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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고성대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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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480

대구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3) 고성대(高聖大) 베드로(?∼1816)

 

 

‘성일’이라고도 불린 고성대 베드로는 고성운 요셉과는 형제간이었다. 나라의 기록인 『일성록』에 의하면 그가 고성운 요셉의 형인 것 같으며, 그의 집안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고향인 충청도 별암(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에 살 때였다고 전한다.

 

당시 충청도 내포 지방인 덕산 고을은 충청도 사도인 이존창 루도비꼬의 전교에 의해서 한국 천주교회 창립 때에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다. 그의 부친과 가족 모두도 그때 천주교에 입교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1791년 제사 문제로 일어난 신해박해 때 충청도 지방에도 거센 박해가 불어닥쳐서 공주 감옥에서 풀려 나온 이존창 루도비꼬는 흥산 고을로 옮겨갔다가 몇 년 후, 다시 금산으로 옮겨갔으며 1795년 경 전라도 고산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인 1794년 12월 말,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가 한영익의 밀고로 서울에만 머물러 있지 못하고 여기 저기로 옮겨 다니게 되었는데, 1795년 6월 이후에는 위험 중에도 여주, 공주, 고산, 남포, 내포, 온양 등지로 숨어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에 따라 이존창이 전라도 고산으로 옮겨갔는데, 그때 고성대, 고성운 형제도 함께 고산으로 옮겨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고성대 베드로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과격하여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하였다. 그러나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부터 신자의 본분을 잘 지키게 되었으며, 부모에 대한 두 형제의 효심 또한 지극하였다. 그리하여 부친이 병으로 8개월 동안 누워 있을 때도 두 형제는 날마다 아버지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를 바쳤다.

 

그뿐 아니라 형제가 서로 합심하여, 성서를 읽고 남을 권면하는데 부지런하여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고성대 베드로는 혼인을 하지 않고 평생 동정으로 살았다. 이렇게 그들이 벽촌인 고산 땅 저고리(전북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에 와서 자리를 잡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처음 서울에서 시작한 대박해는 삽시간에 서울, 경기 지방과 충청도, 전라도 지방으로 번져 나가서 30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때 고성대 베드로도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는데, 그는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처음에는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목숨을 건져야겠다는 유혹에 빠져서 순간적으로 배교를 하고 석방이 되긴 했지만, 그후 그는 배교한 것이 몹시 후회스러웠다. 잠시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그에게는 참으로 어리석고 원통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쳐 “이 큰 죄를 보속하려면 칼을 맞아야 마땅하다.”고 자주 말하면서 순교할 각오를 단단히 굳혀 나갔다.

 

이 박해가 끝난 후에 그와 그의 형제들은 경상도 땅 청송 노래산으로 옮겨 갔다.

 

신유박해 때 경상도 지방은 다른 지방에 비해서 박해의 손길이 훨씬 뜸했는데다가, 청송 노래산은 경상도 동북부 태백산맥의 높고 깊은 산악지대여서 임진왜란 때 유성룡 재상의 형인 유운용이 병법을 단련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그 당시 박해를 만난 우리 신자들은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인 깊은 산골이나 큰 강가의 황무지로 피난을 많이 갔었는데,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과 진보 머루산, 일월산중의 봉화 우련전과 영양의 곧은정은 모두 다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기도 했던 곳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형제들이 청송 노래산으로 피난 온 후부터는 충청도 등 다른 곳에서 피난 온 신자들과 함께 새로운 신자촌을 이루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첩첩산중 높은 산꼭대기의 분화구처럼 생긴 펑퍼짐한 산지에서 화전(火田)을 일구어 농토를 만들고, 씨앗을 뿌려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는 외부와는 거의 관계를 끊은 채 신자들끼리 자급자족을 하였다. 다만 생선이나 고기를 팔러오는 행상들이 가끔 이 깊은 산골의 외진 신자촌을 찾아올 뿐이었다. 그리고 천주교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부근의 외교인들도 종종 찾아왔었다.

 

그런데 당시 노래산 부근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제주 고씨(濟州高氏)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혹시 그들과 어떤 교류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렇게 신자들이 15년 동안 신앙공동체를 이루어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 뜻밖에도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났다. 을해박해에 앞서 1814년에 무서운 기근이 전국적으로 엄습하였는데, 특별히 경상도 지방에는 큰 홍수가 나서 전답이 떠내려가고 가옥 500∼600호가 소실되는 등 그 피해가 매우 컸다. 그 결과 그해 가을부터 추수할 곡식이 없어서 사방에는  굶주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렇듯 큰 흉년이 들면 외교인들이 사는 일반 부락에는 천주교인들의 신자촌보다 훨씬 더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천주교인들은 얼마 안되는 적은 양식이지만 그것을 공동 소유로 하여 조금씩이라도 서로 나누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전부터 이 신자촌을 드나들면서 고기 장사를 하며 반 걸인 행세로 구걸하던 전지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흉년이 들자 더욱 자주 이곳 신자촌으로 찾아와서 반 강제로 애긍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구걸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자 전지수는 신자촌을 관아에 밀고하였고, 전지수의 밀고로 고성대 베드로와 동생 고성운 요셉(월간 ‘빛’2002년 1월호 참조) 등 모두 체포되어 청송의 상부 관청인 경주 진영(慶州鎭營)으로 압송되어 갔다. 나라의 기록인 『일성록』에 의하면 이때 함께 체포된 신자는 약 40여 명이었다고 적고 있다.

 

한편 경주 진영에 이송된 신자들 중에는 고문에 못이겨 18명의 신자들이 배교를 하여 석방되었고, 아직 조사할 것이 있다는 연유로 7명은 경주 진영의 감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고성대, 고성운 형제 등 14명은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여 다시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리하여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과 우련전, 곧은정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이송되어 온 신자 수는 모두 33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또다시 감사 앞에서 형문(刑問)을 받아야 했다. 이때도 고성대 베드로는 항구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나라의 기록인 『일성록』1815년 10월 18일자 기록에 의하면 ‘고성대, 고성운 형제는 사악하고 요사하여 서로 악을 이루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와 함께 감옥에 갇혀서 문초를 받고 있던 신자들은 그해 10월 18일, 끝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신자들은 임금으로부터 사형집행의 재가가 내려오지 않아서 계속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를 비롯한 우리 신자들은 조금도 괴로워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옥 안에서 낮에는 짚신을 삼고 밤에는 등불을 밝혀 모두 함께 성서를 읽으며 큰 소리로 공동 기도를 드렸다. 그들 모두는 서로 다투는 일 없이, 욕설이나 짜증 한마디 없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다.

 

이렇게 그와 우리 신자들이 착한 표양을 보이자, 처음엔 몹시 멸시하고 미워했던 경상감영의 포교들과 대구 토민들이 탄복을 하고, 감옥 안에서의 신자들의 착한 공동체 생활 모습을 보기 위해 방문하였을 정도였다. 우리 신자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오히려 보수적이며 양반 고을인 경상도 지방에 널리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와 다른 동료들은 20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나라에서 사형 집행의 허가가 내려지자, 1816년 11월 1일(음력)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치명을 당하였다. 이때 맨 먼저 신자들의 지도자였던 김종한 안드레아가 참수치명을 당하고, 이어서 남자들 4명이 차례로 순교했으며 나머지 여자 2명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의 칼을 받았다. 한편 7명의 순교자들이 순교를 하자, 관장의 명령으로 순교자들의 시신을 형장 근처에 정성스럽게 매장하고, 그 위에 흙을 얇게 한 켜 입혀 무덤마다 묘비를 세워 주었다.

 

그 이듬 해인 1817년 3월 4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던 친척과 신자들이 이들의 시신을 다른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 할 때, 갑자기 시체들이 묻혀 있던 읍내쪽이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이면서 하늘이 내려 않은 듯하였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등불을 켜도 그저 일꾼들이 일 할 만한 빛을 낼 뿐, 거기에서 조금만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그들을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시체를 발굴하자, 시체는 온전하게 남아 조금도 썩지 않아서 숨을 거둔 지가 얼마 안 되는 것 같이 보였다. 무덤을 파헤쳤을 때, 모든 시체에서 냄새가 조금 나던 것도 땅 위로 나오자 이내 가시었다. 옷가지도 잘 보관되어 있었고 습기조차 차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모든 교우들이 감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순교자 고성대 베드로는 어릴 때는 성격이 난폭했으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영향으로 양순한 성격으로 변하였으며 효심도 지극하였다. 또한 기도생활에 열심하고 동정을 지키며 남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던, 한 사람의 훌륭한 신앙인으로서 순교의 영광을 받은, 우리가 공경해야 할 순교자이다.

 

[월간빛, 2002년 2월호, 마백락 클레멘스(영남교회사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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