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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이시임 안나 - 착한 바람은 꺾였어도 완성을 향해 내달린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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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484

대구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7) 이시임 안나 - 착한 바람은 꺾였어도 완성을 향해 내달린 믿음

 

 

만물은 모두 각자의 가치와 미를 가지고 있어 서로 비교할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해도 요즈음은 “신록이 꽃보다 아름답다.”라고 외치고 싶은 날들이다. 그리고 그 신록보다 더 싱그러운 신부(新婦)들이 자주 탄생하는 계절이다. 신부는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파르르 떨면서 혹은 눈물을 머금고 인생의 가장 큰 서원들을 바친다. 그런데 이 서원을 오롯이 주님께만 바치고 싶어한 순교자가 이시임(李時壬) 안나였다.

 

이시임 안나는 충청도 덕산고을 양반집 딸이었다. 그의 집안은 천주교회 초기에 입교하여 이를 실천하며 살았다. 1827년 정해박해 때 전주 포졸들에게 잡혀, 전주 옥에서 무기한 옥살이를 하다가 옥사한 이성삼(李性三)은 그의 오빠이다. 안나는 용모가 아름답고, 재능이 비상한데다가 신앙 특히 정덕에 대한 관념이 놀라웠다. 그는 어릴 적부터 동정을 지킬 결심을 남몰래 가지고 있었다. 당시 과년한 처녀가 시집을 안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안나의 동정에 대한 바람은 간단히 실천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조선사회는 여성들에게 수절을 장려하고 있었다. 정절을 지키는 여자를 열녀라 하여 그들의 행적을 널리 세상에 알리고 후세의 규범으로 삼았다. 조선 초에는 수절하는 여성에게 열녀문을 세워주며 그 정절을 선양했다. 후기가 되면 자신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는 경우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여성들도 정표의 대상이 되었다. 가령, 남편이 죽자 굶어서 따라 죽은 경우,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가거나 화재 등의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남편을 구하고자 노력하다가 죽은 경우, 남편이 죽자 목매어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경우 등의 여성들이 열녀로서 포상되었다.

 

조선사회에서는 결혼했던 여성의 정절과 수절을 이처럼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여성의 동정생활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기는 커녕 여성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일은 용인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임에도 조선 교회는 초창기부터 동정을 지키고자 하는 여인들이 많았다. 남성들 중에도 동정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계적으로 드문 신앙생활형태인 동정부부들이 있었고, 부부 동정의 모범을 보인 이순이 누갈다의 편지는 여러 사람이 베껴쓰면서 그 내용을 묵상했다.

 

동정과 같은 금욕생활은 신체적 긴장을 통해 자신의 정신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또한 영성적으로는 자신을 주님과 일치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동정생활은 주님을 온전히 닮으려는 생활에 자신의 모든 시간과 영육을 바친다는 결심이다. 당대 사회에서 이러한 동정이란 사람들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새로운 삶의 형태였다. 그러나 조선교우들은 교리지식도 별로 없는 실정이었는데도 짧은 시간에 이를 이해하고 실천해 나갔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겠다는 믿음으로 이러한 삶의 양식을 택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작은 변화는 이후 여러 사회개혁의 계기를 제공했다.

 

동정 허원을 하고자 했던 양가집 규수 이시임 안나도 당연히 부모와 친척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참다 못한 안나는 봇짐을 싸 가지고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그는 어딘가 자기와 같은 처녀들이 한데 모여, 동정 수도생활을 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거기로 갈 생각이었다. 그때 서울에서는 강완숙 등 여러 신자들이 모여서 복합 가족형태를 이루며 함께 수덕생활도 하고, 교리학습도 하고 있었다.

 

이시임 안나는 집을 나서자 교우 뱃사공 박가에게 길을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사회에서 뱃사공은 신분적으로 매우 낮은 천인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길을 가던 도중 박가는 이시임 안나의 동정을 빼앗았다. 그리하여 안나는 뱃사공 박씨와 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의사로 결혼서약을 하고 남편을 맞아들이는 천주교문화를 가진 선교사들은 이 사실을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었던 듯하다. 항거하지 않고 자신의 불행을 결혼으로 묵묵히 받아들인 이시임 안나에 대해 다블뤼 주교와 달레 신부는 그들의 책에서 길게 설명을 붙여 놓았다.

 

조선사회에서는 뱃사공이 그를 자기 소유로 만들었을 경우, 소송을 제기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라고 안나를 변명해 주었다. 그는 안나가 그 명예와 처녀성을 잃을 위험에 들었으니, 정당한 결혼을 할 수 있는 이 신자와 혼인해서 살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안나의 입장에서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다른 것을 원한 것도 아니고 자신을 주님께 고스란히 바치겠다는 결심이 사고로 인한 결혼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으나 약속한 땅에는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되어 버린 삶을 그는 성숙되게 받아들였던 듯하다. 그러한 성숙이 이루어졌기에 그가 전혀 낯선 이 삶의 형태를 자신의 길로 선택할 수 있었나 보다. 안나는 박씨와 생활하면서 종악이라는 아이를 낳았고 그 뒤 몇 해 안되어 과부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동정녀로 살지 못한 것을 되갚음하려는 듯이 열심히 생활했다. 아이를 데리고 신자촌을 찾아 가 그곳에 정착했다. 모든 어미가 그러하듯이 그도 외아들 종악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면서 말이다.

 

안나는 1815년 부활 축일에 진보 머루산 신자촌에서 많은 신자들과 함께 포졸들에게 잡혔다. 안나는 진보 아문의 상부 관청인 안동 진영에 이송되었다가 드디어 상급 관청인 대구에 있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경상감영에서도 신문과정이 되풀이되었다. 드디어 1815년 10월 18일에 사형이 선고되었고, 1815년 11월 26일에 이루어진 삼심제에서 안나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형 집행 명령은 1816년 10월 21일에나 실행되었다. 이시임 안나는 1815년 2월 경 체포된 이후 처형될 때까지 약 20개월간 옥중 생활을 했다. 그는 옥에서 궁핍과 굶주림 등으로 죽음과 같은 삶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이러는 동안에 아들 종악이는 감옥 안에 있던, 안나의 품에서 죽었다.

 

아직 철도 나지 않은 아이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의지인 어머니를 따라 옥에까지 들어왔었다. 이 어린이는 어머니와 함께 무서운 굶주림을 겪고 그 참혹한 옥중의 가난과 고초를 모두 함께 당해야만 했었는데, 결국 어미보다 며칠 앞서 천국에 올라갔다. 예로부터 부모는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의 신앙생활 때문에 감옥에 따라 들어온 자식이 죽었으니, 그 원망은 자칫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었을 법하다. 일반인 같으면 ‘하느님은 계신가?’하고 질문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안나는 자식이 세상을 오래 살지 않았으니, 그만큼 지은 죄도 많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는 오히려 아들의 불행한 처지를 행복한 것으로 바꾸어 생각하고 위로를 찾았다. 그의 착한 바람은 꺾였어도 그 믿음은 완성을 향해 내닫고 있었다. 이시임 안나는 마침내 1810년 11월 1일(양력 12월 19일) 현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자리에서 이러한 자신의 생활 속에서의 굳은 신앙을 죽음으로 증거했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그의 삶을 돌이켜 보자. 그는 얼핏 보면 스스로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기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시임 안나는 그런 불우한 처지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자녀로서의 사랑을 주님께 바쳤다. 자신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싶어하는 우리, 이웃을 위한 기도를 바쳤는데 이게 무어냐고 불평하고 싶은 현대 우리에게 견준다면, 그의 삶은 통곡으로 점철되어야 할 인생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발견한 주님의 사랑이 그를 순교 치명에 이르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 이시임 안나는 정약종의 『주교요지』에 있던 다음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익혔는지도 모르겠다.

 

“‘어찌하여 이 세상에 착한 사람도 가난한 이가 많고, 악한 자도 부귀한 이가 많으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시오. 세상의 화복으로서는 사람의 선악을 갚을 길이 없으니,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는 데 있어서 처음에는 착하다가 나중에 그른 이도 있고, 처음은 그르다가 나중에 착한 이도 있다. 따라서 만일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람의 선악을 갚으려 하면, 사람이 오늘 착한 일을 한다 하여 부귀를 주었다가 내일 그른 일을 한다 하여 부귀를 빼앗고, 그 후에 다시 착해졌다고 해서 부귀를   줄 양이면, 한 사람의 부귀를 천백 번이나 주었다가 천백 번이나 빼앗을 것인가. 천주의 상벌하시는 일이 어찌 이렇듯 어지러우시리요?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일정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 기다리는 동안의 일로 만물을 판단해서는 옳지 않다.”

 

[월간빛, 2002년 6월호, 김정숙 소화 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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