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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프랑스 순례: 성 오메트르의 지상에서의 집 에제크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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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7-01 ㅣ No.1126

[영원을 향하여 시간을 걷다 - 프랑스 순례] 성 오메트르의 지상에서의 집 에제크를 찾아



- 오메트르 성인이 세례를 받은 메다르도 성당의 외관.


프랑스 앙굴렘 교구의 고즈넉한 마을 베르퇴이(Verteuil)의 성 메다르도(Medard) 성당에는 오메트르 성인이 세례를 받았던 세례대가 아직 있었다. 페인트칠을 한 건지 군데군데 일어나고 있는 벽, 벽감에 모셔진 성모자상 아래로 아주 작고 낡은 세례대가 유물처럼 놓여있고, 제대에서 신자석을 향한 벽에 오메트르 신부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성당을 나오기 전 벽에 걸린 작은 그림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자그마한 향유병을 들고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있는 여인,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였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식탁에 앉아계시는데,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르 14,3.6.9). 그녀, 프랑스의 마들렌은 순례 동안 내내 곳곳에서 여정을 함께했다.


- 메다르도 성당 벽에 걸린 작은 액자.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베르퇴이를 떠나 에제크(Aizecq)에 있는 성인의 생가로 향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 같은 작은 마을. 생가로 들어서는 어귀에 ‘maison Natale St. Pierre AUMAITRE’라는 표지가 반가웠다. 거의 150년 전에 고향을 떠난 그가 이제 성인(聖人)이 되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고향 마을에 찾아오고 있다. 이역만리 떠났던 그의 흔적을 좇아 멀고 먼 대한민국에서 순례자들이 이 작은 마을을 찾아오다니 그는 여전히 살아있는 셈이었다.

 

그의 집은 정말 작고 누추했다. 몇 평 남짓 축사 같은 곳이 그가 태어나 다섯 형제자매와 자란 곳이었다. 같은 지붕 아래 칸막이 너머로 가축을 키우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 문짝도 달리지 않은 생가터 출입구. 외벽에 ‘성 피에르 오메트르가 태어난 집’이라는 표지가 붙어있다.

 

 

그 나지막한 공간에서 잠시 성인을 기억하며 ‘순교자 찬가’를 불렀다. 성가가 다 끝났을 때 함께하신 앙굴렘 주교좌성당 주임 멍귀 신부님이 거의 독백처럼 “감사합니다.”라고 되뇌었다. 신부님의 살짝 내리깐 눈빛에 언뜻 애수의 빛이 스치는 듯도 했다.

오랜 세월 ‘가톨릭의 장녀’였던 프랑스. 이백여 년 전 혼란 속에 그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렸고, 그즈음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가톨릭 신앙으로 충만해 조선으로 떠났다.

그 누추한 한 칸 집과 마구간에 서서, 마룻바닥 깔린 거실은커녕 침대 놓을 공간마저 여의치 않은 그 공간에서 터져 나온 깊고도 나직한 인사,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그 한 음절의 인사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다.

소년 오메트르는 공부를 그리 잘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천국’과 ‘하느님’에 대한 열망으로 한없이 충실한 학생이었다. 결국 신부님들도 그의 의지에 감동해 사제가 되는 길을 도왔다.

 

- 성인이 살았을 당시에는 마을의 유력 가문 성당이었다가 현재는 에제크 본당이 된 오메트르 성당. 성당 옆에 서있는 성인의 상에는 ‘성 오 베드로’라는 한글이 쓰여있다. 갓을 바닥에 내려놓은 그는 왼손을 들어 하늘을 또는 조선을 가리키고 있었다.

 

 

집이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오메트르는 학비부터 기숙사비, 의복비까지 모두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운명처럼 예감했던 일이라고 그의 성직을 받아들인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 역시 멀고 먼 전교지로의 파견은 원하지 않았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오메트르는 아버지에게 “만일 하느님의 뜻이 제가 먼 나라로 가는 것이라면, 아버지 곁을 떠나는 것이 무척 괴로운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있다.”고 편지를 썼다. 그리고 1862년 사제품을 받은 뒤 다시 소식을 전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고 찬미하게 하라고 저를 보내시는 나라는 코레, 조선입니다.”

생가를 나와 마을 성당으로 향했다. 수령이 지긋해 보이는 침엽수가 버티고 선 거대한 저택 곁에 지금은 에제크의 본당으로 ‘오메트르 성당’이라고 불리는 작은 성당이 있었다.

 

성당 안에 오메트르 성인과 관련된 자료들이 소박하게 보관되고 있었다. 제대 옆 벽에 성인의 초상이 걸려있고, 제단 앞에는 103위 성인 액자가 놓여있는 성당에서 에제크의 신자 몇 분과 미사를 드렸다.

나지막한 반원 천장 아래 우리에게 선교사를 보내준 프랑스의 신부와 이제 역동적인 교회로 발전한 ‘조선’의 한 사제가 보편의 미사를 함께 드리는 모습은 정말 보기에 좋았다. 성인도 천상에서 함께하셨을 거다.

그런데 그는 어떤 마음일까. 고향의 믿음이 상처입고 절망 중에 신음하고 피폐해진 것을 아파하실까, 아니면 조선교회가 이처럼 발전한 것을 기뻐하고 대견해하실까. 참 유치한 호기심이기는 했다.

오메트르 신부는 1863년 조선에 입국해 겨우 2년 남짓 사목을 하고 병인박해 와중인 1866년 충청남도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프랑스 땅에서 태어나 조선의 목자로서 순결한 사랑의 삶을 살다 간 성인. 성당 앞으로 난 길을 따라 에제크 마을 공동묘지에 계신 성인의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비 몇 방울 뿌리더니 완전히 화창해진 날, 정말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었다. 넓은 마당을 가진 기사식당 같은 뷔페에서 점심을 먹고 나왔다. 오후 햇빛은 뜨겁고 하늘은 멀고도 높았다. 흙먼지 이는 마당에 발을 내미니 마치 광야의 한순간 같았다.

 


* 이선미 로사 - 서울대교구 혜화동본당 신자.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 성지를 순례하다 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3년 6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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