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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고요 속에 사회 개혁을 실행한 구성열 발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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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483

대구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6) 고요 속에 사회 개혁을 실행한 구성열 발바라

 

 

한국사회는 지난 100년 동안 급격하게 변해 왔다. 그 중에서도 여성 사회의 변화는 상상을 초월하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변화도 실은 아주 작은 계기에서부터 비롯된다.

 

한국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여자는 남자의 1/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인구의 반은 여자이며, 여자와 남자가 어울려 역사를 이룬다고 할 때 이 숫자는 매우 한심할 수밖에 없다. 역사란 일상의 생활을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역사에서 여자가 이름이 없는 이유는 여자의 생활을 ‘집안 일’이라는 울타리에 가두고 사회적 역할을 부여하지 않은 데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여자들이 사회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사상이 들어왔다. 바로 조선후기 천주교 신앙이다. 그리고 초기 신자들은 이를 묵묵히 실천해 냄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여성사회 변화의 초석을 마련했다. 필자는 여기서 구성열 발바라 순교자를 통해, 여성의 역사와 가톨릭 교회사에 단초가 되었던 작은 실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성열 발바라 순교자의 삶에서 크게 주목해야 할 일은 그가 오랫동안 남의 성으로 불렸던 점이다. 발바라는 논문에서든 교회문서에서든 최성열 발바라로 불리어 왔다. 그런데 2001년 순교현양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그의 성이 ‘구’였음이 확인되었다. 발바라는 평소 ‘서과부’〔서조이, 徐召史〕라고 불리웠다. 그러다가 그가 순교한 후 그의 성명을 증언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사위 최씨의 성과 혼동되어, 그에게도 최라는 성씨가 붙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는 구씨로 되어 있고,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최씨로 적혀 있다. 물론, 인명과 지명의 표기에 있어서 다블뤼 주교가 옳고, 달레 신부가 그르다고 간단히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달레 신부 책의 기본이 된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는 발바라의 이름이 다섯 번 나오는데, 이를 자세히 보면, 그 다섯군데를 모두 최라고 썼다가 구로 수정해 놓았다.

 

한편, 관변 기록에는 당시의 일반적 관행대로 ‘여자 죄인’의 성이 나와 있지 않고, 성열(性悅)이라는 이름만 나온다. 그리고 달레의 책이 역주될 때 관변 기록과 대조하며 그 성을 추정하는 과정에서 특별한 사료비판이 없이, ‘성열’을 최 발바라의 이름으로 확정하여 지금까지 그렇게 불러 왔다.

 

그런데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의 수정작업은 저자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진행한 작업이었다고 보인다. 특히 『조선 주요순교자 약전』의 뒷부분에 수록되어 있는 ‘연대순 순교자 명단’을 주목해야 한다. 그곳에는 1816년도 순교자로서 이시임 안나와 ‘발바라’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블뤼 주교는 ‘구 발바라는 과부 서  발바라라고도 불린다. 그의 성씨는 오랫동안 혼동되었으나 구씨로 밝혀졌다.’라고 써 놓았다. 이는 그가 나름대로 발바라의 성씨에 대한 확인 작업을 거친 다음 내린 결론이며, 그래서 그는 이미 최씨로 써 놓은 곳의 이름을 수정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발바라는 구성열로 불려야 한다.

 

구성열 발바라의 이름이 고쳐지지 않은 문서들이 아직도 많다. 그런데 이러한 이름 문제가 생긴 것은 한국 여인들의 이름 습관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한국 여인들은 시집가기 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이름으로 불려지지 않았다. 여자는 결혼하고 나면 누구의 부인 또는 택호, 아기를 낳은 뒤는 누구 엄마, 손자를 보면 누구의 할머니로 불리었다.

 

따라서 개화기 사회에 진출을 시작한 여성들 중에는 시집의 성을 따르거나 세례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화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평생을 여성교육에 바친 본명 차섭섭인 김미라 여사가 그 한 예이다.

 

그는 17세에 혼인하여 단지 3년의 결혼생활을 했을 뿐이었으나 평생 남편 성으로 있다가, 노년에 다시 성을 찾았다. 또 김활란, 김 에스더 등등 세례명으로 자신을 불러왔던 여인들도 많다. 이처럼 한국여성은 자신의 이름마저도 제대로 불리우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구성열 발바라는 이렇게 살았고, 순교했다. 그는 순교한 뒤에도 제 이름으로 기억되지 못했지만, 그는 조선사회의 구태의연한 관습을 단호히 거부했고, 실천했다.

 

1815년 봄 부활대축일에, 마치 예수님의 생을 재현하듯 청송 노래산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청송, 경주진영을 거치는 동안 많은 이들이 죽거나 배교하고, 겨우 7명만이 살아서 대구 감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1816년 12월 19일 현 관덕정 순교기념관 터에서 순교했다. 그 중에 구성열 발바라가 있었다.

 

구성열 발바라는 서석봉 안드레아의 후처이다. 그는 홍주 「한내 장벌」(현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에서 열심한 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아름답고, 온순하고 신앙심이 놀라와 교인들 사이는 물론, 일반 사회에까지 이름이 났었다. 그런데, 한창 나이에 한 신자와 결혼했다가 오래지 않아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 후 서석봉과 재혼을 했다.

 

지금도 남자와 비교할 때 여자의 재혼은 그리 자유롭지 않다. 더욱이 구성열이 살던 당시 양반 사회에서는 재가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본래 고려에서는 재가를 금지하지 않았다. 조선 초에는 여자가 세 번 시집가는 것을 금했다가, 성종 때 재가금지가 법으로 제정되었다. 그리고 여자가 재혼하여 얻은 자녀는 그 이유만으로 벼슬에 나갈 수 없었다. 또한 정절을 잘 지켜 산 여인들에게는 정려문을 세워 표창해 주었다. 이 표창을 받으면 그 집안의 세금을 면제해 주거나 포상금을 주는 등 경제적 혜택을 베풀어 주었다. 이리하여 여자의 재혼금지는 조선 중·후기를 내려오면서 고질적 관습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석봉 내외는 이러한 굳은 관습을 넘어섰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무엇을 외치거나 드러내지도 않고, 묵묵히 그리스도를 따랐을 뿐이다. 이러한 신자들의 생활이 있은 지 한참 뒤인 1894년 동학혁명 때에서야 사회에서는 과부의 재가허용을 주장했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갑오경장 때 이를 법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서석봉 내외를 비롯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축첩을 금지하고, 재혼을 허락하는 등 이미 오래 전에 사회 관습보다 앞서는 절대진리를 묵묵히 실천하고 갔다.

 

또 하나 구성열 발바라에게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그가 여성으로서는 피할 수도 있는 고난을 그대로 감당해 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처벌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홍경래 난이 진압될 당시, 마지막 항전지 정주성에는 3000명 가량의 농민들이 있었다. 성이 정부군에게 평정되고 나서, 남자 어른들은 모두 처형되었는데, 10살 미만의 남자 아이와 여성들 1000여 명은 목숨을 부지했다.

 

조선시대 참수형은 끔찍한 모습이다. 망나니들은 신이 동할 때까지 춤을 추다가 목을 내리친다. 이런 경우, 먼저 죽으면 차라리 죽는 이들을 보는 고통은 감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을해박해 순교자들 7명 중, 남자 5명이 먼저 처형되었다. 그것을 보면서 기진맥진해 있는 여성들, 구성열 발바라와 이시임 안나에게 관장이 다시 물었다.

 

‘이제 저 남자들이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너희들 여자야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느냐. 저들의 죄에 비하면 너희들의 죄는 가볍다. 아직 때는 늦지 않았으니 한 마디만 하면 너희들을 놓아 주마.’이 말을 두 사람은 단호히 물리쳤다. 그리고 그들은 참수 당했다. 그의 여정을 보면 구성열은 그렇게 강인한 여인만은 아니었다. 그는 삼모능장으로 맞아 거의 죽게되었을 때 이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다행히 같이 잡혀 왔던 사위의 격려로 그 위기를 모면했다. 그런 여인이 앞사람들이 목이 잘려 나가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자신에게는 면제될 수도 있는 형벌을 자청해서 감당해냈다.

 

남녀의 평등을 부르짖는 현대사회에서도, 여성임을 내세우면서 보호받고자 하는 이도 적지 않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성의 역할 구분에 도전해 보지도 않은 채 이를 따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구성열은 여성이었기 때문에 피할 수도 있었던 일을 남성과 똑같이 했다. 구성열의 매운 마음이 바탕이 되어 오늘날 여성의 사회진출과 남녀 평등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구성열 발바라는 깊은 고요 속에 손해나는 일을 마다 않고 실천하면서, 내일을 밝히는 커다란 개혁의 횃불을 당겼다. 구성열 발바라는 이름 없는 한 산골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여성이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을 크게 닦아놓았다. 그리고 그는 여성이 사회에서 인간의 몫을 담당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이는 그가 천주만을 보고 앞으로 나아갔기에 해낼 수 있었던 일들이다.

 

[월간빛, 2002년 5월호, 김정숙 소화 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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