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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38: 김대건 사제 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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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2-23 ㅣ No.2061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38) 김대건 사제 수품


조선인 첫 사제의 탄생, 신자들 감격의 눈물 흘려

 

 

김대건 부제는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 김가항성당에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사진은 가톨릭평화방송이 제작한 드라마 ‘성 김대건’ 중 사제 서품식 장면들. 가톨릭평화신문 DB.

 

 

라파엘호에서의 선상 미사

 

김대건 부제는 1845년 6월 4일 상해에 도착한 후 8월 31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떠나 귀국할 때까지 프랑스 예수회 출신 클로드 고틀랑(Claude Gotteland, 1803~1856) 신부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는다. 고틀랑 신부는 산동대목구장이며 남경교구장 서리인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출신 베지 주교의 초청으로 1842년 프랑스 예수회원으로는 처음으로 상해와 강남 선교사로 파견됐다. 김대건 부제가 상해에 왔을 때 고틀랑 신부는 남경교구 총대리 신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고틀랑 신부는 김대건과 마카오 신학생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왔다. 특히 김대건이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1842년 5월 11일 중국 절강성의 관문인 정해항에 도착한 후 6월 21일 프랑스 군함 에리곤호를 타고 오송으로 출항할 때까지 주산도에 42일간 머물 때 주산의 예수회 대표 신부로 고틀랑 신부가 활동하고 있었다. 또 그해 6월 에리곤호가 아편전쟁으로 상해에 머물고 있을 때 고틀랑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을 안내해 여러 교우촌을 방문하며 친분을 쌓았다. 이런 인연으로 고틀랑 신부는 김대건 부제와 조선 신자들이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했을 때 서둘러 달려가 마치 자기 일인 양 이들을 도왔다.

 

고틀랑 신부가 조선 교회 신자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선상 미사’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이후 6~7년 동안 조선 교회 신자들은 단 한 번도 성사를 받은 적이 없었다. 1845년 6월 어느 날 밤 라파엘호에서 처음으로 봉헌된 선상 미사는 그날 지구 상에서 바친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다.

 

“미사성제를 드리기 위해 배에서 밤을 지낼 각오를 하고 저녁에 그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고해하기를 몹시 원하는 우리 착한 조선인들에게 우선 고해성사를 주어야 했습니다.… 우리 소중한 부제가 맨 처음으로 왔습니다. 그는 고해를 끝낸 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차례로 그의 옆에 와서 무릎을 꿇는 선원들의 통역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해 신부와 고해하는 교우 사이에 있었습니다. 고해성사를 주기에 앞서 저는 먼저 모두에게 말했던 것, 즉 이런 경우에는 모든 잘못을 고해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통역을 통해 거듭 알렸으나 한결같이 ‘모두 고해하렵니다’라는 같은 대답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해는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모두가 자신들의 잘못을 훌륭한 열성으로 고백했습니다. 미사 드릴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고해가 끝났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우상 숭배자로 가득 찬 대도시 근처의 아주 조그마한 배 위에서, 그렇게도 오랜만에 미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는 몇몇 교우들에게 둘러싸여 미사성제를 올렸습니다.”(고틀랑 신부가 1845년 7월 8일 강남에서 예수회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인 성직자 맏배

 

한편,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머물던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로부터 배를 갖고 상해에 도착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페레올 주교는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권한으로 1845년 7월 15일 요동대목구에서 사목하고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베르뇌 신부를 조선대목구 부주교로 지명해 포교성성에 보고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7월 17일 조선대목구 선교사 다블뤼 신부와 함께 김대건 부제가 있는 상해로 가기 위해 마카오를 떠나 홍콩으로 갔다. 이어 7월 27일 홍콩에서 배를 타고 8월 8일께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 도착한 페레올 주교는 조선으로 가기 전에 우선으로 서둘러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김대건 부제에게 사제품을 주는 것이었다. 김대건 부제의 사제 서품식 준비는 아마도 남경교구 총대리 고틀랑 신부가 맡아 한 듯하다. 교구장 베시 주교가 사목 방문 중 병을 얻어 교구청으로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틀랑 신부는 상해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래된 곳이며 초기 남경교구 주교좌성당이었던 김가항(金家港)성당에서 김대건 부제의 사제 서품식이 거행되도록 허락했을 것이다.

 

김대건 부제의 사제 서품식은 1845년 8월 17일 김가항 성당에서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주례로 성대하게 거행됐다. 서품식에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고틀랑 신부 그리고 서양 선교사 1명과 중국인 신부 1명이 참여했고, 조선인 11명과 중국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 김대건이 신학생으로 선발된 지 꼭 9년 만에 사제가 된 것이다.

 

성인 호칭 기도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제단에 엎드린 김대건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고선 세 명의 신학생 가운데 가장 부족했던 자신이 조선인 첫 사제로 맏배가 된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김대건은 라틴어 그레고리오 성가로 길게 울려 퍼지는 성인 호칭 기도 동안 하느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 당신 외 아드님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삼으셨듯이, 또 아브라함이 자신의 맏배를 번제물로 봉헌했듯이 자신이 부족하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조선 교회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을까.

 

김대건의 기도는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라고 묵상해 본다. “저는 조선인 성직자 맏배로 조선의 뭇 백성들을 향해 걸음을 재촉할 것입니다. 차가운 밤 속에 빠져 진리도, 하느님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불행한 이들을 위해 숭고한 빛을 조선 산하에 밝힐 것입니다. 열의를 다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성스러운 사제직을 수행할 것입니다. 죽어야 한다면 죽을 것입니다. 죽음이 저의 거룩한 미래이며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제 사제직의 열망은 하느님 뜻대로 죽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승리자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서품식이 끝나자 조선 신자들은 기쁨에 겨워 김대건 신부를 둘러싸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우리를 축복하시어 조선인 사제를 탄생시키셨다”며 목이 터지라 노래하며 새 신부를 얼싸안고 강강술래를 했다. 서양 선교사들도, 중국 신자들도 함께 어울려 원무를 그리며 조선인 첫 사제 탄생을 축하해 주었다.

 

김대건 부제는 1845년 중국 상해 김가항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진은 수원교구 은이성지에 복원된 김가항성당.

 

 

횡당에서 첫 미사 봉헌

 

김대건 신부의 첫 미사는 서품식 1주일 뒤인 8월 24일 상해에서 10여 ㎞ 떨어진 예수회 소신학교 성당인 횡당(橫堂)에서 봉헌됐다. 중국인 소신학생들에게 조선인 첫 사제를 소개하려는 고틀랑 신부의 세심한 배려로 이곳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게 된 것이다. 성당 맨 앞자리에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고틀랑 신부, 그리고 소신학교 교수 신부들이 있었다. 또 조선인 신자들과 소신학생 33명도 함께 자리했다.

 

김대건 신부는 첫 미사에서 어떤 복음 말씀을 선포하고 무슨 내용으로 강론했을까? 궁금해서 올해 전례력을 찾아봤다. 8월 24일은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로 복음 말씀은 주님께서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시는 내용이다.(요한 1,45-51) 곧 주님께서 “나를 따르고 믿으라”는 말씀이 이날 복음의 핵심어이다. 김대건 신부의 첫 미사 강론 주제로 딱 어울리는 복음 말씀이다. 김대건 신부는 아마도 소신학생들에게는 스승이신 주님 안에서 용기와 힘을 얻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자고 당부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 신자들에게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강론했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식과 첫 미사는 고틀랑 신부(1845년 7월 8일 강남에서 예수회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와 다블뤼 신부가 1845년 8월 28일 망첨에서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개되고 있다. 페레올 주교는 1845년 8월 28일 상해에서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대건 신부(제가 사제로 서품했습니다)”라고 단 한 줄로 보고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2월 2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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