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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김희성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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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481

대구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4)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 (1765∼1816)

 

 

지금으로부터 186년 전인 1816년의 음력 11월 1일. 양력으로 치면 12월 19일로 성탄절을 일주일도 채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빛이 암흑을 밀어내고, 양(陽)의 기운이 음(陰)의 기운을 이기며, 그래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다.’고 믿던 동짓날을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살을 에는 차가운 겨울 바람이 휘몰아치던 이 날, 경상도의 수부(首府)인 대구도호부의 관덕정 앞마당에서는 일곱 명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칼바람이 몰아쳤다. 경상감사로서의 임기를 불과 일주일 남겨둔 경상도의 도백(道伯) 이존수(李存秀)로서는 전년 봄에 붙잡은 ‘사학(邪學)의 괴수’들을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 처벌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는 작년 여름부터 몇 번이고 조정에 이들의 사형을 집행하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그때마다 조정에서는 서류가 미비하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처벌을 미루어, 내심 불만이 컸던 터였다. 생각해 보면 15년 전인 신유년에는 조정에서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사학(邪學)’에 물든 무리들을 색출하는 작업이 벌어졌고 또 그들에 대해 가차없는 엄벌이 가해졌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애써 붙잡아 처벌하고자 하여도 조정에서 오히려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1년 반이 넘도록 처벌을 늦추는 모습을 보이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자신의 줄기찬 재촉에 밀려서인지 마침내 지난 달 조정에서 사형 집행을 허가했고, 그의 임기 중의 마지막 중대 행사로 이날의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동짓날이 지나면 만물의 생기가 왕성해진다는 인식 때문에 그러한 양(陽)의 기운을 해칠 수도 있는 사형의 집행을 꺼리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깔려 있었고, 이존수 자신도 그것을 의식하여 부랴부랴 동지 이전으로 날짜를 잡았는데, 이날은 유달리 날씨가 추워, 서둘러 일을 끝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존수는 일곱 명의 죄수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요량으로 ‘사학(邪學)’을 이제라도 버릴 뜻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 같지 않게 태연한 모습을 보이며, 결연히 순교의 길을 택하겠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존수는 기어코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 이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이윽고 시퍼런 칼을 들고 설치고 있던 망나니에게 차례로 이들의 머리를 칠 것을 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1816년 12월 19일, 대구에서는 일곱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현세에서의 생을 마감하고, 자신들이 그토록 가기를 바라던 하느님 곁으로 갔다. 그리고 그 일곱 명 가운데는 김희성(金稀成)이라는 사람이 끼어 있었다.

 

교회측 사료에 ‘김경서(Kim Kieng-sie)’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김희성의 세례명은 프란치스코였다. 함께 참수치명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충청도 태생이었으나, 1801년 신유년의 대박해 이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고향을 등지고 태백산맥의 첩첩산중 영양(英陽)으로 숨어들어 살다가, 1815년 3월 안동 진영의 포졸들에게 붙잡혀 순교의 길을 택하였다. 그는 바로 신유박해 때 참수치명한 김광옥(金廣玉 : 1741∼1801) 안드레아의 아들이기도 하였다.

 

김희성은 1756년에 충청도 예산의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의 가문은 비록 양반 가문은 아니었으나, 아버지 김광옥이 면장을 지냈다는 것을 보면 제법 부를 축적하여 넉넉한 살림살이를 유지하던 가문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이름 희성은 한자로 ‘드물 희(稀)’자와 ‘이룰 성(成)’자를 쓰고 있는데, 풀이하자면 무엇인가 ‘드문 것을 이루라’는 것이 되니, 그가 가족과 친척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태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의 입교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1791년 무렵 그의 아버지 김광옥이 ‘내포(內浦)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이 무렵 아버지를 통해 입교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김희성은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 되던 해에 신유박해가 일어나 아버지가 60세를 일기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자, 가산을 모두 포기한 채 어머니를 모시고 부인, 그리고 아들 문악과 함께 소백산맥의 준령을 넘어 영양의 일월산 곧은정으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김광복(金光福)을 비롯한 몇몇 다른 신자의 가족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였다.

 

교회측 기록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나무 뿌리와 도토리로 연명하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교회 서적을 읽으며 기도와 극기로 신앙을 지켜 나갔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음으로써 신앙을 지켰다는 사실은 살아 있는 그로 하여금 더욱 강한 신앙심을 갖게 만들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에게 언제 위난이 닥쳐오더라도 꿋꿋하게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키워주었을 것이다.

 

1815년 을해년 3월, 배교자 전지수의 밀고로 안동 진영의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러 오자, 그는 아들에게 남아서 집안을 보살피라는 부탁을 하고, 집에 들러서는 아내에게 신앙을 지켜 장차 자기 뒤를 따르도록 하라고 이른 뒤 순순히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고 한다.

 

이 해에 그와 함께 영남지방에서 붙잡힌 천주교 신자로는 봉화 우련전의 김종한 안드레아, 청송 노래산의 고성대, 고성운 형제, 진보 머루산의 김시우 알렉스 등 모두 71명이나 되었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51명은 수차례에 걸친 관헌의 혹독한 고문과 회유에 무릎을 꿇어 배교하여 석방되었고, 김시우 알렉스를 위시한 13명은 신앙을 지키다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남은 7명이 20여 개월의 옥살이 끝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김희성은 죽는 순간까지 신앙을 증거하며 칼날을 받은 바로 그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김희성 등이 순교한 을해박해는 이전의 신유박해 때처럼 전국적인 규모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경상도 지방에만 한정하여 박해가 일어났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신유박해 때와는 달리, 박해의 배경에 조정 내의 권력다툼이 개재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서 실권을 쥐고 있었던 안동 김씨의 세도 가문은,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던 남인 시파를 미워하고, 그들을 정계에서 제거하기 위해 신유년에 정략적으로 천주교 박해를 일으켰던 노론 벽파 계열이 아니라,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정책을 폈던 정조의 유지를 계승하려는 시파 계열에 속하였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경상감사 이존수의 천주교 신자 적발 소식을 전해 듣고서도, 과거처럼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확대시킬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바로 이 때문에 1815년 을해년에 경상도 지역에서 붙잡힌 천주교 신자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수했기 때문에 탄압을 받고 순교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신앙의 강약에 관계없이 애초부터 죽임을 당하기로 계획되어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배교하고서 석방되어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경상감사 이존수는 수차에 걸쳐 이들을 협박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하면서, 배교할 것을 종용하였다. 내세에 관한 신념이 없던 그로서는, 붙잡힌 천주교 신자들이 왜 끝까지 아까운 목숨을 스스로 버리려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희성을 비롯한 일곱 명의 천주교 신자들은 그 질긴 삶의 유혹을 물리치고, 순교의 칼날을 미련없이 받아들였다. 그들에게는 이존수가 갖고 있지 못하던 것이 있었으니,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포를 안겨다준다. 김희성과 함께 붙잡혔다가 배교한 수많은 사람들도 바로 그 공포를 이겨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삶의 유혹을 물리치면서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실로 드물다. 김희성은 바로 그 드문(稀) 일을 이룬(成) 분으로, 오늘날의 우리 신자들이 공경해야 할 신앙의 선조인 것이다.

 

[월간빛, 2002년 3월호, 강종훈 요셉(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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