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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김약고배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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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482

대구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5) 김약고배 야고보(?∼18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 13-16)

 

경상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한 한 줄기 등불과도 같았던 순교자 김약고배(金若古排, ?∼1816)는 달레의 교회사에 따르면 일명 김화준(Kim Hoa-tsioun-i)으로, 약고배(若古排)는 그가 관가에 체포당하여 문초를 받았을 때 세례명인 야고보(Jacques)를 관가에서 한자(漢字)로 표기한 이름에 해당된다. 그는 충청도 청양 고을의 수단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격이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했으며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온갖 힘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는 온순하고 점잖았지만 누가 성교회를 비방하거나 교리에 관한 토론을 할 때에는 성난 사자와 같았고, 그 훌륭한 언변에는 아무도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그의 언변이 뛰어났던 것은 교회지식이 깊었기 때문으로, 특히 그는 성교회의 규범을 충실히 지키며, 기도와 성서 읽기에 남다른 열심을 보여 다른 동료 신자들의 모범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때 그가 읽은 성서는 오늘날과 같은 신·구약성서의 완전한 번역본이 아니라, 주일미사의 복음과 독서를 위주로 하여 거기에 교회의 일정한 해설을 붙인 『성경직해』나 『성경광익』 또는 『성경광익직해』와 같은 복음해설서였을 것이다.

 

김 야고보가 체포되었던 계기는 1815년(순조15년, 을해년) 경상도 지방에서 비롯된 국지적 박해였으니, 이른바 을해박해(乙亥迫害)였다. 1815년 2월 하순 부활절을 맞이하여 조촐한 잔치를 벌이고 있던 노래산 교우촌에 별안간 일군의 포졸들이 달려들어 수십 명의 교우들을 체포해갔다. 김약고배도 이를 전후한 시점에 관가에 체포되었다.

 

부활절에 잡혀간 그의 동료들 중 배교를 거부한 이들은 청송 고을보다 행정규모가 큰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잡혀가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김약고배는 이와 달리, 청송의 노래산에서 잡혔으나 안동진영(安東鎭營)으로 끌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진보 고을의 머루산에서 체포된 신자들과 함께 갖은 협박과 모진 고문의 위협 속에 배교를 강요당했다. 천주교 신자들은 1801년 신유박해를 계기로 공표된 조정의 척사윤음(斥邪綸音 : 천주교를 사학으로 배척하는 국왕의 명령)에 의해 국사범(國事犯)으로 간주되고 있었으므로,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버틸 경우에는 이들 진영의 상급기관인 경상감사가 있는 대구로 이송(移送)되어 처벌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구 감영으로 옮겨진 김 야고보는 다른 신자 32명과 함께 당시 경상감사 이존수(李存秀)로부터 다시 심문을 당하면서 배교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김 야고보를 비롯하여 모두 31명의 신자들이 배교하지 않자, 감사는 6월 19일자로 형조에 보고서[장계]를 올려 이들에 대한 처리여부를 품의하였는데, 장계에서 감사는 김 야고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죄인 김약고배는 부자간에 전수하여 대대로 그 악을 이루었습니다. 또 안치룡과 김약고배 두 죄인은 모두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로서 귀로 듣고, 입으로 외워 사설(邪說)을 깊이 믿어 누차 형벌을 받았으나 죽기에 이르도록 뉘우치지 않았으니 그 요망하기가 지극함이 최봉한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일성록』순조 을해년 6월19일자)

 

김 야고보는 교리를 부자간에 전수했다는 점과 그 학습 방법이 주로 귀로 듣고 입으로 외워 익히는 구술암송의 방법이었다고 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일찍부터 가정에서 부친으로 부터 간단한 기도문이나 교리문답을 읽는 소리를 듣고, 이를 같이 따라서 읊고 외우면서 신앙심을 키워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성장한 그의 신앙심은 그 기초가 매우 탄탄하였고 또 그 자신의 남다른 학습열정 때문에, 어떠한 유혹이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건실해졌던 것이다. 일편단심으로 순교를 고대하던 김 야고보와 그의 동료들은 다시 아무런 기약도 없이 힘들고 괴로운 옥중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당시의 감옥은 추위와 더위에 무방비 상태였고 위생상태가 엉망이었다. 특히 겨울에는 차디찬 감옥 바닥에 고작해야 멍석자리 같은 것이 하나 깔려 있으면 고작이었고, 난방시설은 고사하고 감옥의 흙담은 무너지고 천장에는 눈비가 새어 들어올 정도였으니, 북풍한설(北風寒雪)에 동사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더군다나 당시의 나라 법에 의하면 죄수의 의복과 식량은 본인이 스스로 부담한다는 원칙 때문에, 가난한 죄수는 굶주리기 일쑤였고, 어쩌다가 한번씩 죄수들에게 약간의 양식이 배급되면 기근에 시달리던 하급관리와 포장, 포교, 옥쇄장이, 간수, 사령 등등에 의해서 얼마 안 되는 그 양식마저도 뜯기고 뜯겨서 결국 죄수들에게 분배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감옥에 남은 7명의 신자들은 끈질기게 버텼다. 이들은 낮에는 호구지책을 위해 부지런히 짚신을 삼았으며, 밤에는 공동으로 모여 큰소리로 기도하고 성서구절을 낭송했으며, 서로 권면하여 함께 천국에 들어가자고 다짐했다. 이러한 광경은 감옥을 중심으로 그 인근에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어떠한 사람들이기에 이처럼 광적으로 신앙에 집착하여, 옥중에서마저도 신앙생활을 계속하는가?”하고 호기심에 포졸과 간수들이 찾아와서 “천주교가 어떤 종교이며, 무슨 이익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또한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 짚신을 거두어 팔아주던 이들과 그를 통해 소문을 들은 인근 사람들도 또한 천주교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달레의 말처럼 감옥은 수형자(受刑者)들에겐 인내의 덕을 기르는 ‘신앙의 학교’였으며, 동시에 자존심 강하고 퉁명스런 ‘대구’라는 큰 도시에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의 광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아름다운 행동은 밀고자 전지수가 어떤 일로 감옥에 갇혔을 때, 굶주린 그에게 얼마 안되는 양식을 나누어 주었으며, 거의 알몸으로 옥에서 석방되었을 때 신자들이 입을 옷을 그에게 줌으로써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참다운 애덕(愛德)이 원수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모든 외교인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1816년 김 야고보와 그의 동료들이 감옥에 갇힌 지 거의 20개월이 다 되었을 때 드디어 그들에게 사형집행의 허락이 내려졌다. 임기가 차서 감사직을 떠나는 이존수가 마지막까지 중앙에 보고하여 결국 이들 천주교인들에게 사형이 내려지도록 조처를 취했던 것이다. 1816년 11월 1일의 일이었다.

 

김 야고보와 그들의 일행은 김종한 안드레아를 선두로 하여 차례로 망나니의 칼날을 받았으며 마침내 영광스런 순교의 관을 쓰게 되었다. 이들의 처형소식은 이로부터 약 일주일 후에 조정에 보고되었으니, 11월 8일자 『일성록』에 기록되었다.

 

김 야고보 등 7인의 시신은 형장 근처에 가매장되었으며, 무덤마다 묘비가 세워졌다. 그 이듬해인 1817년 봄에 친척들과 열심한 교우들이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적당한 곳으로 네 개의 무덤에 묻었다.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신앙의 교리를 배우고 자라서는 스스로 교리서와 성경해설서를 읽으면서 기도생활에 충실했던 김 야고보는 항구한 신앙심으로 온갖 고문과 협박과 박해를 이겨내었다. 또한 감옥의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어 내면서 세상에 복음의 빛을 환하게 전하다가, 마침내 그 자신은 타서 사라져버리는 한줄기 등불이 되었던 것이다.

 

[월간빛, 2002년 4월호, 원재연 하상 바울로(서울대학교 법학 21 연구단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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