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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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교토(京都) 천주교 성지 (9)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키리시탄들 - 나이토 죠안(內藤如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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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17 ㅣ No.1511

교토(京都)에서 분 바람 - 교토천주교성지 ⑨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키리시탄들 - 나이토 죠안(內藤如安)



앞서 소개한 타카야마 우콘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킨 영주가 한 명 더 있었다. 그의 이름은 나이토 타다토시(內藤忠俊)이다. 교토 야기(八木; 교토시의 북서쪽의 위치함. 현재의 교토부 난탄시<京都府南丹市>)의 영주였던 그는 교토의 역사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지만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에도 이름이 남아 있을 정도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키리시탄 대명이자 외교관이었다. 1565년경 난반지에서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사제이자 선교사)로부터 “죠안(Giovan)”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 후부터 세례명을 한자로 고쳐 나이토 죠안(內藤如安)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 당시 영주들이 서로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잦은 전쟁이 일어난 전국시대였는데 죠안은 군기(軍旗)에 십자가를 그려서 교토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타카야마 우콘이 1615년 도쿠가와 막부로 의한 키리시탄 국외 추방령으로 의해 필리핀 마닐라에 추방되었을 때 끝까지 그와 함께 한 이가 바로 나이토 죠안이었다. 타카야마 우콘이 마닐라에서 세상을 떠난 후 시내에 일본인을 위한 키리시탄 마을(상 미겔; San Miguel)을 만들어 1626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 현재 상 미겔에 가까운 빈센트 드 뽈 성당(Vincent de Paul)에는 그를 기리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그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나이토 쥴리아이다. 쥴리아가 스물두 살 되던 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불교 신도로서 출가를 하였으나, 그 후 키리시탄들과 만날 기회가 생기고 오르간티노 신부(Organtino;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사제)의 가르침에 따라 서른한 살이 되던 해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일본에는 아직 수녀회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쥴리아는 여성 신자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여성이기에 가능한 신앙의 증거를 보여주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협조를 구하며, 뜻을 함께한 사람들과 키리시탄 비구니(비구니란 불교에서 출가하고 수행하는 여자 승려를 말한다. 그 당시에는 수녀를 키리시탄 비구니라 불렀다.) 모임을 만들었다. 일본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미야코(都; 도읍지)의 수녀회 회원들은 열심히 생활하면서 선교활동을 행하였다. 그녀들 중에는 상류계급의 귀족들과 관계가 깊은 이들도 있어서, 서서히 고쇼(御所; 천황이 사는 황거<皇居>) 안에 있는 여성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키리시탄들의 신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나이토 쥴리아의 영향을 받아 세례를 받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였던 우키타 히데이에(浮田秀家)의 부인도 키리시탄이 된 사람 중의 하나였다. 뜻을 함께 한 여성 키리시탄들의 모임인 일본 최초의 여자수도회는 그 후 “베아타스회”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베아타스”란 평생 하느님과 이웃에게 사랑을 바치기 위해 독신으로 수련하는 여성들의 공동체를 뜻한다.

토쿠가와 막부에 의한 키리시탄 국외 추방령때문에 1614년 나이토 죠안이 타카야마 우콘와 함께 필리핀으로 추방되었을 때 나이토 쥴리아 또한 그들과 함께 일본을 떠났다. 쥴리아는 일본을 떠났지만 그 후에도 베아타스회는 선교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올바른 생활을 하며, 순명과 청빈을 지킨 그녀들의 삶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게 하였다. 하지만 점점 더 박해가 심해져가면서 회원들 중 15명이 잡혀 가 순교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추운 겨울에 니죠가와라(二條河原)라는 곳에서 어떤 이는 알몸으로, 또 어떤 이는 얇은 옷만 입힌 채 목만 빼고 돗자리에 돌돌 말려서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면서 포졸들이 돗자리에 말린 그들을 굴리며 “코로베! 도로베!(“굴러가라!”라는 뜻)”라고 소리치며 조롱하였다. 그들은 온갖 고문을 당하는 중에 아주 잔인하게 처형을 당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1656년 모든 회원들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베아타스회는 사라지고 말았다.(참고도서 : 스기노 사카에 저서 《교토의 키리스탄사적을 돌아보다》, 산가쿠출판)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10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월간빛, 2015년 9월호, 이나오까 아끼(쥴리아, 비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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