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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거지 신부와 추기경 - 김동한 신부와 대구결핵요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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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2-11 ㅣ No.646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거지 신부와 추기경 (1) 김동한 신부(1919~1983)와 대구결핵요양원



종교가 같지 않아도 축하하는데 어색하지 않은 축일이 있다. 비종교인들도 마음 놓고 기뻐한다. 성탄절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씰은 그 푸근함을 더해준다. 그림이 우표보다 훨씬 예뻐서 탐을 내기도 했다. 카드에 씰만 붙였다가 요금미납딱지를 달고 되돌아 온 바람에 당황했던 꼬마시절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1932년 셔우드 홀이 처음으로 씰을 발행했다. 그는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온 부모덕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셔우드 홀은 결핵치료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캐나다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는 해주결핵요양원을 세우는 등 활발히 활동했으나 태평양전쟁 발발 때 일본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 천주교에서는 개신교보다 이 분야의 사목활동이 늦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분야에 천주교 체면을 세워준 사람이 있다.


철없는 사제, 곰삭은 성소

질병은 인간의 몸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대화이다. 이 질병으로 인해 혹자는 진로가 바뀌고 혹자는 더 불타오르기도 한다. 폐결핵은 6,70년대 가장 지난하고 무섭게 느껴졌던 질병이 이었다. 결핵은 경계 없이 드나들었다. 정규만 신부, 김승훈 신부, 백종순 수사, 김정용 신부, 대구결핵요양원의 김은화 원장, 시몬의 집 최숙희, 마산병원 봉사진료 이중길 의사 등 여러 사람이 이 병에 잡혔다. 서정길 대주교도 결핵으로 오래 고생했고, 그 치료차 유럽에 머물면서 많은 은인들을 초청해왔다.

김동한(가롤로) 신부는 결핵으로 인생을 바꾼 이다. 김 신부가 결핵과 마주 대하게 된 것은 1964년 경산본당에 발령받으면서였다.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직후였다. 당시는 한국사회에서 인구 백 명당 다섯 명이 결핵환자라는 통계가 나올 때였다. 그렇지만 구멍가게를 하던 집의 식구 한 명이 각혈을 하면 그 가게가 문 닫을 정도로 사회에서 꺼리는 질병이었다. 전염병이기 때문에 가족들조차 피했다. 김 신부는 본당 관내 결핵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가난한 환자를 방문하고, 약과 땟거리를 장만해 주었다. 처음에는 한두 사람이더니 자꾸 늘어나 나중에는 스무 명이나 되었다. 그러던 중 1969년, 김 신부는 경산본당에서 자인본당을 분가하고자 신축공사를 시작했는데 지붕공사를 돌아보다가 각혈하고 쓰러졌다. 의사들은 그가 6개월 이상 생존하기 힘들다고 진단했다. 결핵도 중증이었지만 당뇨병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김 신부는 마산국립결핵병원 내 천주교회에서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거기 있는 2년여 동안 그는 결핵 인생의 비극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요행히 김 신부는 기적과도 같은 투병결과로 2년 만에 대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1973년 여름까지 후기 요양을 했다, 그동안 마산 시절 보살펴 준 사람들은 김 신부에게 계속 도움을 청했다. 그는 부모, 형과 아우를 결핵으로 잃은 환자 형제를 입원시키려고 서해 백령도까지 몇 차례 다녀오기도 했다. 그곳에는 메리놀회가 운영하던 결핵요양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핵환자들이 안심하고 투병할 수 있는 요양공간이 필요했다. 당장 입원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십만 명도 넘는데, 전국의 병상 수는 국공립, 사립을 다 합쳐도 고작 이천여 개였다. 더구나 무료병동입원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고, 또 설령 입원한다 해도 입원기간이 6개월로 제한되어 있었다. 결핵은 장기치료를 요하는 병인데도 재입원을 하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재입원 신청 후 몇 달이고 병원 주변 민가에서 합숙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김 신부는 재입원을 기다리는 동안 민가에서 최후를 맞은 환자들의 장례를 치르면서, 중증 환자들이 안심하고 요양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고 싶었다.

1973년 건강을 회복한 김동한 신부는 화원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그런데 본당에서 대구 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달성군 송현동에 대구요양원이 있었다. 그가 마산요양소에서 세례를 준 신자 두 명이 이곳에 옮겨와 있었다. 김 신부는 틈틈이 이곳을 방문했고, 나중에는 다른 환자들과도 사귀어 그곳도 공소처럼 드나들게 되었다. 그의 도움은 단순했다. 간장, 된장을 얻어오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김 신부는 민간요법이든 무엇이든 도움이 되는 것을 찾으려 했다. 이러한 신부를 통해 환자들은 자신이 결코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위로를 받았다. 같은 병을 앓는 환자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그곳에 흐르는 희망에너지는 쉽게 전염되었다. 결핵에서 완치된 김 신부가 드나드는 자체가 이미 상징이었으리라. 당시 대구요양원은 말이 요양원이지 수용소에 다름없었다. 운영진은 이미 투자할 여력을 잃었고, 환자에게 필요한 투약은 고사하고 호구지책도 시청의 구호에만 의존하는 실정이었다. 물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서 환자들이 목욕이나 빨래하기도 힘들었다. 더는 어쩔 도리 없는 난치성 환자 70여 명이 그곳에 수용되어 있었다. 결국 이 요양원이 경영부실로 폐문 직전에 다다르자 김 신부에게 모든 운영권을 넘겨 받으라고 제안했다. 1976년 3월이었다.

김 신부는 번민했다. 수십 명의 환자들을 책임져야 하는 일은 심각했다. 주위에서는 현실성에 문제가 있다고 모두 말렸다. 그때는 교회가 사회로 나와 활동을 시작하던 때였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고, 문제점을 먼저 느낀 사람이 그 분야를 개척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당시 지역 내 결핵요양원사업은 험난했다.  이보다 두 해 앞서 왜관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레지날도 신부가 칠곡 연화리에 요양원을 세우고자 했다. 이때 수도원의 회원들은 대부분 인적, 재정적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사제 한 명이 결핵요양원을 하겠다니 더욱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었다. 김 신부의 유일한 의논 상대는 예수·마리아였다. 그는 “내가 하느님을 믿지 못해, 마산요양원 시절 하느님과의 약속을 저버린다면 90여 명의 환자들이 어디로 갈 것입니까?”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결국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운영난에 빠져 있는 사회복지법인 춘광원 산하 대구요양원의 운영을 맡았다. 이로써 의지할 곳 없어 길거리를 방황하거나 보건소 등을 통해 들어오는 결핵환자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였다. 그의 주된 임무는 사경에 헤매던 그들을 보호·치료하고 갱생시켜 사회로 되돌려 보내는 일이었다. 그는 당장 환자들을 먹이고 입혀야 하며 치료해 주어야 했다. 요양원 일은 밑도 끝도 없는 소모전이었다. 그나마 1978년부터는 ‘휴양’이란 명분으로 본당주임에서의 사임이 허락되어 요양원에 전념할 수 있었다.

김 신부는 우선 수용소 같은 건물을 사람이 치료받고 살 만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바로 여자병동 및 취사장을 신축하여 완공하고 진료실, 검사실, 사무실, 약국, 사제관을 갖추는 공사를 했다. 또 기존 건물을 보수하고 이중창을 설치했다. 이어서 그는 관리동을 신축하고 남자병동 등을 개축했다. 엄청난 구걸의 행진이었다. 김동한 신부는 결핵환자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의 꿈은 멈출 줄 몰랐다. 김 신부는 그들이 치료받는 요양원, 자활의 터전, 그리고 혹 임종하면 묻힐 곳까지 마련해 나갔다. 그는 그들의 마지막 순간도 인간적으로 대우받는 세계를 이곳에다 이루고자 했다. 1983년에는 대구요양원 본관 건물을 현대화하기 위해 철거를 시작했다. 그는 환자의 안전을 고려해 탈출용 승강기의 설치까지 직접 검토, 지휘했다. 나아가 그는 결핵 이동 진료를 구상했다. 그는 결핵이 음성으로 판정된 환자들의 생활시설 〈사랑의 집〉도 건립하려고 했다. 그리고 건강한 이들의 따뜻한 사랑을 함께 나눌 후원회의 창설 역시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사랑으로의 초대, 밀알로의 초대 

김동한 신부의 열성은 여러 사람을 서로 사랑하도록 연결해 주었다. 그는 요양원의 운영난 타결과 함께 보다 나은 환자들의 복지생활을 위해 복지에 어두운 뭇사람들의 시력을 밝혀 주고자 했다. 그는 스스로 거지가 되었고, 그의 무거운 두 다리는 은인들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그러나 구걸도 한두 번이지 무턱대고 아무 데나 자꾸 갈 수는 없었다. 자연히 그 활동범위는 서울, 부산, 일본, 미국으로 넓혀져 갔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시력은 감퇴되고 수족에 마비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뇨병 합병증이었다.

원장이 후원금을 걷으러 다니다 보니 원장에게 직원들이 편지로 보고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직원들이 쓴 김 신부의 건강을 묻는 편지들이 적잖이 남아 있다. 또 성금을 넣어 보낸 편지들도 그가 남긴 유품의 일부가 되었다. 1981년, 사무국장 주영훈은 3월 19일에 사제로 서품된 조환길 타대오 신부가 22일 화원본당에서 첫 미사를 드렸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가 요양원에서도 미사를 집전해주겠다고 약속했음을 보고했다. 그 편지에는 주방식구들부터 요양원 사람들 모두의 안부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때 미사를 약속했던 그 새 신부는 현재 춘광원을 모태로 삼아 출범한 대구가톨릭사회복지회의 대표이사 조환길 대주교이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김 신부는 묵주를 들고 묵묵히 요양원 마당을 돌고 있었다. 당시 신부를 도우러 갔던 젊은 봉사자는 영문도 모르고 신부의 뒤를 따라 계속 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고 있는데 갑자기 정문에 우체부가 나타나서 도장을 가져오라고 외쳤다. 성금이 도착했다. 그때 “성모님! 감사합니다!”하고 외치던 김 신부의 얼굴을 그 젊은 봉사자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요양원에는 당장 다음날 땟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대구요양원에는 정부지원금도 있었다. 익명으로 보내온 적은 성금부터, 동경대교구장 시라야나기 대주교와 일본 밀알회, 오스트리아 부인회 등 국내외에서 크고 작은 사랑이 답지했다. 브라질, 독일, 캐나다 등의 교포들도 이 대열에 다수 참여했다. 또 본당에서는 영화를 상영하고, 바자회 등을 열어 모금에 응했다.

대구대교구에서는 한일합동으로 개최한 “사랑의 음악회” 수익금을 기부했다. 특히 동경대교구의 도움이 컸다. 동경의 매체들은 밀알회를 크게 취재해 주었고, 동경대교구 대주교는 엑스레이 촬영기를 기증했다. 그는 1984년 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 축하차 내한했을 때도 결핵균검사용 현미경과 성금을 기탁했다. 병원, 수녀원들도 지원에 나섰고, 가톨릭신문도 적극 호응해 주었다. 그중 가장 항구적인 도움은 1977년 발족한 밀알회였다. 대구요양원이 신자 여부를 가리지 않듯, 밀알회의 의지는 종교도 국경도 초월했다. 밀알회원은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지만 개신교, 불교신자와 비신자들도 상당 수 참여했다. 물론 요양원 식구들의 노력도 지대했다. 대구요양원에서는 기금마련을 위해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매주별로 편역 된 교회력을 인쇄하여 판매했다. 해당주일에 알맞은 성화와 그 주간의 독서와 복음성구, 교회축일, 영명축일과 음력 등을 표시하여 총 55매로 짜여졌다. 대구요양원 식구들은 온정에 보답코자 성모 성월 한 달 동안 묵주기도 3만 단을 추가해서 영적꽃다발을 엮어 봉헌했다.

사랑을 엮어주는 일은 모두에게 새로운 삶을 준다. 도움을 통해서 바깥사람들은 남에게 사랑을 베풀 기회를 가지며, 요양원 사람들은 그 도움으로 병을 고쳤다. 꽃피는 일이 물 주는 이에게 생명을 주는 것과 같다. 환자들은 은인을 위해 바치는 기도로 그들을 돕는다. 즉 환자들은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이 스친 마음은 다시금 그 사랑을 누구에겐가 옮기고픈 소망이 생겨난다. 즉 김동한 신부는 당대 대구 가톨릭교회는 물론 한국, 전 세계에 빠르게 전염되는 사랑의 울림이 되었다. 김동한 신부는 환자를 한 사람 받으면, 직원들에게 하느님을 모시고 왔다고 소개했다. [월간빛, 2014년 12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거지 신부와 추기경 (2) 김동한 신부(1919-1983)와 대구결핵요양원

 

 

1983년 9월 28일 김동한 신부가 선종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간 뒤에도 살아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죽어서 일하는 사제

김동한 신부는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많은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선종하던 1983년, 가톨릭결핵협의회 의장에 재임됐고, 완치환자들의 자활터와 이동진료소 마련 등을 구상하고 있었다. 특히 대구요양원은 현대화하기 위해 병동을 철거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사랑의 집’은 삽을 떠놓은 상태였다. 그는 인간적인 눈으로는 죽어서는 안 될 상황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생전에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온 사업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떠난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의 영면은 그의 일을 완성시키는 추진력이 되었다. 교구는 대구결핵요양원의 새 이사진을 구성했다. 이사장에 서정길 대주교, 원장에 박병기 신부가 임명됐다. 그리고 새 이사진은 마치 폐허를 연상케 하는 옛 건물 앞마당에서 건물 기공식을 했다. 이후 새로운 ‘김동한 신부’들이 사업을 완성해 나갔다.

김동한 신부의 종합적 결핵사업계획은 결핵환자들이 치료, 생활, 죽음까지 철저히 사람답게 대접받도록 하는 데에 목표를 두었다. 그는 대구요양원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978년부터 이미 오갈 데 없는 완치환자들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했다. 한번은 치료가 끝난 무의탁 노인 4명을 몇몇 양로원으로 전출시켰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노인들은 모두 6개월이 못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들 중 82세 된 한 노인은 요양원을 나서면서 신부님 옆에서 임종하고 싶다며 울었다. 김 신부는 그가 성사도 못 받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상심했다. 이후 김 신부는 완치된 이들을 위한 ‘사랑의 집’을 계획했고, 그들이 유실수라도 심어 생활해 나갈 땅을 마련하려 했다.

그러나 ‘사랑의 집’ 설립은 여러 난관을 넘어야 했다. 그 계획은 밀알회에서 적극 추진했고, 정부와 아산재단에서도 지원을 약속했다. 그는 현대식 시설을 계획했고, 완치환자들을 돌봐줄 봉사자들까지 확보했다. 그러나 건축비 마련과 부지매입이 문제였다. 비용마련도 어렵지만 부지마련은 더 큰 난관이었다. 건립부지로 교통이 편리하면서 당시 요양원과 40km 이내이고, 물이 풍부하고 환경이 좋은 땅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땅을 찾기가 어려웠다. 또 장소를 발견해도 해당 지역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3년여의 준비 끝에 경북 고령군 개진면 개포동 696번지에 건립부지를 확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핵환자 시설이라는 이유로 지역 군수가 반대했다. 거의 1년 동안 험악한 투쟁을 치렀다. 결국 ‘사랑의 집’은 툿찡 포교베네딕도수녀회의 성금 1천만 원이 시금석이 되어 1983년 공사에 들어갔다. 김 신부는 당뇨병 악화로 기공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 집은 신부 사후 “밀알의 집”으로 정식 명명되어, 김 신부의 1주기를 기해 축성되었다. 그리고 현대식으로 짓기 시작했던 대구요양원은 1985년 완성되었다. 박병기 신부를 비롯하여 새로운 힘들이 모여졌다.

김동한 신부가 그리던 믿음의 공동체는 이렇게 완성되어 갔다. 요양원은 대구시 달서구 송현동에 있었다. 여기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인 고령군에는 대구요양원에서 치료가 끝났으나 갈 곳이 마땅찮은 무의탁 폐기능 장애자들이 재활을 준비하는 밀알의 집이 세워졌다. 밀알의 집에서 읍내쪽으로 고개 하나 넘는 고령읍 현문동에는 ‘밀알농장’이 있어 완치된 환자들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자활의지를 태웠다. 세 곳의 식구가 150여 명에 이르렀다. 이중 신자 비율은 30-40%이며, 1년에 20-30명이 영세했다. 그리고 여기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숨진 이들을 위해서는 경북 성주에 ‘밀알동산(현 우성공원)’이라는 장지가 마련되었다.


대구요양원, 대구 사회복지사업으로 자라나

세월이 지나면서 대구요양원에 변화가 왔다. 1998년 IMF사태로 후원비도 크게 줄은 데다가 요양원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형성돼 주민들은 요양원 이전을 요구했다. 결국 당시 박상호 원장신부는 대구요양원을 대구시 달성군 논공읍 본리리 631번지로 이전하고 경북 고령 “밀알의 집” 등 모든 시설을 이곳으로 합쳤다. 그리하여 본래 송현동에서 시작했던 모든 결핵요양관계 기관들이 이곳에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결핵환자 시설들은 들꽃마을 직원 숙소 등 교구의 다른 복지기관으로 전환되어 사회복지의 새로운 싹을 틔웠다. 후일, 대구요양원의 법인 명칭인 “춘광원”도 1992년 정관을 변경하여 “대구가톨릭사회복지회”로 바뀌어 대구 사회복지사업의 모태가 되었다. 또 1978년에 결성된 요양원의 후원단체인 밀알회는 2011년 천주교 대구대교구 사회복지국자원개발부 밀알회로 거듭나 교구 내 여러 사회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이처럼 김동한 신부가 뿌린 씨앗에서 사회복지의 여러 꽃들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김동한 신부야말로 일반인이 참여할 수 있는 복지사업의 터전을 일구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몸소 체험한, 아무 것도 없는 사제에게 그런 세계를 보여주신 것은 여러 사람의 사랑으로 묶어 일하라는 주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김동한 신부는 친소(親疎)를 불문했고 신자여부를 가리지 않고, 빈부 구별 없이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했다. 그는 그 사랑에 자신의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가 함께 사랑하도록 여러 사람을 초대했기에 그는 시작만 했어도 큰 숲이 되어가고 있다. 그 무수한 떨림은 오늘 대구대교구의 온갖 사랑나눔사업의 원천이 되었다.

김동한 신부는 교구에서 결핵환자 복지사업을 처음 열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눈은 이미 그가 임하던 현장마다 새로운 문을 열고 있었다. 군종사목은 처음부터 대구와 관계가 깊다. 본래 군종사목이 제도화 될 때 육군본부, 공군본부 등이 대구에 있었다.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는 군종신부단 1대 총재였다. 김동한 신부는 1951년 군종사목이 시작될 때 업무를 보았으며 그 자신 첫 해군 군종신부로 입대했다. 그는 교도사목도 체계화했다. 김 신부가 화원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했을 때는 대구교도소가 화원으로 이전한 뒤였다. 그는 교도사목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사형수들을 현 범물동 묘지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묘들을 찾아보았다. 또한 그는 자인성당도 세웠다. 특히 김 신부가 교회 내에서 필요에 따라 자생해 온 여러 결핵사업기관을 유기적으로 묶어 효율적 운영을 도모하고자 가톨릭결핵시설협의회를 발족한 것은 매우 중요한 업적이었다. 이는 한국가톨릭결핵사업연합회로 성장했고 그의 사후 주교회의의 인준을 받았다. 한국가톨릭결핵사업연합회는 결핵치료 사업을 진행하고 또 그 일을 하는 이들을 발굴하여 격려해오고 있다. 김동한 신부는 이렇게 볼 줄 알았고 보는 것을 실천할 줄 알았다.


“하느님께 가시면 꾸지람 들으실 거에요.”

밀알이 되겠다는 김동한 신부의 몸은 그의 생전에 이미 썩어가고 있었다. 1983년 8월 그는 지병인 당뇨의 악화로 자리에 누웠다. 그의 병세는 위중했다. 매일 다리에서 고름을 짜냈다. 병원에서는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날 동생 김수환 추기경이 내려왔다. 당뇨의 합병증으로 장님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약해지고 두 다리의 감각이 마비된 형을 보고 동생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는, “형님은 하느님께 가시면 몸을 이렇게 썼다고 꾸지람 들으실 거에요.”라고 했다. 김 추기경은 그 밤으로 대구대교구장의 양해를 얻어 김 신부를 서울 강남성모병원으로 옮겨 입원시켰다. 그리고 사흘 후 형이 검사를 받고 있는 중에 추기경은 세계주교회의 참석차 로마로 떠나야 했다. 한 달쯤 걸린다는 동생에게, 형은 “먼 길 가시는데 누워서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추기경님이 돌아오실 때는 일어서서 인사할게요.”라고 했다. 김동한 신부는 9월 28일 폐수종(肺水腫) 병발로 하느님 앞에 갔다. 추기경은 로마에 도착해서 형의 선종 소식을 들었다.

김동한 신부는 동생 때문에 일부러 숨어 든 사람이었다. 학병으로 징집되는 동생의 손을 잡고 울던 형은 동생이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그곳에 있어 주었다. 김수환은 전범 증언문제로 다른 사람보다 1년이나 늦게 귀국선을 탔다. 김수환은 부산에 도착하자 범일성당을 물어 저녁이라도 얻어먹고자 했다. 그런데 그를 본 사람들은 범일성당 보좌신부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는 혹시나 하는 기대가 일었다. 성당에 도착하여 사제관 문을 두드렸더니 교리공부를 하고 있던 아이들이 나왔다. 그들은 그를 보자 “와! 신부님 동생이다.”라고 소리쳤다. 늘 형님 책상에 놓여 있던 사진 때문이었다. 김동한 신부가 그곳에 보좌로 발령 나 있었던 것이다.

김동한 신부의 이름은 어느 스님이 지어 주었다. 김 신부가 태어나자 그의 아버지가 김천 장에 가서 미역 등 산구완 물건을 사오던 중이었다. 웬 낯선 스님이 다가와서 “아이 이름은 동한(東漢)이라 부르시오. 이 다음에 큰 중이 될 것이오.”라고 했다. 그렇게 이름을 얻은 김동한 신부는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 때문에 ‘동환(東煥)’으로 불리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또한 두 형제는 얼굴이 무척 닮아서 사람들이 거리에서 김동한 신부를 보고 ‘아이고 추기경님!’이라고 인사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자신은 늘 대접받는 입장에 있는 반면, 형은 아픈 몸을 이끌고 전국 각지뿐 아니라 해외에까지 ‘구걸’하러 다니며 ‘거지 신부’라고 손가락질 받는 모습에 가슴 아파했다. 그러나 형은 김수환 신부가 주교가 된 후부터는 접촉도 뜸했다. 어떤 해에는 한두 번 스쳐 지날 정도였다. 그는 동생이 추기경이 되자 더욱 조심했다. 김동한 신부는 자신의 출입이 동생에게 누가 될까봐 일부러 피했다. 동생 주교를, 그리고 추기경을 피하면서 세상에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의 호소는 사후에 더욱 또렷해졌다.

미사가 끝나 환자들이 돌아가면 김 신부는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다짐했다. “하느님과의 약속에 따라 오늘도 한 개의 밀알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 그것이 곧 하느님의 도우심임을 믿습니다. 이제 늙고 병든 몸 밀알처럼 썩고자 하오니 은총으로 도우소서.” 형 김동한 신부의 삶은 한국교회 첫 추기경이면서 당대 천주교회가 나아갈 바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평생을 동경하고 존경했던 삶이다. 그리고 그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었다. 형만한 아우가 있느냐고 하던가? 새해 우리 모두 그런 형이고 그런 동생이고 싶다. 너의 아픔과 나의 아픔을 사랑으로 나누는데 용감한 형제들이고 싶다.(도움 : 김옥연, 도건창, 손옥경, 신홍업, 윤준혁, 최종수) [월간빛, 2015년 1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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