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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39: 페레올 주교와 조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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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2-27 ㅣ No.2063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39) 페레올 주교와 조선으로


라파엘호, 죽음의 폭풍우 헤치고 기적적으로 제주 표착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조선 신자 11명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8월 31일 상해에서 출항해 9월 28일 제주도에 표착했다. 사진은 김대건 신부 일행의 제주도 표착을 기념해 조성된 용수성지로 바다에 보이는 섬이 라파엘호가 표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차귀도이다.

 

 

상해에서 출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와 조선 선교사 다블뤼 신부 그리고 김대건 신부와 11명의 조선인 신자들은 상해에서 귀국길에 오른다. 김대건 신부 일행이 타고 온 라파엘호의 수리도 모두 마무리됐다. 폭풍우를 만나 부러진 돛과 키는 새것으로 교체됐지만, 조선 배에 중국식 돛과 키를 단 라파엘호는 마치 한복 차림에 양복 윗도리를 걸친 양 볼썽사나웠다. 돛은 황포가 아니라 거적 여러 개를 엉성하게 꿰매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갑판도 없고, 닻이나 돛을 올리는 밧줄은 반쯤 썩은 풀로 만든 것이어서 벌써 버섯이 돋아 있었다. 배 바닥은 거적과 서로 전혀 맞물리지 않은 채 그냥 잇댄 널빤지들이 깔려 있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라파엘호를 본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우리 목숨이 이 배에 달려 있다니”라며 기함을 했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ㆍ김대건 신부는 출항일을 1845년 8월 31일로 정했다. 프랑스는 1844년 10월 24일 청과 ‘황포조약’을 맺고 프랑스인의 치외법권과 안전 보장, 교회 설립 허가 등을 받았지만, 청에서의 선교 자유를 완전히 얻지 못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유롭고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감시 대상이었다. 더욱이 상해에 불쑥 나타난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인들에 대한 경계와 감시는 삼엄할 수밖에 없었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ㆍ김대건 신부는 청 관헌들의 감시를 피해 상해를 몰래 빠져나갈 묘안을 짰다. 감시자들의 경계를 흩트리기 위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베시 주교가 생활하던 남경교구 주교관에 먼저 가 있고, 8월 마지막 밤에 김대건 신부 일행이 배를 몰고 이곳으로 와 선교사들을 태워 상해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1845년 8월 31일. 드디어 예정일이다. 해 그림자가 황포강에 길게 드리우는 저녁 무렵 라파엘호는 썰물에 실려 미끄러지듯 정박지를 빠져나왔다. 배는 양자강을 따라 조용히 주교관으로 향했다. 예상한 대로 작은 배 한 척이 보일 듯 말 듯한 거리를 두고 라파엘호의 뒤를 밟았다. 어선으로 위장한 감시선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미행을 간파했지만, 계획대로 배를 주교관 맞은편에 댔다. 그리고 배에서 내려 주교관으로 들어갔다.

 

베시 주교는 얼마 전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를 환대했다. 그는 김대건 신부에게 사목 방문 중에 아프지만 않았어도 자신도 사제 서품식에 참여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둘은 이미 친분이 있었다. 1842년 9월 세실 함장의 변심으로 뜻하지 않게 에리곤호에서 하선하게 된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최양업과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그에게 신세를 진 바 있다. 이날 김대건 신부와 베시 주교의 짧은 회우는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 됐다. 밤 10시가 지나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ㆍ김대건 신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시 주교는 라파엘호가 있는 데까지 이들을 배웅했다. 서로 뜨겁게 포옹하고 짧은 기도와 축복 속에 이별을 고했다. 이들이 배에 오르자 라파엘호는 최대한 속도를 높였다. 날이 흐린 데다가 어두워져 라파엘호는 감시선을 쉽게 따돌렸다.

 

 

중국배의 예인으로

 

라파엘호는 다음 날 해 뜰 무렵 황포강 어귀에 도착해 중국 요동으로 가는 중국 배 옆에 몸을 숨겼다. 신자인 이 배의 선주는 라파엘호를 밧줄에 묶어 산동 앞바다까지 예인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 배에는 프랑스 라자로회 몽골 선교사 페브르 신부가 타고 있었다.

 

9월 1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페브르 신부가 있는 예인선에 올랐고, 김대건 신부는 조선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출항했다. 8~9월 동중국해는 바람 방향이 남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바뀌는 때이다. 바다의 물흐름도 당연히 역풍의 영향을 받아 거칠어지고, 날씨도 바람 탓에 변덕이 심할 때이다. 두 배는 바다로 나아간 지 얼마 안 돼 폭풍우를 만나 오송으로 대피했다.

 

거친 파도로 배끼리 부딪히거나 항구 시설물에 받쳐 파손될 염려가 있어 조선 신자들은 라파엘호를 뭍으로 끌어 올린 다음 닻 2개로 단단하게 고정했다. 거센 파도는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닻줄을 끊고 라파엘호를 바다로 끌고 갔다. 떠내려가는 라파엘호를 본 영국 선원들이 소리를 치자 그제야 조선 신자들이 이를 알아채고 놀라 소스라쳤다. 파도가 너무 거세 바다로 뛰어들 수도 없었다. 신자들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기도 덕분인지 라파엘호는 파도에 휩쓸려 수많은 배들 사이로 이리 쓸리고 저리 흘러도 단 한 번 부딪히지 않고 말짱했다. 한 참이 지나서야 겨우 조선 신자들은 라파엘호를 뭍으로 끌어 올려 다시 닻으로 고정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라파엘호는 대여섯 차례 항해를 시도했으나 30, 40, 60㎞를 가는 동안 날씨가 계속 나빠져 상해 북쪽 숭명도 인근 작은 만에 다시 정박했다. 이곳에는 이미 100여 척의 배가 대피하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이곳에서 9월 17일까지 발이 묶였다. 그동안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인 9월 8일에는 다른 배의 중국인 신자 40여 명과 함께 네 명의 사제들이 각각 연이어 미사를 봉헌했다. 물론 조선인 신자 모두도 성체를 모셨다. 네 사제는 이날 아침 미사를 위해 전날 밤부터 밤새도록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줬다. 다블뤼 신부는 이날을 “정말로 기쁘고 행복한 날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보상받았다”고 회고했다. (다블뤼 신부가 1845년 10월 23일 조선 공동 교우촌에서 파리외방전교회 동료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복원한 라파엘호가 용수성지에 전시돼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죽음 대비해 고해성사

 

9월 18일 바다가 드디어 잠잠해졌다. 순풍도 불었다. 라파엘호는 예인선과 함께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라파엘호에 함께 탔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9월 21일 새벽 4시부터 풍랑이 일더니 집채만 한 높은 파도가 라파엘호의 돛을 갈랐다. 모두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배를 꽉 붙잡고 버텨야만 했다. 페레올 주교는 중국 배를 향해 “우리를 태워달라”고 소리쳤다. 위험을 감지한 예인선 선원들은 라파엘호 탑승자들을 구하기 위해 배를 가까이 대려 애를 썼다. 그때 갑자기 두 배를 묶고 있던 굵은 밧줄이 뚝 끊어졌다. 두 배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예인선은 배를 잇기 위해 세 차례나 라파엘호 가까이 와서 구명줄을 던졌으나 물살이 거세 조선 신자들은 그 밧줄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두 배는 영영 헤어지고 말았다.

 

뱃사람 출신 신자들은 라파엘호 침몰을 막기 위해 두 돛대를 잘랐다. 얼마 안 가 키조차 파도에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또 한 번 라파엘호를 탄 신자들은 조난을 당했다.

 

“험한 바다에서 돛대도 없이 키도 없이 사방에서 들어오는 물을 계속 퍼내야 하는 우리에겐 하느님에 대한 희망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이 망망대해 가운데서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다블뤼 신부의 앞의 편지 중에서) 김대건 신부 일행은 눈에 띄는 모든 배에 “우리를 산동까지 데려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들을 도우러 다가온 배는 단 한 척도 없었다. 일행은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죽음을 대비해 모두 고해성사를 했다.

 

 

바람따라 해류따라 도착한 곳

 

밤이 되자 마침내 폭풍우가 누그러졌다. 다음 날 아침에는 풍랑도 그쳤다. 신자들은 기운을 차려 자른 돛을 다시 세우고 키도 새로 만들었다. 하루 반이 걸렸다. 다행히 사흘간 날씨가 평온해 모든 게 정상화됐다.

 

9월 25일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약간 거셌지만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순풍이었다. 26일 밤 3시께 별빛 너머로 아슴푸레 섬 하나가 보였다. 섬을 발견한 이가 흥분해 모두를 깨우며 살았다고 외쳤다. 신자들은 모두 “한양에서 가까운 조선 땅”이라고 했다. 이 소리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즉시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서양 구두는 바다에 던져 버렸고 의심받을만한 모든 것을 배에서 치웠다.

 

그러나 바람은 라파엘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역풍이 다시 불어 라파엘호를 남쪽으로 떠밀어냈다. 속절없이 라파엘호는 물 흐르는 데로 실려가 작은 섬에 도착했다. 9월 28일 섬에 내려 주민들을 만나고 돌아온 한 신자는 “이곳이 제주도”라고 모두에게 알렸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2월 27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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