화에 익숙했던 탓에 하비에르 신부가 다녀간 후에도 히라도에선 20여 년간 꾸준히 선교 활동이 이뤄졌다.

히라도와 인접한 나가사키도 마찬가지였다. 대대적 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주민 5만여 명이 신자였고, 예수회ㆍ프란치스코회ㆍ도미니코회ㆍ아우구스티노회 등이 진출해 신심회를 조직하고 활발히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나가사키는 ‘작은 로마’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3년 12월 지방 영주를 견제하고 가톨릭 교세 확장을 막기 위해 전국에 ‘파테렌 추방령’을 내렸다. 파테렌은 사제를 뜻하는 라틴말 ‘Pater’(파테르)의 일본말 표현이다. 추방문에는 “일본은 신국이며 불국이고 유교의 나라이다. 키리시탄 종문은 일본의 국법과 신도, 정교를 해치는 사교(邪敎)이다. 속히 일본으로부터 추방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전부터 지역에 따라 크고 작은 박해는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금교령이 내려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본격적 박해가 시작된 것이었다.
 

박해 속에서 사라진 신자들

1614년 일본 전역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선교사와 키리시탄 지도자들이 국외로 추방됐다. 하지만 명령을 따르지 않고 숨거나 해외에 있다가 잠입해 들어오는 선교사들도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 막부는 키리시탄들을 엄하게 감시하고 배교하지 않는 자는 잔인하게 처형했다. 많은 키리시탄들이 참수되거나 화형당하고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어떤 이들은 끓는 온천물에 내던져졌다. 바로 지금까지 펄펄 끓는 나가사키현 남동부 시마바라시의 운젠 지역의 유황 온천이다. 오늘날 이곳을 ‘운젠 지옥 순교지’라 부르고 있다. 1627년부터 5년 동안 수많은 키리시탄들이 산채로 끓는 온천 속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의 증인이 됐다.

1644년 만쇼 시크니 신부가 오사카에서 참수당하면서 일본 내 사제는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됐다. 목자를 잃은 일본 내 신자들은 혹독한 박해 속에서 자취를 감춰갔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불교 신자 행세를 하며 몰래 신앙을 지켰다. 이들이 바로 ‘잠복 키리시탄’. 250여 년이 흐른 후, 잠복 키리시탄은 1865년 오우라 천주당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일본 교회가 살아 있었음을 드러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us Xaverius, 1506~1552)

스페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하비에르 신부는 1534년 성 이냐시오 로욜라를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창립했다. 1541년 그는 포르투갈 국왕의 요청을 받고 동인도 수도 고아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다. 이후 그는 말레이시아 섬을 방문했다가 일본 무역 상인 야지로를 만나는데 이것이 일본 선교 활동의 계기가 된다.

1549~1551년 11월 일본 전역을 누비며 주님의 말씀을 전하던 하비에르 신부는 인도로 다시 되돌아갔다. 돌아가서도 동양 선교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던 하비에르 신부는 동양 문화를 주도하는 중국을 포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식, 광둥 부근 상천도에 도착해 중국 입국을 준비했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52년 12월 3일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비에르 신부가 그토록 열망했던 ‘아시아 선교’는 마태오 리치 신부가 1601년 북경에 도착하면서 명맥을 이었다.

 
잠복 키리시탄들은 늘 의심을 피해야 했다. 마리아상을 대나무에 숨겨 보관한 잠복 키리시탄 유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는 나가사키의 작은 섬 히라도에서 첫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히라도 하비에르 기념 성당 전경.


잠복 키리시탄들은 어떻게 숨어 지냈을까?

전례와 교리를 전해주는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 잠복 키리시탄들은 어떻게 신앙을 250여 년 동안 지켜온 걸까. 잠복 키리시탄들은 불교 신자 행세를 하며 가정에서 몰래 신앙을 익혔다. 그래서 잠복 키리시탄 가정에는 성모상 대신 ‘관음 마리아상’이 있었다. 의심을 피하고자 성모상을 불상처럼 만든 것이다. 성모 신심만 키운 것은 아니다. 정확도 높은 전례력을 만들어 주일과 성탄ㆍ부활 대축일 등도 세심히 챙겼다.

잠복 키리시탄들은 성모상 대신 ‘관음 마리아상’을 만들어 불교 신자 행세하며 의심을 피했다.


여럿이 모이면 의심을 사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주로 가정 단위로 이어졌다. 사제가 없었기 때문에 가장이나 장남이 ‘초오카타’(공동체 회장)로서 가족에게 세례를 주고 전례 예식을 주례하는 등 사제 역할을 했다.

교리는 대부분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기록은 박해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도 소리도 최대한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입안에서 웅얼거리듯 해야 했다. 주변 사람들이 천주교 기도문을 듣고 고발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런 잠복 생활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끊임없이 의심하며 색출 작업을 벌였다. 그 방법 중 하나가 ‘후미에’. 이것은 그리스도와 마리아 등 성화상을 밟고 지나가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매년 시행됐다.

잠복 키리시탄들은 신자임을 들키지 않으려 후미에에 참여했다. 후미에를 하는 날이면 발을 깨끗이 씻고 되도록 성상을 살짝 밟았다. 후미에를 끝낸 후에는 ‘완전통회 기도’를 바치며 자신의 발을 씻은 물을 보속으로 마셨다.

계속된 막부의 감시를 피하려고 잠복 키리시탄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신앙을 지켰다. 하지만 사제가 없었던 탓에 250여 년이 흐르면서 잠복 키리시탄의 신앙생활 방식은 교회의 본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 지금까지도 가톨릭 교회로 돌아오지 못하고 잠복 키리시탄 신앙생활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이들도 있다.

[평화신문, 2015년 3월 22일, 일본 나
가사키=백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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