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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최봉한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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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485

대구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8)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1785∼1815)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조선시대의 여러 천주교 박해 가운데에서 을해박해(1815년)와 관련하여 체포된 후 경상 감영의 감옥에서 순교한 인물 중의 한 분이다. 그는 조선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 일가의 친척으로 충청도 홍주의 다래골(일명 : 다락골. 현재의 지명은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풍암리)에서 태어났다. 일명 그의 이름은 여옥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아명은 진강이다. 어려서 아버지의 권고로 입교해 신자가 되었으며 이즈음에는 공주의 무성산에서 살다가 이후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왔을 때에 이르러서는 가족을 데리고 찾아가 성사를 보기도 하였다. 그와 함께 상경한 어머니는 주문모 신부로부터 성사와 더불어 임종시에는 종부성사를 받았으며 또한 그의 누이는 상경하여 정약종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 이후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다시 시골로 내려왔다가 1801년의 대박해 때에 피신하여 청송 노래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한편 그는 을해박해시 경상북도 청송에서 함께 체포되어 대구에서 순교한 바 있는 서석봉 안드레아·구성열 발바라 부부의 딸과 결혼하였다. 따라서 이들 부부 순교자와는 곧 사위가 되는 관계이다.

 

샤를르 달레가 전하는 『한국천주교회사』의 기록에 의하면 최봉한 프란치스코가 경상 감영의 감옥에서 치명할 당시의 나이는 서른을 갓 넘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그의 출생연도는 1785년을 전후한 어느 시기로 추정이 된다.

 

이상 최봉한 프란치스코에 관한 현존사료는 교회측의 기록으로 『한국천주교회사』 그리고 국가기관의 기록으로서는 『일성록』과 『순조실록』의 내용을 들 수가 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최봉한 프란치스코의 행적을 주목하면 가장 우선 생애의 마지막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다 치명한 사실 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몇 사례를 통해서 볼 때 그가 참 신앙인으로서의 확고한 신념과 덕행을 일관되게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여기서 순교자 최봉한 프란치스코의 투철한 믿음 그리고 신앙 증거자로서의 모범적인 삶을 조명해보기로 한다.

 

첫째, 최봉한 프란치스코의 집안에서는 일찍부터 천주교를 이해하였으며 그 역시 이러한 가풍의 영향으로 믿음을 더욱 돈독히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조선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 일가의 친척이기도 하며 부모의 권고로 세례를 받은 이후에는 당대에 교리 지식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정약종(1760∼1801), 황사영(1775∼1801)을 비롯하여 최필공(1745∼1801), 김한빈(1764∼1801) 순교자 그리고 외국인 주문모(1752∼1801) 신부 등과의 꾸준한 교류 및 관계를 유지하면서 열성적으로 노력을 다하였다. 이러한 사실의 확인은 경상 감사 이존수가 조정에 보고한 기록이 담겨있는 『일성록』에서도 그대로 증명된다. 즉 경상 감사는 “청송의 죄인 최봉한은……정약종을 좇아 같이 어울렸으며, 주문모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황사영, 최필공 및 김한빈 등과 더불어 절친한 교우 관계를 맺었고, 책자와 화족을 지녔는데 이것들은 주문모 등이 전수한 것이었다고 모두 자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문모 등이 잡혀서 죽은 뒤에는 사특한 물건을 수습하여 몰래 스스로 조령을 넘어 점차 심산 궁협으로 들어가 유민들을 모아서 한 촌락을 만들고 스스로 교주가 되어 드디어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여기에 빠져들게 하였으니, 이 옥사(獄事)의 괴수는 그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라고 글을 써서 보고하였다.

 

이처럼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당대의 천주교 지식인들과는 교리를 중심으로 하는 친분을 쌓아 나갔으며, 동시에 촌락의 모임에서는 천주를 전하고 앞장 서 일치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다.

 

둘째,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1815년 2월 22일 무렵의 부활 축일에 청송 아문(衙門)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이후 경주 진영(鎭營)에서 회유와 고문을 당하게 된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청송에서 함께 체포된 교우 가운데 일부는 고문과 굶주림에 굴복하여 배교하였으나, 최봉한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나머지 증거자들은 거듭하여 굳은 결심을 드러냄으로써 경상 감영의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모범은 진정 신앙인으로서 흔들림이 없는 의지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릇 타인에게도 큰 감화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증언 가운데의 하나로서 샤를르 달레가 전하는 『한국천주교회사』에는 그가 포졸들에게 붙잡힐 즈음 솔선해 동료들에게 이르기를, 관헌이 문초하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미룰 것을 청하였으며 결국 이 때문에 한층 더 혹독한 고문을 당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물론 그의 한결같은 의지는 갖은 문초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서는 청송에서 함께 체포된 그의 장모 구성열 발바라가 삼모장이라는 잔혹한 매질에 굴복하여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이자, 위로와 권고를 통하여 끝까지 신앙을 증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죽음 앞에서도 용감히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모범이 주위의 교우들에게도 용기를 북돋아 주어 배교의 흔들림을 극복하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셋째, 결국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경상 감영의 감옥에서 재차 심문을 받은 후에 최종 형을 선고받기 전인 1815년 5월경 감옥 안에서 치명하였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감옥 실상을 보면 보통 담으로 둘러싸인 울타리 안에 판잣집을 세우고 겨우 짚으로 짠 멍석만이 깔린 원시적인 시설이 전부여서 모진 더위와 추위뿐만 아니라 각종 질병에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에 더하여 최봉한 프란치스코의 경우에는 감옥에서 신체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무자비한 고문형벌과 함께 그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기에 전신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실상이 그러하기에 조선시대의 그 어떠한 종류의 고문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형벌은 곧 장기유치임을 기록에서 생생히 전해 주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주목할 내용은 단지 감옥생활의 길고 짧음이 피구금자의 정신적 나약함 내지 강인함을 좌우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전혀 뉘우침이 없는 소위 ‘사학(邪學)’죄인이란 죄목에 더하여, 그것도‘옥사(獄事)의 괴수’인 경우에 있어서는 대부분 그 문초과정에서 국가법에 정해진 원칙을 따르지 않고 반인륜적인 소나기식의 참혹한 고문을 가하였기에 단 한차례의 고문에도 자신의 몸을 거의 가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독한 혹형이 가중될수록 육신의 고통은 더하였으나 영혼의 구원은 더 큰 믿음으로 다가왔다. 결론적으로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진정한 믿음과 순교의 정신이 충만하였기에 온갖 육신의 고통 및 시련이 가해져오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참 신앙인의 자세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평소의 공동체 생활에서는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극도로 열악한 환경의 감옥에서도 한결같은 믿음으로 천주를 증거하였으며 또한 주위의 모든 이웃에게 가르침 그대로 사랑과 희생의 모범을 실천하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커다란 귀감이 되고 있다. 이제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박해시기 순교자의 고귀한 덕행과 투철한 신앙심을 널리 계승함과 동시에 이들을 복자와 성인의 반열에 들어올림으로써 우리 교회의 영광으로 기리는 일이다.

 

[월간빛, 2002년 7월호, 강유신 미카엘(대구가톨릭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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