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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고성운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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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479

대구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2) 고성운(高聖云) 요셉(? - 1816)

 

 

고성운 요셉은 고여빈이라고 불리웠으며, 신유박해 이전에는 덕산 고을 별암 마을(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살았다. 충청도 지방은 내포의 사도라고 불려지는 이존창(단원) 루이공사가에 의해 신앙이 전파되었으며, 신유박해 이후에 덕산리 출신의 장 마디아가  순교한 것을 보면 고성운 요셉이 살았던 곳에도 일찍이 가톨릭 신앙이 전파되었던 것 같다.

 

달래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의 기록에 의하면 부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성정(性情)이 착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아버지가 병으로 누워 계신 8개월 동안 날마다 아버지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드렸다는 것으로 보아 뛰어난 효성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고 본다. 특히 기도생활과 성서를 읽고 권면하는데 부지런하여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는 것은 순교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신앙생활의 모습이라 하겠다.

 

신유박해 이후에도 충청도 교우들은 교회부흥을 위해 여러 마을의 교우를 찾아다니면서 등사한 교리서를 나누어주고 신덕을 북돋움에 힘썼다. 이로 인해 다수의 신자들이 붙잡혀 순교하게 되고, 이 지방에서 몰려난 교우들은 소백산맥의 큰 고개를 넘어 경상도 지방으로 들어가서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고성운 요셉도 형 고성대 베드로와 함께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에 형성된 청송 노래산(청송군 안덕면 노래 2리) 신자촌으로 이주하였던 것이다.

 

1814년의 추수는 거의 수확을 거둘 수 없어 일찍이 사람이 겪은 기억이 없을 만큼 무서운 기근이 전국을 엄습하였다. 추수하였던 얼마 안되는 곡식은 겨울 동안에 모두 소비되고, 봄이 오자 나라안 전체가 참혹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 중에서 경상도가 가장 처참하였는데, 경상도는 흉년에다 수재까지 겹쳐 이미 굶어 죽은 사람이 많고 남은 사람도 봄에는 다 굶어죽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경상도 지방의 대기근으로 신자촌을 다니며 구걸하던 전지수라는 자가 있었는데, 교우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동량을 주었으며, 또 그들의 곤궁한 처지에 비해서 아마 많은 동량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가진 것이 모두 바닥이 드러나 애긍이 줄어드니 전지수는 구걸을 받는 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교우들을 밀고하여 재물을 약탈하려고 생각하였다.

 

또한 포졸들도 꽤 많은 노략질을 할 수 있다는 탐욕이 동하여 1815년 2월 22일(음력) 부활대축일, 교우들이 큰 소리로 경문을 합송하고 있을 때 노래산 신자촌을 급습하였다. 박해를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교우들은 너무도 의외여서 처음에는 도둑들이 쳐들어오는 줄 알고 몸이 날쌔고 기운이 센 고성운 요셉의 지휘아래 힘으로 대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관청에서 파견된 포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곧 모든 저항을 그치고 고성운 요셉조차도 어린 양같이 양순하여져서 제일 먼저 포승을 받았다.

 

그리하여 청송의 상부관청인 경주진영으로 이송되었다. 경주에서는 고문과 굶주림으로 많은 신입교우들이 배교하였으나 신앙을 끝까지 증거하며 주림과 고문에도 쓰러지지 않은 신자들은 오래지 않아 경상도 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여기에서도 배교하라는 감사의 유혹을 물리치고 항구히 신앙을 고수하였다. 경상감사 이존수는 1815년 6월 19일자 장계에서 “고성운 등은 어리석고 무식하여 배운 것이 십계라고 하였으며, 외우는 것은 몇 구절에 불과했으나 오히려 더 깊이 미혹되어 뉘우칠 줄 몰랐습니다. 혹 엄중한 형벌을 주기도 하고 알아듣도록 타이르기도 했으나, 끝내 뉘우치지 않고 한 번 죽기로써 스스로 작심함에 완고하기가 목석과 같으니 그 죄상은 용서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고 한 것으로 보아 고성운 요셉의 불굴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경상감사 이존수는 법절차에 따라 인근고을의 수령들을 참핵관으로 하고 또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재차 심문하였다. 이 과정에서도 다수가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며,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하지만 고성운 요셉은 경상감사의 회유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굳세게 신앙을 증거하였으며, 형조에서도 그가 사악(邪惡)에 물들었으므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주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고성운 요셉은 1815년 10월 18일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1816년 10월 21일에 형 집행명령이 내려졌다고 『일성록』은 전한다.

 

고성운 요셉은 청송에서 체포된 이 후 약 20개월 동안의 힘든 옥중생활을 용감히 이겨내고 1816년 11월 1일 관덕정에서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달레에 의하면 관덕정 형장에서 김종한 안드레아가 처음으로 나졸이 휘두른 10차례의 칼날에 처형되는 것을 본 고성운 요셉이 사형집행인에게 “조심해서 내 머리는 단번에 자르도록 하라.”고 일렀다고 읍내 증인들의 증언을 전한다고 하였다. 이를 볼 때 고성운 요셉의 순교에 대한 강한 원의(願意)를 엿볼 수 있고,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처참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본다. 그의 시신은 같은 날 참수, 치명당하였던 다른 6명의 순교자들의 시신과 함께 관장의 명령에 따라 포졸들에 의하여 형장 근처에 정성스럽게 매장되었다가 후에 친척들과 교우들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져 무덤 네 개에 함께 묻혔다.

 

순교자는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기꺼이 바친 사람이며, 또한 신앙에 대한 진리를 오직 자기 생명으로써 보여주는 순교자들의 순교는 신앙의 직관이며 기도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순교자는 인간적으로 위대한 존재이지만 신앙적으로도 마땅히 공경의 대상이 되는 분들이다. “순교자는 그리스도교인의 씨앗이다.” 라고 한 것같이 대구대교구 신앙의 뿌리는 고성운 요셉과 같이 이 곳 관덕정에서 순교하신 신앙 선조들에게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월간빛, 2002년 1월호, 이경규 안드레아(교수, 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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