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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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교토(京都) 천주교 성지 (8)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키리시탄들 - 타카야마 우콘(高山右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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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11 ㅣ No.1507

교토(京都)에서 분 바람 - 교토천주교성지 ⑧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키리시탄들 - 타카야마 우콘(高山右近)


 

교토에서 잡혀 박해를 받았거나 순교한 키리시탄 말고도 일본의 천주교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 중에 타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이라는 영주가 있다. 그는 교토사람은 아니었지만 교토의 키리시탄들에게 큰 도움을 준 한 명이었다. 키리시탄 대명(大名: 영주)이라 불렸던 타카야마 우콘은 타카츠키 성주(高槻城主: 교토의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의 오사카부 타카츠키시<大阪府高槻市> 근린을 다스리던 영주)였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세례를 받았다. 그의 세례명은 쥬스트(Justo)인데 포르투갈어로 “정의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콘은 교토에 본격적인 성당인 난반지를 세울 때 산에서 나무를 베어 교토로 그 나무들을 옮겨갈 때도 본인 스스로가 인부들을 인도해서 교토까지 운반하는 것을 도왔다. 그 당시 수도였던 교토의 주택 대부분이 단층이었는데 교토 시내에 근사한 3층짜리 목조건물인 난반지가 세워졌으니 이를 본 교토 사람들은 얼마나 감탄을 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난반지는 박해시대에 파괴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앞서 소개한 가노파(狩野派)의 그림인 “낙중낙외경명소도(洛中洛外京名所圖)”가 현재까지 코베시립미술관(神戶市立美術館)에 보존되어 있어 그림으로나마 그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예부터 교토를 ‘낙(洛)’이라고 표현했고 교토에 가는 것을 상락(上洛)이라고 했다.

이처럼 난반지가 세워졌을 때쯤 타카츠키에는 이미 여러 곳에 성당이 있었고, 그곳을 찾아간 발리냐노(Valignano) 신부는 2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그 곳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인덕이 많아서였는지 당시 수많은 대명들과 마을 사람들이 그를 따라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그 배경에는 쥬스트라는 세례명을 가진 타카야마 우콘이 자신의 영토에서 천주교 교리의 가르침을 따른 복지정책을 세워서 사람들을 돌보았기에 더욱 가능했던 일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타카야마 우콘은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일본에 선교하러 왔을 때 『도치리나 키리시탄(Doctrina Christina)』이라는 교리서를 갖고 와서 일본인 신자들의 교리책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책에 나오는 “자비의 소작(慈悲の所作)”이라는 부분을 참고로 사람들을 다스렸다고 『타카야마 우콘 사화(高山右近史話)』라는 책에 소개되고 있다. “자비의 소작”에는 7가지의 육체적 자선업과 7가지의 정신적 자선업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먼저 육체적 자선업을 살펴보면 마태오복음 25장 35-36절의 내용에다 죽은 이의 매장을 더하고 있다. ①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②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어라. ③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어라. ④ 병든 이를 돌보고 찾아가라. ⑤ 나그네에게 머물 곳을 주어라. ⑥ 잡혀 있는 이를 받아들여라. ⑦ 죽은 이를 묻어주어라. 이어서 정신적 자선업을 살펴보면 ① 사람에게 좋은 말을 하여라. ② 모르는 이에게는 가르쳐주어라. ③ 슬퍼하는 이를 위로해 주어라. ④ 잘못한 이에게 잘못을 알려주어라. ⑤ 수치를 당하여도 용서하여라. ⑥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여라. ⑦ 사는 이와 죽은 이, 그리고 나를 원망하는 이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를 바쳐라.

타카야마 우콘과 그의 아버지는 영토 내에서 이러한 복지정책을 실시하였다. 네 명의 자비사업 담당자를 배치시키고 타지에서 온 키리시탄에게 머물 곳을 제공해주며 음식과 입을 것을 주었고 그들이 가난한 경우에는 오랜 기간 돌보아 주었다. 또 추운 날이면 우콘은 새 옷과 헌 옷을 여러 장 겹겹으로 입고 나가서는 가난하고 추위에 떠는 이가 있으면 새 옷을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내에게도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당신 자신과 우리 자식들의 영혼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원한다면, 당신 스스로가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만약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어 줄 것이 없다면 지붕에 있는 기와를 떼어내서 그것을 팔아서라도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

그 당시에는 죽은 이의 장사를 지낼 때 신분이 낮은 이들이 그 시신을 받아 화장을 하였지만, 우콘은 가난한 이가 죽었을 때에도 스스로 관을 어깨에 메고, 신분과 성별의 구분없이 다른 키리시탄들과 같은 곳에 정중히 묻어줬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외에도 전쟁 때문에 가장을 잃은 아이들과 부인들에게 마음을 쓰는 등 우콘의 영토는 현재의 복지국가와 다름이 없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내란상태에 있었던 전국시대라 정치 불안으로 인해 일본 곳곳에서 약탈과 폭동이 일어나던 시절에도 우콘의 영토는 평온했고, 단 한 번도 폭동을 일으키는 이가 없었다. 이것은 영민(領民)들 거의 모두가 키리시탄이었던 것과 영주인 우콘 자신의 선행, 그리고 그의 모범적인 행동이 영민의 생활을 보장하며 절대적인 신뢰관계가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우콘이 다스리는 영토의 평화도 얼마 가지는 않았다. 1585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키리시탄 추방령을 내리자 히데요시의 측근들은 바로 개종을 하는 등 다른 키리시탄 대명들의 입장도 점점 난처해져 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타카야마 우콘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든 영토와 재산을 포기하여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 후 한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그는 1615년 도쿠가와막부로 의한 키리시탄 국외 추방령을 받아 필리핀으로 가는 배에 올라 그 해 12월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예수회의 보고서나 선교사들의 보고서로 인해 필리핀에서도 이미 유명해져 있었던 우콘은 스페인 사람인 필리핀 총독의 대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배로 오랜 기간 이동해야 했던 험한 여정으로 쌓인 피로와 고향과는 다른 기후 때문에 늙은 우콘은 병이 들어, 이듬해 2월 4일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총독의 지시에 따라 마닐라 시에 있는 성 안나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고 한다.

우콘이 사망한 후 그의 가족들은 일본으로의 귀국을 허락받고 현재 그의 자손들은 이시카와현(石川縣), 후쿠이현(福井縣), 오오이타현(大分縣)에 각각 살고 있다. 자신보다는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자선의 삶을 살며 굳건히 신앙을 지키다 떠나간 우콘에게 시복의 영예를 받을 수 있도록 2014년 일본 천주교에서는 모든 서류를 갖추어 바티칸 교황청에 신청서를 제출하였으며, 타카야마 우콘이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되는 해인 올해, 그의 시복에 대한 기대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참고도서 : 스기노 사카에 저서 《교토의 키리스탄사적을 돌아보다》, 산가쿠출판)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10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월간빛, 2015년 8월호, 이나오까 아끼(쥴리아, 비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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