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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40: 제주 표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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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3-09 ㅣ No.2065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40) 제주 표착


제주 표착 확인 후 바로 조선 본토로 항해

 

 

김대건 신부 일행은 1845년 9월 28일 제주도에 표착했다. 사진은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을 맞아 2021년 3월 12일 차귀도에서 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 주례로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재현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라파엘호 제주 표착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ㆍ김대건 신부 그리고 조선 신자 11명이 탄 라파엘호는 1845년 9월 28일 제주도에 표착했다. 아쉽게도 라파엘호에 있던 그 누구도 표착 장소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지 않아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해류에 따라 라파엘호가 표류했을 제주 서쪽 바다에는 비양도, 차귀도, 가파도 세 섬이 있는데 비양도에는 19세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주민이 거주하고 있고, 차귀도에도 19세기 중반까지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차귀도와 마주하는 용수 포구에 제주 서부 지역에서 배를 수리하는 유일한 조선소가 있었다고 한다. 제주교구는 이러한 지리 환경 조건과 학자들의 항해학 연구 고증을 기반으로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용수 포구에 김대건 신부 표착 기념지를 조성하고 성지로 선포했다.

 

이후 라파엘호의 제주 표착과 관련한 여러 연구 글에 김대건 신부 일행이 차귀도와 용수 포구에 상륙했다고 단정적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글을 정리하면, 김대건 신부 일행이 표류 중에 한라산 정상을 보고 차귀도에 표착했고, 김 신부가 라파엘호에서 내려 주민들에게 물어 이곳이 제주도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배를 용수 포구 조선소에 끌고 가 며칠간 수리를 하고 물과 음식을 준비해 한양을 향해 다시 출항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증명이 안 된 것이 혼재된 글이다. 역사적 사실은 김대건 신부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했고, 그곳이 제주도인 것을 확인했으며, 이후 그곳을 떠났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추측성 글이다. 제주 표착과 관련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ㆍ김대건 신부 글 어디에도 김대건 신부가 주민에게 물어 제주도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배를 수리하고, 음식을 준비했다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편지에는 복수형으로 “우리가 섬에 내려 주민들부터 상륙한 곳이 제주도라는 것을 알았다”며 여러 사람이 뭍에 내린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또 두 선교사는 제주도를 떠나 육지를 향해 항해하면서 배 바닥에 물이 새어들고, 닻줄이 썩고 닳아서 끊어질까 봐 걱정하며, 이로 인해 또다시 표류하다 좌초되거나 체포될까 봐 두려워했다고 밝혔다. 라파엘호를 용수 포구 조선소에서 수리했다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파엘호는 제주도로 표류하기 전 이미 선원 출신의 조선 신자들에 의해 닻과 키를 수리했었다. (페레올 주교가 1845년 10월 25일 강경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바랑 지도 신부에게 보낸 편지, 다블뤼 신부가 1845년 10월 23일 충청도 공동 교우촌에서 동료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 김대건 신부가 1845년 11월 20일 서울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참조)

 

또 라파엘호가 제주도에 표착하기 석 달 전인 1845년 6월 25일 영국 군함 사마랑호가 우도에 정박한 후 제주도 연안을 측량하고 7월 15일 떠났다. 사마랑호는 이후 거문도와 다도해 일대를 수심을 측량하고 다시 우도로 돌아와 7월 말께 일본으로 갔다. 이 일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해안 경비가 강화됐고, 한양으로 들어오는 모든 배를 엄격하고 세밀하게 검문했다. 영국 군함이 제주도를 떠난 지 얼마 안 돼 서양인 선교사 둘을 태운 정체불명의 배가 표착했는데 그 사실을 안 주민들이 잠잠했을 리 없다. 상식적이라면 해안 경비병이나 관가에 신고해 라파엘호를 검문했을 것이다. 더욱이 이 시국에 배를 포구까지 끌고 가 조선소에서 수리했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에는 “그들은 1845년 9월 27일에 제주도를 발견하고는 그날 밤 혹은 다음 날 아침에 ‘자신들의 선교지에 왔다’는 기쁨에서 감사의 기도와 미사를 봉헌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를 폭넓게 해석한다면, 죽도(차귀도)와 용수 포구를 포함하는 제주도의 서쪽 해안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로 서품된 김대건 신부, 오랜 노력 끝에 조선에 입국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성 다블뤼 신부가 처음으로 미사와 기도를 봉헌한 한국 천주교회 사적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57쪽)고 밝히고 있다.

 

이 단락은 역사적 사실과 함께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기념 성지에 관한 사목적 판단을 담아 놓은 글이라 이해할 수 있다.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한국 교회 순교 성인들을 현양하고, 이 성지를 순례하는 모든 이에게 이곳 성지가 지닌 의미를 새기고 묵상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사목적 배려가 드리운 설명인 것이다.

 

정경으로 성경을 읽는 것과 역사와 문헌, 신학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완전히 다르듯이 교회 사적지와 관련된 글 역시 관점에 따라 문맥(context)을 살펴 읽고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 글에는 신앙과 신심에 기반을 둔 거룩한 의미와 가치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는 일은 학문적 연구 성과와 함께 사목적 배려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주지주의를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학자들과 연구자들의 글은 논거에 따라 담백하게 쓰여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 성지와 순례지, 사적지 조성과 관련한 순교자 행적 연구에 있어 여러 견해가 충돌하는 것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제주에서 다시 뱃길에 올라 본토로 향했다. 가톨릭평화방송 제작 드라마 ‘성 김대건’ 중에서. 가톨릭평화신문 DB.

 

 

제주 떠나 강경으로

 

제주도는 김대건 신부 일행을 태운 라파엘호가 육지로 쉽게 빠져나가도록 두지 않았다. 제주도는 용암이 바다로 흘러들어 해안선을 이루었기에 창칼의 끝처럼 뾰쪽한 암초들이 온 섬을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해안선 앞바다를 ‘걸바당’이라고 한다. 아무리 작은 배라도 수심이 얕은 곳에 잘못 들어가면 암초에 부딪혀 부서지기 일쑤다. 다블뤼 신부는 “모든 섬 사이에 암초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에 있는 암초들을 모두 밀어내 주셨다. 한 번은 우리가 가는 길의 암초 중 하나가 바다 표면과 같은 높이로 있어서 우리가 방향을 크게 바꾸지 않는 한 다른 길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위의 편지 참조)고 설명했다.

 

조선 시대 제주 사람들은 육지로 나갈 때 주로 화북포(禾北浦)와 조천포(朝天浦)를 이용해 추자도나 소안도를 거쳐 전라도 영암 이진포(梨津浦), 해남 관두포(館頭浦), 충청도 강진 남당포(南塘浦)로 갔다. 제주도와 추자도 사이에는 대화탈도(大化奪島)와 소화탈도(小化奪島)가 자리하고 있다. 1702년 부임한 제주 목사 이경상의 「남환박물」에는 “이 두 섬 사이에는 해류가 교류해 파도가 세차게 일어나서 배들이 많이 표류하고 침몰하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이 매우 고통받는다”고 적혀있다.

 

해류를 따라 표류해 제주도에 표착한 라파엘호는 육지로 가기 위해 맞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거슬러 항해해야 했다. “북동풍은 거의 멈추지 않았다. 완전히 역풍인데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는 본토를 따라 수없이 많은 섬 가운데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맞바람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루에 4~8㎞는 앞으로 나아갔다. 어떤 때는 전혀 나가지 못하기도 했지만. 이런 식으로 보름이나 지나갔다.…우리의 형편없는 배로 더 올라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데에 낙심하고 이 항구에서 상륙하기로 했다.…우리는 상해에서 출발한 지 6주 만인 10월 12일 주일 저녁 8시에 배에서 내렸다.”

 

이처럼 다블뤼 신부는 1845년 10월 23일 충청도 공동 교우촌에서 동료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주도를 떠난 지 보름이 지난 10월 12일 강경에 상륙했다고 밝힌다. 역산하면 9월 28일 제주도를 떠났음을 알 수 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제주도 서쪽 어느 곳에 표착한 후 그곳이 제주도임을 알고 그날 바로 육지를 향해 출발한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3월 6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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