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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서석봉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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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486

대구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9) 서석봉 안드레아(?-1816)

 

 

“사랑은 신속하고 참다우며, 또 경건하고 쾌활하며, 온화하고 용감하며, 인내성이 있고 성실하고 지혜로우며, 너그럽고 사내다우며 자기를 찾지 아니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찾게 되면 그는 벌써 사랑에서 멀리 떨어지는 자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두루 살피고, 겸손하고 정직하며, 또 유익함이 없고, 경솔함이 없고, 헛된 일에 관심하는 바 없고, 담박하고 정결하며 한번 세운 뜻을 바꾸지 않고, 고요하고, 모든 오관을 다 지킨다. 사랑은 어른에게 순명하며 지배를 잘 받고, 자기를 천히 보고 얕보며 하느님께 대하여서는 신심 있고 은혜를 갚으려 하고 하느님을 사랑할 정이 아니 날지라도 괴로움이 없이는 사랑의 생활을 할 수가 없음을 아는 만큼, 항상 하느님만 믿고 바란다.” - 『그리스도를 본받음』, 토마스 아 켐피스 - 제 5장 7

 

1815년 11월 26일 이후 1816년 10월 21일 사이의 어느 날, 대구의 감옥에서 박해자의 칼을 받아 순교의 영광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랐던 서석봉 안드레아는 굶주림과 매질로 인하여 지칠대로 지친 나머지 이승을 떠났다.

 

충청도 홍주 땅의 작은 마을에서 살면서 일찌감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그는 첫 아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는 아픔을 겪으면서 영원한 삶에 대한 원의(願意)를 갖게 되었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배우자를 잃은 아픔을 겪은 구성열 발바라를 만나 여생을 서로 의지하고 살기를 약속하였다.

 

1801년 충청도 땅에 박해의 바람이 모질게 불어닥칠 때 서석봉 안드레아는 아내와 더불어 홍주 다래골 태생인 사위 최봉한 프란치스코와 딸을 데리고 노래산 신자촌으로 이주해 와서 정착하였다. 궁벽한 산촌에서 언제 포졸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과 물질적인 궁핍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족은 오직 영세 때 하느님께 바친 순명(順命)의 덕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에 모든 괴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한번 세운 뜻을 바꾸지 않고 담박하고 정결한 생활을 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라고 배웠던 서석봉 안드레아는 하느님만 믿고 사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신자촌에서의 생활에 극히 만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도 잠시 누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1815년 부활절을 전후하여 노래산 신자촌을 급습한 포졸들에 의하여 대부분의 신자촌 형제 자매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 진영으로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받으며 배교하기를 강요당하였기 때문이다.

 

서석봉 안드레아는 그 어떤 육체적 고통도 잘 견뎌낼 수 있었으나 사랑하는 아내 구성열 발바라가 지척에서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힘들어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첫 아내가 세상을 떠날 때 겪었던 심적 고통에 못지 않은 아픔을 그는 느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육체적 고통을 못이겨 잠시 배교의 유혹에 빠지는 듯한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한층 더 조바심을 가졌다. 다행히도 신덕(信德)이 깊었던 사위 최봉한 프란치스코가 장모에게 천주를 위하여 함께 목숨을 바치기를 열심히 권면한 덕에 다시 마음을 고치는 아내를 보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이들 부부는 곤궁함 가운데서도 하느님 때문에 겪는 고통은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치루어야 할 대가라 생각하며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석봉 안드레아 일가는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한 후 석방되거나 적절한 처벌을 받기 위하여 감옥에 남겨진 사람들을 뒤로 하고, 다른 천주교 신자 죄수들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대구에 와서도 경주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문과 회유에 시달렸다. 그러나 천주를 위하여 죽기까지 하리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그의 뜻을 그 누구도 꺾지 못하였다.

 

이러한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위인 최봉한 프란치스코가 1815년 5월에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가자 깊은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비록 그가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는 확신은 있었으나, 이승에서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허전함을 달랠 길 없었기 때문이다.

 

1815년 10월경에 대구 인근의 군수와 영장, 현감들이 입회한 가운데 감사로부터 또 한 차례 재판을 받게 된 서석봉 안드레아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자신의 뜻을 재차 분명히 밝히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처형되기 전에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배운 바가 비록 십계라고 하나 외우는 것은 불과 몇 구절, 하지만 오히려 더 깊이 미혹되어 뉘우칠 줄 몰랐습니다.”라고 경상감사가 전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단순하고 담박한 신심(信心)과 손상되지 않는 성심(聖心)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이승을 하직하였다.

 

그는 하느님께 온전한 사랑을 바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을 하고자 하였고, 그러기 위해서 괴로움을 달게 받아내는 사랑의 생활을 함으로써 신덕의 표양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월간빛, 2002년 8월호, 백경옥 레베카(대구가톨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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