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이스라엘1: 마음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순례 - 구약에서 신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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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07 ㅣ No.993

[이스라엘 성지 길라잡이] 마음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순례 - 구약에서 신약까지


작지만 큰 나라 이스라엘. 한반도의 1/8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땅이지만, 구약과 신약의 배경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품었던 이스라엘은 신앙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큰 나라가 되었다. 신자로서 한 번쯤은 예수님의 고향에 가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살지만, 삶의 무게에 눌려 주저할 때가 많다.

삶의 매트릭스에 빠져 인생이 메마르게 느껴지거나 의무감에 겨워 공허한 기도를 되풀이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믿음의 조상들이 살아 움직였던 가나안으로 마음으로나마 순례자가 되어 떠나보자. 2012년 새해를 맞이하며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에 이르는 구약에서 신약까지, 한 달에 한 번 내 가슴속의 가나안을 방문하는 여정을 시작하고자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상)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곳은 현재 이라크 땅에 있는 칼데아 우르(아래 지도 참조) 지방이었다(창세 11,31; 15,7; 느헤 9,7).

- 기원전 17-18세기 아브라함의 이동. 오른쪽 끝 우르에서 왼쪽 끝 가나안 땅 스켐까지.


하느님의 약속에 따라 아브라함이 정착했던 가나안은 열강들 사이에 낀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늘 전쟁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가나안을 사이에 두고 아래에는 이집트가, 오른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가 버티고 있었고, 이 두 곳에서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두 개가 발상하여 고대 문명의 꽃을 피웠다.

어찌 보면 아브라함은 번창했던 고향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상대적으로 초라한 가나안 땅에 정착함으로써, 화려하고 편한 서울에서 불편하기 그지없는 시골로 이주한 외로운 한국인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아브라함이 처음 길을 떠났을 때에는(창세 11,31), 왜 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고향을 떠나야 하는지 어떠한 물음도 그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도 없었다.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가나안에 들어왔고, 스켐에서 처음 쉬어갈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감사의 뜻으로 그곳에 하느님을 위한 제단을 쌓았다(창세 12,7).

늦은 나이까지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이스마엘과 이사악을 얻었다. 아내 사라로부터 자식을 보지 못하자 이집트 여종 하가르를 통해 아들을 얻은 뒤 이스마엘이라 불렀고(창세 16장), 다시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이사악이 태어나 히브리인들의 피를 이었다.

-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 스켐의 모습. 스켐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0-6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성읍이다. 히브리어 스켐이 ‘어깨’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과 같이, 북쪽으로 에발 산, 남쪽으로 그리짐 산을 병풍처럼 두어 그 모양이 흡사 사람의 어깨와 비슷하다.


이사악의 수태고지를 받은 것은 아브라함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로 이주했을 때이다. 하느님은 그곳에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고 땅을 이어받을 후손을 다시 한 번 약속하셨으며(창세 15장),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참나무(상수리나무) 아래 앉아있을 때, 세 천사가 방문하여 사라의 잉태 소식을 전했다(창세 18장). 그러나 사라는 그 소식을 듣고도 믿을 수 없다며 웃었기 때문에 태어난 아들은 이사악(‘웃다’라는 뜻)이 되었다.

이렇게 이스마엘과 이사악이 태어난 것을 보고 어떤 이는 아브라함이 오래 기다리지 못함으로써 이스마엘을 얻었고 인고의 결과로 이사악을 얻었다고 해석하지만, 현재 이스라엘에서 서로 갈등하는 두 민족이 그렇게 태어났으니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쿠란에 따르면 이스마엘은 아랍인들의 조상이고, 구약에 따르면 이사악의 아들인 야곱으로부터 유다 민족이 나왔으니 두 민족이 사촌 간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아브라함의 후손을 해석하는 두 경전의 시선은 너무도 다르다. 특히 이사악보다 이스마엘을 중요시하고 사라보다 하가르를 높이 보는 이슬람을 보면 말이다. 게다가 무슬림 전승에서는 아브라함이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아들도 이스마엘이라 믿는다.


- 헤브론 아브라함 성당 근처 참나무(상수리나무). 헤브론은 성경에서 “키르맛 아르비”라고도 불렸고(창세 23,2), ‘넷의 도시’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곳에 묻힌 네 쌍(아담과 하와 - 유다 전승, 아브라함과 사라, 이사악과 레베카, 야곱과 레아)의 숫자를 상징할 수도 있고, 주변에 있는 인근 언덕이 네 개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히브리어 헤브론(아람어로 El Khalil)은 ‘친구’라는 뜻으로, 2역대 20,7과 이사 41,8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벗”이라 불린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서기 800년 정도에 집성된 쿠란에 비해 훨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구약에는 아브라함이 브에르 세바에서 반유목 생활을 하다가 이사악을 바치려고 모리야(112쪽 사진)까지 이동했다고 기록했다(창세 22장). 2역대 3,1에는 솔로몬이 모리야 산에 하느님의 성전을 지어 봉헌했기 때문에 모리야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듯하다(다음 회 참조).

과연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은 완벽하게 실현되어 그 자손들은 하늘의 별처럼 강변의 모래처럼 아옹다옹 가나안과 이 세상을 채웠다. 믿음의 조상으로서 인류의 많은 수를 차지하는 유다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 세 종교의 뿌리가 된 아브라함. 같은 하느님을 통해 동일한 믿음의 조상을 가졌는데도 왜 종교적 갈등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부족한 인생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인 듯하다.

그 다양함과 그 속에서 터져나오는 불가피한 갈등 속에서도 최종의 선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의 길이 아니겠는가? 4,000년 전 아브라함이 발견한 하느님과 우리에게 이어진 그 믿음의 끈은 짙은 갈등과 절박한 위기 속에서도 부족한 서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완성됨을 묵상해 본다.

* 김명숙 소피아 - 부산교구 우정본당 신자로 이스라엘에서 성지순례 안내자로 일하며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구약학과 석사를 마치고, 박사학위 취득을 앞두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월호, 글 · 사진 김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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