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1 ㅣ No.878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국문 초록

 

본 연구자는 2014년에 시복된 124명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연구자는 그들이 당시 사회 구조 안에서 천주교의 참된 가치를 발견했고, 이를 삶으로 드러내고자 노력했던 분들임을 확인했다. 또한 그들의 삶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실천에서 나온 결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영성은 박해 중에도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희망하면서 극기와 절제의 생활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깊은 관심을 가지도록 이끌었음이 드러났다. 결국 그들이 보여준 삶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에서 비롯되었고, 천주교 교리에 대한 실천에서 나온 것임을 증명했다.

 

또한 순교자들이 지닌 내면의 가치는 외양으로도 드러났음을 살펴보았다. 이들이 보여준 외양은 재화의 나눔, 공동체적 신앙생활 그리고 개인적 순결에 대한 지향 등을 통해 확인했다. 그리하여 순교자들은 당시 불합리한 유교적 신분질서나 남녀 차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며, 존엄한 존재임을 깨닫고, 이를 생활 안에서도 구체적으로 증명하고자 노력했던 분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순교자들이 보여준 행동은 순교자들이 가지고 있는 순교 인식에서 비롯되었음을 확인했다. 또한 이들이 보여준 순교 인식에는 계명 실천에 대한 철저성에 있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순교자들은 순교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르는 행위로 보았음을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순교자들은 체포된 이후 신앙과 배교의 양자택일을 강요받을 때에 순교의 길을 선택했음을 증명했다.

 

또한 순교자들이 추구한 완덕의 삶은 결국 순교를 향한 열망으로 드러났음을 확인했다. 특히 연구자는 순교자들이 가진 순교 열망의 근원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째 그들의 순교 이면에는 하느님 개념이 분명했고, 둘째 그들은 순교 자체를 하느님의 부르심이자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순교를 각오하고 믿었음을 본 본문을 통해서 확인했다.

 

 

1. 들어가는 말

 

조선 후기 19세기를 전후한 때에 교회사에서는 적지 않은 순교자들이 출현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사학도(邪學徒)이며, 동시에 일종의 정치범으로 인식하여 사형에 처했다. 이 순교자들 중 2014년에 124명이 시복(諡福)되었다. 이들의 순교 과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연구된 바 있으나, 이들의 삶과 영성을 밝히려는 노력은 아직 미진한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124명의 복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19세기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밝혀 그들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이 글의 전개 방식은 그들의 삶과 영성을 나누어 밝히기보다, 영성의 일반적 개념을 기초로 삼아, 그들의 삶을 통한 영성의 특성을 확인할 것이다.

 

순교자의 영성을 이해하려는 작업은 영성(靈性, Spirituality) 내지 순교 영성에 대한 일반적 개념의 확인에서 시작된다. 영성의 개념에서 일컫는 ‘영’(靈, Spirit)은 살아있고, 사랑하며, 창조하는 하느님의 인격적인 능력이다.1) ‘영’을 부여받은 인간은 영성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고 성취해 나간다. 이러한 영성은 인격적 하느님과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초월적(超越的) 본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깨닫고 그 삶을 본받을 수 있다.

 

영성은 또한 삶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므로 영성 생활이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향주삼덕(向主三德)을 통해 완덕으로 나아가는 노력’이다. 즉, 영성의 구체적 내용은 향주삼덕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영성 생활은 향주삼덕의 실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다.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느님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 22,37-39)는 사랑의 삶이며,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순교의 삶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히 연결되어 분리될 수 없는 계명이다.3) 이것은 결국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며, 순교자들의 영성은 이 일치를 통해서 검증된다.

 

그리고 순교 영성의 개념은 앞서 언급한 영성에 관한 일반론을 기초로 규정할 수 있다. 즉 순교 영성은 ‘신도들이 일상생활에서 신망애 삼덕의 구현인 완덕을 지향하여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증거하고, 박해 앞에서 죽음이라는 결과를 예상하면서도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완덕을 추구하는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다.4) 순교 영성은 일상생활 가운데 신망애 삼덕의 실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증거하고, 마지막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이를 견지하려는 자세를 말한다. 그리고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한국을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는 124명의 순교자들이 이와 같은 ‘순교 영성’을 실천했던 사람임을 언급해 주었다.

 

순교 영성을 밝히려는 노력은 이미 선행 연구들을 통해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한 초기 연구 중,5) 일부는 대체적으로 영성의 개념에 대한 규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6) 한편, 기존의 주요 연구는 당시 순교자들이 가지고 있던 영성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특정 순교자 개인의 영성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7) 이 글도 개인 영성을 연구한 기존의 선행 업적들을 통해서 시사받은 바 크다.

 

그러므로 이 글은 124명 순교복자들의 삶을 통해서 그들의 영성을 검증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순교 영성을 좀 더 종합적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순교 영성에 대한 보편적 개념의 이해를 전제로 하여 순교자들이 가지고 있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그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완덕 추구의 실상을 고찰하겠다. 이어서 박해 시기 동안 그들이 간직하고 있었던 순교에 대한 열망과 함께, 그들의 일상생활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표출시켜 나갔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및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의 연대기 자료와 《사학징의》(邪學懲義),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등 신문 기록류 자료를 기본 사료로 삼는다.8) 그리고 이만채(李晩采)의 《벽위편》(闢衛編)도 함께 살필 것이다.9) 또한 교회 측 기록인 달레(Dallet, 1829~1879)의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10) 다블뤼(Daveluy, 1818~1866)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Notices des Pricipaux Martyrs de Coree)도 주요 사료가 되었다.11) 한편, 조선인 순교자들이 기록한 윤지충의 <공술기>나 이도기(1743~1798)의 <정산일기>, 이순이의 <옥중서간>, 황사영(1775~1801)의 <백서>(帛書), 정약종의 《주교요지》(主敎要旨) 등도 주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이 글은 조선 교회 순교자들 전체의 삶과 영성을 충분히 담아내지를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논문은 순교의 시대를 살았던 신자들의 영성을 밝히는 데에는 조금의 도움은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순교자들의 영성에 대한 좀 더 완벽한 이해를 위해서는 19세기 조선 순교자 개개인의 삶과 영성에 대한 심화된 연구와 함께 그 순교 영성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려는 작업도 병행해야 할 과제로 본다.

 

 

2. 순교자의 완덕 추구

 

순교 영성의 중심 요소로 신망애 삼덕의 실천을 통한 완덕의 추구를 들 수 있다. 124명 순교자들의 영성도 그들이 수행했던 완덕 추구의 상황을 규명함으로써 확인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순교자들이 ‘천주교적 완덕’을 이해하는 데에 전제가 되는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이 보여준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하느님 신앙 안에서 믿음, 희망, 사랑의 실천인 완덕을 가능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12)

 

사실 박해 당국자들은 대부분의 천주교 신자들을 무지한 백성들, 무식한 아녀자들로 규정했다. 그래서 당국자들은 천당지옥설을 주장하는 천주교는 사교(邪敎)이며, 그 교리는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13) 또한 신분제를 무시하고, 통화통색(通貨通色)을 하는 무리이며, 세상의 변혁을 바라는 사람(思慾變世者)이라고 규정했다.14) 이는 척사론의 연장에서 천주교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린 결과였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천주교는 결코 사교가 아니며, 오히려 진정한 길이고, 정학(正學)이며, 정도(正道)요, 경천외천(敬天畏天)의 학문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천주교는 ‘참된 길이요 참된 교리’이고, ‘참된 종교’이며, ‘그리스도교를 실천할 뿐’이라고 당당히 말했다.15) 그들은 천주교가 말하는 학문의 종지(宗旨)는 하느님을 존경하며 높이 받드는 것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것을 따른다고 말했다.16)

 

또한 순교자들은 천주교의 근본은 하늘에서 나오며, 동시에 모든 사람을 위한 것으로 인식했다. 하느님 안에서 모두가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을 관장에게 주장했다.17) 그리고 그들은 천주교를 마음과 행실을 다스리는 공부로 생각하거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약으로 보았다.18)

 

사실 순교자 중에는 양반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박해 당국자가 규정했던 바와 같이 ‘무식한’ 비특권 계층인 민인들이었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이와 같은 진술은 그들이 단지 천당지옥설에 현혹되어 사학인 천주교를 믿었던 것만은 아니었음을 분명히 해 주고 있다. 그들은 완덕의 구성 요소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일상생활을 통해서 실천해 갔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영성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순교자들이 추구했던 신망애 삼덕을 실천하여 완덕을 추구하던 과정에서 우선 ‘믿음’[信德]의 사례를 간략하게 확인해 보고자 한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천지 만물보다 높으신 최상의 천주(天主)이며 주재자(主宰者)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보존하시는 분으로 보았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첫째 아버지이며, 우리 부모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며, 동시에 우리에게도 생명을 주신 분으로, 대군대부(大君大父)이고, 효성과 충성의 진정한 원천으로 믿었다. 그들은 하느님만이 ‘인간 영혼의 주인’이며, ‘참된 스승’으로서 언제나 인간에게 ‘당신의 명령을 알려 주시는 분’으로 이해했다.19)

 

순교자들이 보여준 믿음의 삶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함께 부모에 대한 효성(孝誠)과 임금에 대한 충성(忠誠)도 함께 고백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고백하는 효성과 충성의 근거를 ‘천주십계’(天主十戒) 중 4계명에 두었다.20) 그들은 박해 당국자로부터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이단사설을 신봉하는 자(者)’라는 말에 대항하여, 자신들은 대군대부이신 하느님을 믿으며, 그 믿음으로 부모와 임금에게 효를 다한다고 고백했다. 또한 박해 당국자들이 천주교 신자들이 ‘불효하는 무리’임을 지적했을 때에도 그들은 또다시 십계명을 들어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였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음을 증명했다.21) 그리하여 신문 중에 관장은 순교자들이 보여준 효심에 감동하는 경우도 있었다.22)

 

향주삼덕은 믿음에 이어서 희망[望德]도 완덕의 추구 과정에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삶만큼이나 희망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참된 희망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확신했고, 그 희망을 통해 자신들이 존재 의식을 강화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국은 원래 내가 있던 자리며,23) 돌아갈 고향(故鄕)이고,24) ‘상’(償)과 ‘벌’(罰)이 주어지는 곳으로 보았다.25) 이러한 믿음으로 그들은 박해의 고통에도 끝까지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다.

 

또한 순교자들은 하늘나라가 현세의 고통을 인내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곳이며,26) 착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약속된 보상이 있는 곳으로서,27) 하느님 안에서 다시 만나는 곳으로 생각했다.28) 그들은 희망을 통해 하늘나라를 세상의 영광보다 더 큰 행복을 누리는 곳으로 생각했고,29) 그곳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마중을 나갈 수 있으며,30) 의인(義人)들과 천국 성인들 함께 친구가 되어, 완전한 복락을 누린다고 믿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삶의 이유를 천국, 혹은 내세에만 두지 않았다. 그들은 참된 희망을 간직하면 할수록 현실의 삶을 보다 더 충실히 살았다. 그랬기 때문에 순교자들의 의식 속에는 신앙인으로 덕을 쌓기에는 지금 현세의 시간이 길지 않음을 알고 있었고,31)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었다.32) 하지만 그러한 여건 속에서 황일광의 진술에서처럼33) 순교자들은 천국을 갈망하는 신앙인답게 현세의 삶도 충실히 살았다.

 

이처럼 순교자들이 보여준 ‘희망의 삶’은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갈 이유를 제시해 주었다. 그들의 인식에서 현실 삶은 순교를 준비하는 도량(道場)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상은 살아있는 동안 이웃에게 헌신적인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는 친교의 장이었다. 그들이 간직했던 ‘희망’의 종착점은 천국 본향이어서, 매 순간 하느님을 갈망하며 살았고, 이 희망은 박해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이 희망은 박해 중에 자신도 비록 가난했지만, 함께 살아가는 주변 이웃들과 가진 것을 나누어 주었고, 나눔의 순간들은 곧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다.

 

완덕의 추구 과정에서 ‘사랑’[愛德]은 믿음과 희망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결과이다. 이처럼 믿음과 희망의 삶을 통한 나눔은 사랑의 삶으로 귀결된다. 사실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던 18~19세기에는 조선 후기 사회가 전반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그중에 경제적인 문제가 사회 안에서 크고 작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34) 하지만 순교자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천주교 신앙에 따라 실질적으로 가진 것을 나누었다.35)

 

그리고 그들은 사랑의 삶을 사는 만큼 신앙생활도 철저히 지켜나갔다.36) 사랑이 바탕이 된 나눔의 정신은 신자들 안에서 바람직한 인간상 및 인간관계를 형성했다.37) 예를 들어 최조이(1790~1840)는 물질적인 나눔뿐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까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마음까지 위로해 주었다.38) 그리고 이재행(1775~1839)과 박사의(?~1839)는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애긍과 희사의 마음을 잃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39)

 

박취득(?~1799)은 감옥에서 관장에게 “얼마 안 되는 제 재산을 헐벗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쓰고 있으니, 그것은 재산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천주교 신자들의 나눔 실천 정신의 취지를 옹호했다.40) 이는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 당국으로부터 재산을 낭비하는 ‘통화(通貨) 집단’으로 오해를 받고 있었기에 그 행위를 대변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천주교 신자들이 보여준 사랑의 삶은 당시 조선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상에서 124명이 보여준 삶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실천에서 나온 결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향주삼덕의 삶은 당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희망하면서 극기와 절제의 생활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깊은 관심을 가지도록 이끌어 주었다. 순교자들에게 신앙은 실천이었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증거하며 살았다. 이들은 사랑의 삶을 통해 더 큰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간직했고, 자신들의 삶은 천주교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삶은 결코 그릇되지 않다는 사실을 실천적 행동으로 세상과 사회에 웅변해 주었다.

 

 

3. 순교자의 내면(內面)과 외양(外樣)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순교자들의 내면세계는 완덕의 추구라는 특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완덕을 추구하던 그 내면의 가치는 외양으로 드러났다. 이들이 드러낸 외양의 특성은 재화(財貨)의 나눔,41) 공동체적 신앙생활 그리고 개인적 순결에 대한 지향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생활은 성리학을 생활윤리의 기본으로 삼았던 양반 지배층뿐만 아니라 무속적, 불교적 가치관에 얽매어 있었던 일반 민인들의 삶과도 차이가 있었다.

 

우선, 순교자들이 실천했던 나눔의 삶에 대해서 검토할 수 있다. 그 나눔의 삶은 앞서 언급한 사랑[愛德]의 실천에 관한 사례를 통해서 이미 제시한 바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에 대한 중복 서술 대신에 박해시대 신자들의 공동체적 삶을 주목하고자 한다. 이 공동체적 삶은 일반 속촌(俗村)과는 구별되던 교우촌(敎友村)의 생활을 통해서 드러난다.42) 교우촌은 향주삼덕을 실천해 나가던 현장이었다. 그들의 완덕에 대한 추구가 현실 세계에서 구현되어 간 특별한 공간이었다.

 

교우촌은 박해 시대 천주교 신앙을 매개로 하여 결성된 취락을 말한다. 이는 혈연 공동체인 집성촌이나 일반적 주거 집단인 면리동(面里洞) 등과는 확연히 구분되던 존재였다. 박해 시대 신자들은 신앙의 실천을 위해 박해를 피해서 산곡(山谷)으로 들어가서 교우촌을 형성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신심을 실천하면서 공동생활을 했다. 교우촌의 분포는 오랜 시간 지속되는 박해와 맞물려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고,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주하는 일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확산되었다.43)

 

이들은 교우촌에서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살았던 그 삶의 방식을 이어받았다.44) 즉 이들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가진 바를 서로 함께 나누며 살아갔다. 그리하여 교우촌은 하나의 교회 단위가 되었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공감을 기초로 하여, 신분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이 하느님 안에서 동등하게 고귀한 존재임을 확인하였다.45)

 

그리고 외적으로는 생산 수단과 생산물을 공유하는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생활 방식을 유지해 갔다. 이들은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 제작 등에 종사했다.46) 당시 농촌에서는 두레 노동이 일상화되고 있었다.47) 또한 옹기 제작의 노동 과정은 협업을 전제로 해야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생산 양식은 공동생산의 특성을 취하게 되었다. 또한 공동 운명체로서의 신앙생활은 공동분배를 가능케 했다. 이와 같은 생산 공동체는 천주교 신앙을 중심으로 하여 평등과 형제애, 조화를 강조하는 내면화된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갔다.

 

박해 시대 교우촌의 생활을 나타내는 자료는 순교자들의 신문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즉, 이경언(1790~1827)이 신문받을 때 관장은 그에게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은 타락하고 부도덕적인 교리’라고 추궁했다. 이에 이경언은 “우리가 재물을 상호 통하고 있다는 데[通貨]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이 세상에서 만일 재물을 어느 정도 소통시키지 않는다면 가난한 이들은 어떻게 삽니까?” 하고 반문했다.48) 그리고 박취득의 경우도 관장에게 “얼마 안 되는 제 재산을 헐벗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기 위해 쓰고 있으니, 그것은 재산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상의 신문 기록을 통해서 순교자들은 박해 당국자에게 나눔 실천의 당위성을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49)

 

조선 후기 사회는 무토불농지민(無土不農之民)이 광범위하게 생성되어, 많은 이들이 경제적인 난관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해를 피해 형성된 교우촌은 천주교 신앙의 보루가 되었다. 여기에서 이루어진 유무상통의 삶은 당시 조선 사회에 난관을 돌파해 가는 효율적 삶의 방법이었음이 분명했다.

 

또한 순교자의 조직 활동은 교우촌 생활과 함께 그들의 공동체적 삶과 신앙생활을 강화해나가는 데에 기여하고 있었다. 명도회는 초기교회의 신앙 공동체 가운데 대표적 존재였고, 명도회의 조직은 적어도 1830년대까지는 지속되고 있었다.50) 이 신앙 공동체는 교리 학습과 더불어 신앙 실천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므로 순교 영성의 형성과 실천에도 당연히 언급되어야 하는 요소가 되었다.

 

주거 공동체인 교우촌과 학습 공동체인 명도회 등의 조직은 신도들을 이중으로 결속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당시 각종 교회 서적을 통한 새로운 인간관의 이해는 교회 안에서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종전의 수직적 관계로부터 새로운 수평적 관계로 전환시켜 주었다.51) 그리고 신자들 역시 천주교 신앙은 “크게 평등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대인도 소인도 양반도 상놈도 없다”고 생각했으며, “한 번 여기에 들어오면 양반과 상놈의 차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 것”으로 말했다.52) 이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전제할 때 성립될 수 있는 말들이었다. 순교자 내지 초기 신자들의 신앙과 영성은 이처럼 밀접히 결합하여 실천되고 있었다.

 

이처럼 새로운 인간관과 사회관계를 제시하는 천주교 신앙 때문에, 1790년대 이후 세례를 받은 충청도 덕산인(德山人) 유군명은 자신의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다.53) 또한 조선왕조의 중견 관직인 이조(吏曹) 정랑(正郞)을 역임했던 홍낙민(1740~1801)의 경우도 자신의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다.54) 그리하여 1801년의 백정이었던 황일광(1756~1802)은 천주교 신앙을 종교적 복음뿐 아니라, 사회적 복음으로 인식했다. 그는 영세 후에 말했다. “나에게는 천당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내 자신의 신분에 비하여 지나친 대우를 받는 것으로 보아 지상에 있는 것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내세에 있다.”55) 이미 널리 알려진 이 사례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바는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아는 만큼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고, 목숨을 걸고 하느님 정신을 이웃 안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한편, 순교자들이 드러낸 외적 특성 가운데 또 다른 주요 요소로는 순결(純潔)에 대한 그들의 강조를 들 수 있다. 이들이 지향했던 순결은 성리학적 사회에서 강조되던 정조(貞操)/정절(貞節)의 관념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성리학적 정절은 여성이 한 남성에 대해 지고 있는 의리의 표현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양반 지배층은 과부의 재가(再嫁)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에게는 정절을 특별히 요구하지 않았다.

 

또한 박해 당국자들은 결혼하지 않는 행위를 불효로 파악하였다. 사실 그들에게 여자는 결혼을 해야 하고, 마땅히 남편과 시부모를 섬기며, 생남생녀(生男生女)하여 대를 잇고, 조선봉사(祖先奉祀)를 잘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결혼의 중요성을 독신보다 낮추어 평가하는 천주교의 폐륜(廢倫)은 인륜(人倫)으로 맺어진 가족 공동체의 근간을 어지럽히는 이단사설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천주교는 남아(男兒)를 후사(後嗣)로 정하여 가계의 혈통을 잇는 유교적 가족질서를 붕괴시키려는 무리이며, 이적금수(夷狄禽獸)의 학설이고,56) 멸기난상(滅紀亂常)의 학문으로 낙인을 찍었다.57) 그리고 이 당시 박해 당국자들은 천주교를 통화(通貨)하는 집단일 뿐만 아니라 통색(通色)하는 무리로 규정하고 공격했다.58)

 

그러므로 천주교는 ‘통색’이라는 공격에 직면하여 박해 시대에 더욱 순결을 강조했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박해 시대 신자들은 자신들이 강학이나 전례 중에는 비록 남녀가 한 장소에 동석은 했지만, 남녀유별(男女有別)을 철저히 지켰고, 천주십계(天主十戒)의 가르침인 6계와 9계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하게 따르고 있음을 항변했다.59)

 

또한 박해 시대 신자들은 공동체를 통한 신앙 실천의 훈련을 통해서 개인적 순결에 대한 지향을 가지게 되었다. 이 당시 천주교적 정절의 의미는 초기 교회 이래 널리 읽히고 있었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을 통해서 제시되었다.60) 또한 완벽한 순결을 갈망하는 여성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성년광익》(聖年廣益), 《성경직해광익》(聖經直解廣益)이 있었다.61) 그 밖에도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성교절요》(聖敎切要), 《아가다 성녀전기》 등도 순결의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62)

 

당시의 천주교는 무엇보다도 순결/정절을 강조하며 고귀한 행위로 규정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절의 의미가 아름다운 만큼 그 궁극적 표현인 동정은 더욱 아름다웠다. 동정이란 결혼 적령기의 신자가 남성이나 여성을 불문하고 자신의 전체를 천주께 봉헌하여 독신 생활을 유지하는 삶의 형식이었다. 이러한 동정의 삶은 자신의 욕망과 욕심에 대한 포기를 뜻하며, 이 포기의 정신은 곧 천주를 위한 목숨의 포기와도 연결될 수 있는 결단을 말했다.63)

 

박해 시대 교회의 순결에 대한 강조는 개인적 동정 생활에 대한 장려로 연결되었다. 당시 신자들은 순결에 등급을 규정한 교회 서적을 읽고 이해했으며, 완벽한 동정(童貞)의 개념을 터득했다.64) 즉, 당시 교회는 동신동녀(童身童女)의 순결을 금(金)으로 보았고, 홀아비나 과부[鰥寡]의 순결을 은(銀)으로, 부부간의 순결을 동(銅)으로 표현했다. 당시 신자들은 금(金)으로 표현되던 가장 완벽하고 고귀한 순결인 동정을 추구해 나가기도 했다.65)

 

박해 시대 신자들 가운데 완벽한 순결을 지향했던 이들로는 흔히 ‘동정부부’라는 특이한 명칭으로 불리는 유중철과 이순이, 조숙과 권천례 등의 사례를 들 수 있다.66) 그밖에 남성이 독신 생활을 통해 순결을 지키고자 시도했던 사례도 있었다.67) 그리고 여성들의 경우에도 동신으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동정녀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자 노력했다.68)

 

당시 교회가 시도했던 순결에 관한 등급 규정보다 더욱 중요하게 주목할 사항은 결혼한 남녀 모두에게까지 순결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69) 즉, 그들은 정절을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요구되던 가치가 아닌 남녀 간의 쌍무적 가치로 이해했다.70) 그들은 순결이 여성에게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동등하게 중요한 가치가 된다는 사실을 자신의 독신 생활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성리학적 정절관에 대한 거부요 공격이었다. 또한 이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표출이기도 했다.71)

 

조선왕조 19세기의 순교자들이 순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하고 있었던 사례들은 교회 측 기록을 통해서 풍부히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신문관이 이경언에게 ‘여자를 공동으로 소유하니 이보다 더 타락하고 부도덕적인 교리가 어디 있는가?’라고 추궁했다. 이에 대해서 그는 “우리에게는 이웃 여자를 마음으로 탐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 …짐승들도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라고 항변하며 남성에게도 정절을 요구하는 천주교 교리를 제시했다.72)

 

또한, 최여겸(1762~1801)은 ‘어떤 자들이 악한 자들이냐’는 관장의 질문에 “다른 이의 재산을 빼앗고 색욕에 몰두하는 자들이다”고 대답했다. 이에 관장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냐?’고 질문을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최여겸은 남자에게는 정절을 요구하지 않았던 당시 관행에 맞서서 “합법적 혼인 관계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가질 수가 없다”라고 말하며 신자로서의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다.73)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순교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불합리한 유교적 신분질서나 남녀 차별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존엄함을 깨닫고 이를 실천했다. 이렇듯 외양으로 나타난 실천의 내면세계는 천주교의 가르침이었다. 또한 당시의 교회에서는 남녀 간의 순결을 강조했다. 이 순결은 비단 미혼 여성의 순결이나 과부의 정절만을 의미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가치가 되었다. 박해 시대에 강조되던 순결은 이제 개인 윤리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사회를 전망하는 윤리로 발전해 나갔다. 박해시대 이래 강조되던 순결의 의미는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4. 순교자의 순교 인식

 

조선 교회의 순교자들은 향주삼덕의 실천을 통해서 내면적 완성을 추구했다. 이러한 내면적 특성은 신자로서의 새로운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들은 외양적으로도 일반인과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이는 그들에게 항시적으로 순교의 위험을 가져다주었다. 순교에 대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인식은 그들의 순교를 가능하게 해 준 요인이 되었다.

 

우선 순교자들은 체포된 이후에도, 신앙과 배교의 양자택일을 강요받을 때에도 신앙의 형제들을 고발하기를 거부하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동시에 표출하면서 순교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 신문 과정 중에 신앙을 포기하고, 배교의 표시로 천주교를 믿고 있는 동료를 고발하기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자신이 ‘천주십계’ 중에 제1계인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와 제5계인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74)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부인하는 것’과 ‘동료 천주교 신자를 고발하기’를 거부했다.75) 신문 과정에서 간혹 배교한 경험이 있다 하더라도, 이 경험은 다시 체포되었을 때 배교를 뉘우치며 더욱 강한 순교의 열망을 일으켜 주었다.76) 이는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에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기회 자체도 거부했던 것이다.77)

 

이러한 사례들은 순교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르는 행위’임을 말하고 있다. 즉, 그들은 ‘하느님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삶’(마태 22,37-39)을 통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본질을 발견했다. 특히 이웃 사랑은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말씀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성경 구절을 직접 제시하면서 그 행위의 정당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는 그들이 예수에 대한 굳은 신앙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삶을 예수의 삶에 견주어 해석하고자 했다. 즉, 홍교만(1737~1801)은 관장 앞에서 ‘예수를 알기 때문에 배교를 거부’한다고 했고,78) 김종한(?~1816)은 죽음을 앞둔 처지에서도 형수에게 ‘언제나 예수님처럼 행동하기를 권유’했다.79) 김시우(1781~1815)는 심문 중에 관장 앞에서 예수의 육화와 수난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고,80) 강완숙은 배교의 갈등을 겪는 아들에게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주시시켜, 아들 홍필주(1773~1801)의 마음을 잡아 주었다.81)

 

이시임(1782~1816)과 구성열(1776?~1816)은 자신들의 죽음은 하늘의 영복으로 부르는 예수와 마리아의 초대로 받아들였고,82) 김대권(?~1839)은 모진 고문 후에 부스러진 자신의 몸을 보면서 ‘예수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이해했다.83) 이처럼 순교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되는 신앙의 정신에 입각해서 순교에 대한 마음을 다져나갔다.

 

특히 순교자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겪는 박해 상황을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동일시했고, 자신의 삶을 결국 예수의 삶을 본받는 것으로 받아들였다.84) 즉, 이도기는 아내가 감옥 안으로 음식을 가져다주자, 자신의 처지를 수난받은 예수와 동일시하면서 음식을 거부했다.85) 참수 직전 그가 장터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것에 대해서도 예수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통으로 파악하고 집형리(執刑吏)에게 감사를 표현하기도 했다.86)

 

원시장(1732~1783)은 고문으로 자신의 몸이 얼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채찍질과 가시관 쓰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고통을 극복했고,87) 정약종은 형장으로 가면서 “목이 마르다”고 말하고, 뒤이어 “제가 마실 것을 요청하는 것은 위대하신 모범을 본받기 위함이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순교 여정을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동일시했다.88)

 

이경언은 묵상 중에 “골고타의 길 위에 계신 예수를 뒤따르기를 갈망”했고, 실제로 체포되어 감옥에 끌려가는 것을 “예수의 십자가 길”에 대한 동참으로 받아들였다.89) 또한 그는 자신의 감옥 생활을 예수의 수난과 비교하면서90) 순교에 대한 마음을 확고히 다져갔으며, 심문 중에 매를 맞을 때마다 예수님과 성모님을 불렀고, 의식을 잃을 때에는 “저의 하느님,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받아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십자가상 예수의 죽음을 본받고자 했다.91)

 

이처럼 순교자들은 예수의 여러 행적 가운데 수난 사건을 기억해 내고자 했고, 이 기억을 통해서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극복해갔다. 물론 순교자들은 수난에 연결되는 부활에 대해서도 신앙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을 통해 자신들도 부활하리라는 강한 희망을 가지며 살았다.92)

 

부활에 대한 희망은 박해 시대 신자들에게 순교에 대한 열망을 갖게 해 주었다. 그러나 박해자들은 이 순교에 대한 열망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태도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비정상적 행위로 규정했다. 그들은 살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기본적 본성인데 신자들이 이를 포기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신자들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김광옥은 관장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삶에 대한 갈망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라고 말했고,93) 이경언도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는 감사의 질문에 “어떻게 죽는 것이 두렵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94) 박경화와 이재행은 순교에 대해서 늘 준비를 해야 하지만, 순교 자체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95) 김종한은 순교의 염원만큼이나 죽는 날까지 자신의 목숨을 잘 보전하기를 바랐고,96) 이경언은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 앞에서 본성의 정을 억누르기 힘들다고 고백했다.97)

 

그러나 그들은 종국적으로 순교의 길을 택하며 배교하기를 거부했다. 즉, 관장은 김계완(?~1802)을 배교시키기 위해 사흘 동안 그의 집에 다녀오게 한 후 배교를 유도했지만, 그는 더 확고한 순교 결심의 의사를 피력했다.98) 황일광의 경우는 배교를 거부하면서, 하루빨리 사형받기가 소원이라고 진술했고,99) 김사건(?~1839)의 경우 유교적 인식을 갖고 있는 박해 당국자 앞에 유교적 사고를 바탕으로 배교를 거부했다.100)

 

이보현(1768~1795)의 경우에는 자신의 처형 문제에 대해서 ‘나라 법에 따라 다루어달라’고 항변하기도 했다.101) 김광옥(1741~1801)의 경우 박해 당국자 앞에서 ‘천주교 서적’조차 귀한 것이라 관장에게 함부로 줄 수 없다고 했고,102) 최 비르지타(1783~1839)는 배교 거부에는 남녀 차이가 없다고 항변했으며,103) 박취득은 관장 앞에서 자신은 천주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 때문에 배교를 당당히 거부한다고 했다.104)

 

이처럼 순교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순교 열망에는 그 특징적인 것을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순교자들의 순교 열망에는 하느님 개념이 분명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했고, 그 이해를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간직했다. 그들은 높으신 하느님을 진정으로 공경하고, 흠숭하기 때문에 순교를 결심했다.105) 또한 그들은 하느님이 언제나 인자하신 분이고,106) 참된 주님이시기 때문에,107)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108)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 자체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생각했다.109) 이처럼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그들은 순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순교자들의 순교 열망에는 순교 자체를 하느님의 부르심이자110) 명령으로 받아들였다.111) 그들은 순교가 하느님이 주신 기회이며, 선물이고, 하느님의 오롯한 뜻으로 생각했다.112) 그리하여 순교자들은 순교를 자신들이 바라던 소원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갈망하던 순교의 은총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순교하였다.113) 또한 그들은 순교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각했기에 하느님의 그 은총에 의탁하며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자 결심했다.114) 그와 동시에 ‘살고 죽음’에 대한 결정을 하느님께 내어 맡겼기 때문에, 박해 시기 동안 순교하지 못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었고, 그것마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115) 순교의 때가 오면 그 순간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순교를 받아들였던 그들은 순교 직전까지도 현재의 삶에 초연했고, 순교 자체를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이웃에게 충실했고, 살아있는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았다.116)

 

세 번째로, 순교자들이 가지는 순교 열망에서 그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순교를 각오하고 믿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것은 그 당시 자신에게도 순교의 상황이 찾아올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 믿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순교자들은 천주교 신앙을 죽을 각오를 하고 믿었으며, 순교에 대한 열망을 마음 안에 간직하며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117)

 

그들은 순교에 대한 열망을 이루기 위해 일상생활 속에서도 순교의 은혜를 청원했고,118) 순교의 그날을 기다리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세상을 충실하게 살았다.119) 순교에 대한 준비된 마음 자세는 박해 시기 동안 불안함 없이 순교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120) 또한 순교자들은 자신도 순교를 지향하며 살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동료 신자들에게도 순교에 대한 열망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었고,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자신처럼 순교자의 길을 따라 살도록 권면하였다.121)

 

이상에서와 같이 순교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순교 인식은 그 안에 향주삼덕이 응축되어 있고, 순교를 일상생활 안에서 완덕을 구현하는 행위로 이해했음을 뜻한다. 순교자들은 완덕의 지향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합일과 자기완성을 바랐던 사람들이었다.

 

 

5. 나오는 말

 

이 글은 2014년에 시복된 124명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19세기 조선교회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시 불합리한 사회 구조와 성리학적 가치 체계 안에서 천주교의 참된 가치를 발견했고, 이를 삶으로 드러내고자 노력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삶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실천에서 나온 결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실천은 박해 중에도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희망하면서 극기와 절제의 생활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깊은 관심을 가지도록 이끌어 주었다.

 

결국 순교자들에게 신앙은 실천이었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증거하며 살았음을 확인했다. 이들은 사랑의 삶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간직했고, 자신들의 삶은 천주교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삶은 결코 그릇되지 않다는 사실을 실천적 행동으로 세상과 사회에 웅변해 주었다.

 

또한 순교자들의 내면세계는 완덕의 추구라는 특성을 간직하고 있는 만큼 내면의 가치는 외양으로 드러났다. 이들이 드러낸 외양의 특성은 재화의 나눔과 공동체적 신앙생활 그리고 개인적 순결에 대한 지향 등을 통해 확인했다. 그리하여 순교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불합리한 유교적 신분질서나 남녀 차별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존엄함을 깨닫고, 이를 실천했음이 드러났다. 이러한 외양으로 나타난 실천의 내면세계는 천주교의 가르침이었음을 살펴보았다.

 

또한 당시의 교회에서는 남녀 간의 순결을 강조했다. 이 순결은 비단 미혼 여성의 순결이나 과부의 정절만을 의미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가치가 되었다. 박해 시대 강조되던 순결은 이제 개인윤리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사회를 전망하는 윤리로 발전해 나갔다.

 

이처럼 조선 교회의 순교자들은 향주삼덕의 실천을 통해서 내면적 완성을 추구했고, 외양적으로도 신자로서의 새로운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행동은 순교자들이 가지고 있는 순교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의 순교 인식에 대한 바탕에는 계명 실천에 관한 철저성에 있었다. 순교자들은 순교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르는 행위로 보았다. 그리하여 순교자들은 체포된 이후 신앙과 배교의 양자택일을 강요받을 때에 순교의 길을 선택하였다.

 

순교자들이 추구한 완덕의 삶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삶이었으며, 결국은 순교를 향한 열망으로 드러났음을 확인했다. 특히 본 논문에서는 순교자들이 가진 순교 열망의 근원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들이 순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개념이 분명했기 때문이며, 순교 자체를 하느님의 부르심이자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순교를 각오하고 믿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순교에 대한 열망을 간직한 만큼 일상생활 속에서도 순교의 은혜를 청원했고, 순교의 그날을 기다리면서도 일상생활을 충실하게 살았다. 이처럼 순교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순교 인식은 그 안에 향주삼덕이 응축되어 있고, 순교를 일상생활 안에서 완덕을 구현하는 행위로 이해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19세기 조선 교회 순교자들은 완덕의 지향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합일과 자기완성을 바랐던 사람들임을 확인했다.

 

 

참고 문헌

 

1. 관변 측 사료

《闢衛編》

《邪學懲義》

《承政院日記》

《朝鮮王朝實錄》

《推案及鞫案》

김진소 엮음, 《고종실록 천주교사 자료 모음》,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1997.

조 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 I》,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1.

- - - 엮음, 《조선왕조실록 천주교사 자료 모음》,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1997.

- - - 편저, 권내현 · 이욱 · 조성산 · 이상식 역, 《정조시대 천주교사 자료집 I · II · III》,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1999.

- - - 편저, 변주승 역, 《신유박해 자료집 I · II · III》,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1999.

 

2. 교회 측 사료

윤지충, <공술기>.

이도기, <정산일기>.

이순이, <옥중서간>.

정약종, 《주교요지》.

정하상, <상재상서>.

황사영, <백서>.

다블뤼(Daveluy), 유소연 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Notices des Pricipaux Martyrs de Coree),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달레(Dallet), 안응렬 · 최석우 역, 《韓國天主敎會史》(Histoire de l’Eglise de Coree) 상 · 중 ·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마테오 리치, 송영배 외 역주, 《천주실의》,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빤또하, 박유리 역, 《七克》, 일조각, 1998.

 

3. 단행본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I》, 천주교 전주교구, 1998.

노길명, 《가톨릭과 朝鮮後期 社會變動》,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 - -, 《민족사와 천주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전동천주교회, 《한국 최초의 순교자》, 천주교 전동교회, 2010.

조 광, 《朝鮮後期 天主敎史 硏究》,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 - -, 《조선후기 사회의 이해》, 경인문화사, 2010.

- - -,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기초》, 경인문화사, 2010.

주명준, 《天主敎의 全羅道 傳來》, 탐구당, 1998.

차기진, 《고난의 밀사 : 하느님의 종 윤유일 바오로와 그 동료들》, 어농성지, 2003.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0.

 

4. 논문

강석진, <제물진두 순교자 행적과 순교 영성>, 《누리와 말씀》 35, 인천가톨릭대학교, 2014.

곽신환, <유교에서 본 천주교, 천주교인>, 《가톨릭 신학과 사상》 14, 1995.

구본식 · 한명수, <대구의 순교자들의 영성(靈性)에 관한 소고>, 《대구 순교사 연구》, 천주교대구대교구 시복시성역사위원회, 2001.

김옥희, <초기 한국 가톨릭교회의 평신도 영성>, 《가톨릭 신학과 사상》 45, 2003.

김정경, <조선후기 천주교 여신도들의 삶과 죽음>, 《여/성 이론》 27, 2012.

김정숙, <순교자 강완숙과 초기 천주교 교회생활>, 《순교자의 삶과 신앙》(순교총서 2), 도서출판형제애, 2014.

김혜숙, <19세기 ‘甕器 敎友村’의 信仰生活과 甕器 紋樣>, 《교회사연구》 30, 2008.

방상근, <초기 교회에 있어서 명도회의 구성과 성격>, 《교회사연구》 11, 1996.

- - -, <순교자 최창현의 삶과 신앙>, 《순교자의 삶과 신앙》(순교총서 2), 도서출판형제애, 2014.

여진천, <한국 초기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이성과 신앙》 29, 2005.

- - -, <‘하느님의 종’ 최해성(요한)에 대한 연구>, 《한국 천주교회의 빛과 그림자》, 디자인흐름, 2010.

- - -,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교회사연구》 42, 2013.

원재연, <정조대 천주교회와 교리서의 저술>, 《한국사론》 31, 1994.

- - -, <천주교도 옹기장이의 유랑과 은둔>, 《한국사연구》 164, 2014.

유종만, <이순이와 성김대건 신부의 영성 : 서간에 나타난 사상을 중심으로>, 《한국가톨릭 문화 활동과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이미진, <조선후기 천주교 ‘여교인 공동체가’의 형성과 변천과정 - 4대 박해를 중심으로>, 《성신사학》 13, 1995.

이백훈, <조선 후기 천주교 수용에 관한 사회학적 고찰>, 《연세사회학》 3,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1979.

이창언, <옹기문화지도의 제작 : 옹기교우촌의 분포와 특성 - 경상북도 칠곡 지역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42,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조 광, <주문모의 조선 입국과 그 활동>, 《교회사연구》 10,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 - -, <한국 초기 교회와 순교 영성>, 미간행 논문(2014. 5. 30. 교황 방한기념 심포지엄 발표문).

조화선, <성경직해연구>, 《한국교회사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주강현, <두레의 농법과 김매기 노동>, 《한국전통과학기술학회지》 2, 1995.

차기진, <丁若鍾의 교회 활동과 신앙>, 《교회사연구》 15, 2000.

한 건, <이경언의 옥중서간에 대한 고찰>, 《신앙과 삶》, 부산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4.

하태진, <조선후기 이순이의 동정관 형성 과정>, 《전북사학》 37, 2010.

 

5. 잡지

박재만, <교부 시대의 순교 영성(4)>, 《경향잡지》(1987. 7).

- - -, <순교 영성의 재발견을 위한 시도>, 《사목》 155(1991. 12).

방효익, <순교 영성>, 《사목》 260(2000. 9).

정제천, <성이냐시오의 영신수련과 무아 방신부의 영성에 관한 비교>, 《면형무아》, 순교의 맥, 2000.

 

-------------------------------------------------------

 

1) 정제천, <성이냐시오의 영신수련과 무아 방신부의 영성에 관한 비교>, 《면형무아》, 순교의 맥, 2000, 86쪽.

 

2) 성 치프리아노, <인내의 선에 관하여>, 13-15. 치프리아노는 순교를 그리스도교적 덕행, 즉 믿음, 소망, 사랑 중에 가장 영웅적인 행위라고 언급한다. 그 이유는 순교가 최대의 인내를 보이는 결정적 애덕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박재만, <교부 시대의 순교 영성(4)>, 《경향잡지》(1987. 7), 100~103쪽 : - - -, <순교 영성의 재발견을 위한 시도>, 《사목》 155(1991. 12), 13쪽 : 방효익, <순교 영성>, 《사목》 260(2000. 9), 53쪽, 각주 34) 재인용.

순교 영성을 大神德, 즉 신덕 · 망덕 · 애덕을 통한 완덕의 추구로 설명한 논문도 있다. 구본식 · 한명수, <대구의 순교자들의 영성(靈性)에 관한 소고>, 《대구 순교사 연구》, 천주교대구대교구 시복시성역사위원회, 2001, 8~16쪽.

 

3) 강석진, <제물진두 순교자 행적과 순교 영성>, 《누리와 말씀》 35, 인천가톨릭대학교, 2014, 128~129쪽 참조.

4) 조광, <한국 초기 교회와 순교 영성>, 미간행 논문(2014. 5. 30. 교황 방한 기념 심포지엄 발표문).

 

5) 여진천, <한국 초기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이성과 신앙》 29, 2005, 44~90쪽 ; - - -,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교회사연구》 42, 2013, 5~48쪽.

 

6) 김옥희, <초기 한국 가톨릭교회의 평신도 영성>, 《가톨릭 신학과 사상》 45, 2003.

 

7) 전동천주교회, 《한국 최초의 순교자》, 천주교 전동교회, 2010 ; 차기진, 《고난의 밀사 : 하느님의 종 윤유일 바오로와 그 동료들》, 어농성지, 2003 ; 주명준, 《天主敎의 全羅道 傳來》, 탐구당, 1998 ; 김성봉, 《초남이 동정 부부》, 가톨릭출판사, 2012 ; 정병설, 《죽음을 넘어서 - 순교자 이순이의 옥중편지》, 민음사, 2014 ; 조광, <주문모의 조선 입국과 그 활동>, 《교회사연구》 10,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 방상근, <순교자 최창현의 삶과 신앙>, 《순교자의 삶과 신앙》(순교총서 2), 도서출판형제애, 2014 ; 김정숙, <순교자 강완숙과 초기 천주교 교회생활>, 《순교자의 삶과 신앙》(순교총서 2), 도서출판형제애, 2014 ; 김옥희, 《순교자 이순이 루갈다의 삶과 그 영성》, 한국학술정보, 2007 ; 유종만, <이순이와 성김대건 신부의 영성 : 서간에 나타난 사상을 중심으로>, 《한국가톨릭 문화 활동과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 한건, <이경언의 옥중서간에 대한 고찰>, 《신앙과 삶》, 부산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4 ; 여진천, <‘하느님의 종’ 최해성(요한)에 대한 연구>, 《한국 천주교회의 빛과 그림자》, 디자인흐름, 2010 ; 하태진, <이순이 루갈다의 동정관 형성에 관한 연구>, 광주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7 등.

 

8) 조광 엮음, 《조선왕조실록 천주교사 자료 모음》,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1997 ; 김진소 엮음, 《고종실록 천주교사 자료 모음》,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1997 ; 조광 편저, 권내현 · 이욱 · 조성산 · 이상식 역, 《정조시대 천주교사 자료집 I · II · III》,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1999 ; 조광 편저, 변주승 역, 《신유박해 자료집 I · II · III》,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1999 ; 조광 역주, 《역주 사학징의 I》,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1.

 

9) 李晩采 編纂, 金時俊 譯註, 《天主敎傳敎迫害史》, 國際古典敎育協會, 1984.

10)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 《韓國天主敎會史》 상 · 중 ·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11) 다블뤼 주교, 유소연 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12) 향주삼덕을 통한 천주교 신앙에 대한 인식은 앞서 박재만(<순교 영성의 재발견을 위한 시도>, 《사목》 155, 1991), 방효익(<순교 영성>, 《사목》 260, 2000), 그리고 구본식 · 한명수(<대구의 순교자들의 영성(靈性)에 관한 소고>, 《대구 순교사 연구》, 천주교대구대교구 시복시성역사위원회, 2001)의 논문에서 언급되었음을 제시했다.

 

13) 달레, 상, 337쪽 ; 달레, 상, 423쪽 ; 조광, 《朝鮮後期 天主敎史 硏究》,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84~85쪽.

14) 조광, 같은 책, 155~177쪽 참조.

 

15) 《推案及鞫案》 辛酉 2월 12일 ; 《推案及鞫案》 辛酉 2월 14일 ; 《日省錄》 憲宗 己亥 8월 19일 ; 다블뤼, 191쪽 ; 달레, 상, 337쪽 ; 달레, 상, 427쪽 ; 달레, 중, 127쪽 ; 달레, 중, 136~137쪽 ; 달레, 중, 176쪽 ; 달레, 중, 474쪽 ; 조광, 같은 책, 113~119쪽.

 

16) 《推案及鞫案》 辛酉 2월 20일 ; 달레, 중, 121쪽 ; 달레, 상, 418쪽 ; 조광, <한국 초기 교회와 순교 영성>, 앞의 논문, 28~29쪽.

17) 《推案及鞫案》 辛酉 2월 15일 ; 달레, 상, 402쪽 ; 달레, 중, 80쪽.

18) 달레, 상, 340쪽 ; 달레, 상, 366쪽 ; 달레, 중, 179쪽.

 

19) 《純祖實錄》 2卷, 1801년 2월 26일(壬申) ; 《推案及鞫案》 辛酉 2월 15일 ; 다블뤼, 88쪽 ; 다블뤼, 94쪽 ; 다블뤼, 118쪽 ; 다블뤼, 168쪽 ; 다블뤼, 172쪽 ; 다블뤼, 348쪽 ; 달레, 상, 402쪽 ; 달레, 상, 412쪽 ; 달레, 상, 423쪽 ; 달레, 상, 427쪽 ; 달레, 상, 452쪽 ; 달레, 상, 608쪽 ; 달레, 중, 146쪽 ; 이도기, 내포교회사연구소 역주, 《정산일기》, 기쁜소식, 2011, 12쪽 ; 박재만, <순교 영성의 재발견을 위한 시도>, 《사목》 155(1991. 12), 13~14쪽 ; 차기진, <丁若鍾의 교회 활동과 신앙>, 《교회사연구》 15, 2000, 44~45쪽.

 

20) 《推案及鞫案》 辛酉 2월 12일 ; 여진천, <한국 초기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앞의 논문, 52~54쪽.

21) 《眞道自證》, <經敎要文> 1 ; 다블뤼, 23쪽 ; 달레, 상, 402쪽.

22) 다블뤼, 115쪽.

23)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5집》, 127쪽.

 

24) 《日省錄》 憲宗 己亥 8월 19일 ; 달레, 중, 475쪽 ; 《병인치명사적》 권6(1925. 11. 20), 76~78쪽 ; 달레, 상, 403쪽 ; 달레, 상, 412쪽.

 

25) 달레, 상, 412쪽. 

26) 달레, 중, 77~78쪽.

27) 다블뤼, 191쪽.

28) 달레, 상, 419쪽 ; 달레, 상, 539쪽 ; 달레, 상, 544쪽 ; 달레, 상, 604쪽 ; 여진천, <한국 초기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앞의 논문, 52쪽.

29) 다블뤼, 155쪽 ; 달레, 상, 413쪽.

30) 달레, 중, 162쪽.

31) 달레, 중, 155쪽.

32) 달레, 중, 79쪽.

33) 달레, 상, 474쪽.

 

34) 조선 후기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노길명, 《가톨릭과 朝鮮後期 社會變動》,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42~75쪽 ; - - -, 《민족사와 천주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17~51쪽 ; 이백훈, <조선 후기 천주교 수용에 관한 사회학적 고찰>, 《연세사회학》 3,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1979, 129~131쪽 참조.

 

35) 달레, 상, 367쪽 ; 달레, 상, 400쪽 ; 달레, 상, 417쪽 ; 달레, 상, 607쪽 ; 달레, 중, 474쪽 ; 김정숙, <조선후기 서학수용과 여성관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20, 2003, 63~64쪽.

 

36) 달레, 중, 66쪽.

37) 달레, 중, 56쪽 ; 달레, 중, 91~92쪽 ; 달레, 중, 171쪽 ; 달레, 중, 174쪽.

38) 다블뤼, 70쪽.

39) 다블뤼, 118쪽.

40) 달레, 상, 411쪽.

41) 원재연, <정조대 천주교회와 교리서의 저술>, 《한국사론》 31, 1994, 175~177쪽.

 

42)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기초》, 경인문화사, 2010, 13쪽. 천주교 신자들은 1790년대 후반기 이래로 ‘교우촌’으로 불리는 신앙 취락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신앙을 매개로 하여 상호 결속을 다지고, 두레 공동체적 풍습을 살려서 새로운 생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43) 조광, 같은 책, 13쪽 각주 36) 재인용. 교우촌 형성의 직접적 계기는 1791년 신해교난(辛亥敎難)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교난 이후 경기와 내포 지방에서 자행된 탄압의 과정에서 일부 신자들은 자신의 향리를 떠나서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4) 사도행전 2장 44-47절 :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I》, 천주교 전주교구, 364~365쪽 참조. 교우촌 전통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로 1889년 전주 본당 보두네 신부가 장수 지방 양악(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공소를 방문한 후,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입 교우들의 협동심은 감탄스럽습니다. 그중에서 뛰어난 미덕은 그들 서로가 사랑과 정성을 베푸는 일입니다. 현세의 재물이 궁핍하지만, 사람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조금 있는 재물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 공소를 돌아보노라면 마치 제가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때의 신자들은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형제적인 愛餐을 함께 나누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뮈텔 문서>, ‘Beaudounet 신부의 1889년 연말 보고서’, 1889년 4월 22일.

 

45) 이창언, <옹기문화지도의 제작 : 옹기교우촌의 분포와 특성 - 경상북도 칠곡 지역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42,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 원재연, <천주교도 옹기장이의 유랑과 은둔>, 《한국사연구》 164, 2014.

 

46) 김혜숙, <19세기 ‘甕器 敎友村’의 信仰生活과 甕器 紋樣>, 《교회사연구》 30, 2008, 75~102쪽 참조 ; 이원희, <강원지역 천주교사 연구>, 강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0.

 

47) 주강현, <두레의 농법과 김매기 노동>, 《한국전통과학기술학회지》 2, 1995. 

48) 달레, 중, 148~149쪽.

49) 달레, 상, 411쪽.

 

50) 이경언, <1827년 명도회 회원들에게 보내는 서한>,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325~330쪽 ; 방상근, <초기 교회에 있어서 명도회의 구성과 성격>, 《교회사연구》 11, 1996.

 

51) 조광, 《朝鮮後期 天主敎史 硏究》, 106~113쪽 참조 : 마테오 리치, 송영배 외 역주, 《천주실의》,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393쪽.

52) 달레, 상, 338쪽 ; 달레, 중, 127쪽 ; 조광, <조선후기 평등의식의 성장>, 《조선후기 사회의 이해》, 경인문화사, 2010, 177~178쪽.

53) 달레, 중, 48쪽 ; 조광, <조선후기 평등의식의 성장>, 같은 책, 178쪽.

54) 朴宗岳, 《隨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不分面 ; 조광, <한국 초기 교회와 순교 영성>, 앞의 논문, 각주 46) 재인용.

55) 달레, 상, 474쪽 ; 조광, <조선후기 서학 사상의 사회적 기능>,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기초》, 경인문화사, 2010, 16쪽.

56) 《邪學懲義》, 162쪽.

57) 조광, 《朝鮮後記 天主敎史 硏究》, 165~166쪽.

 

58) 이항로, 《華西集》, 권15 <溪上隨錄>, “聖人苦心血誠防貨色 洋學苦心血誠通貨色.” ; 곽신환, <유교에서 본 천주교, 천주교인>, 《가톨릭 신학과 사상》 14, 1995, 97쪽 각주 21) 재인용.

 

59) 달레, 상, 411쪽.

60) 빤또하, 박유리 역, 《七克》, 일조각, 1998, 353쪽.

61) 조화선, <성경직해연구>, 《한국교회사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256쪽.

62) 하태진, <조선후기 이순이의 동정관 형성 과정>, 《전북사학》 37, 2010, 211~224쪽 참조.

63) 달레, 중, 95쪽 ; 김정경, <조선후기 천주교 여신도들의 삶과 죽음>, 《여/성 이론》 27, 2012, 212~217쪽.

64) 마테오 리치, 앞의 책, 398~406쪽 참조.

65) 민 아오스딩 감준, 《성경직해》 신판(1892), 25~26쪽 참조 :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I》, 179쪽.

66) 빤또하, 앞의 책, 330쪽.

 

67) 124분 중에 동정을 지킨 사람들에는 남자도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한(달레, 중, 294쪽)에는 “여자들 가운데 수절을 서원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남자 교우들 중에는 그보다 적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남자 동정자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재까지 알려진 대로 124분에 대한 약전에는 남자 중에 동정자로 이국승, 고성대, 그리고 독신으로 살았던 사람으로 김시우와 고성운이 있다.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0, 12~20쪽 일람표 참조.

 

68) 이미진, <조선후기 천주교 ‘여교인 공동체가’의 형성과 변천과정 - 4대 박해를 중심으로>, 《성신사학》 13, 1995, 96~97쪽.

 

69) 차기진, <丁若鍾의 교회 활동과 신앙>, 《교회사연구》 15, 2000, 10쪽. 교회 측 기록에서는 정약종이 천주교에 입교한 뒤 가족들의 간청에 못 이겨 유소사를 두 번째 부인으로 얻었으며, 이후 아내와 금욕을 하며 살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교우들이 이를 말려 하상과 그의 누이동생을 두게 된 것을 설명하고 있다.

 

70) 달레, 상, 183~197쪽 ; 김정숙, <조선후기 서학수용과 여성관의 변화>, 앞의 논문, 44~45쪽.

71) 김정숙, 같은 논문, 60~61쪽.

72) 달레, 중, 148~149쪽.

73) 다블뤼, 191쪽.

74) 달레, 상, 341쪽 ; 달레, 상, 463쪽 ; 달레, 상, 458~459쪽.

 

75) 《推案及鞫案》 辛酉 2월 12일 ; 《推案及鞫案》 辛酉 2월 14일 ; 《推案及鞫案》 辛酉 3월 16일 ; 다블뤼, 69쪽 ; 달레, 상, 368쪽 ; 달레, 상, 401쪽 ; 달레, 중, 92쪽 ; 달레, 중, 121쪽.

 

76) 《推案及鞫案》 辛酉 2월 13일 ; 달레, 중, 58쪽 ; 달레, 중, 67쪽.

77) 《推案及鞫案》 辛酉 2월 26일 ; 차기진, <丁若鍾의 교회 활동과 신앙>, 앞의 논문, 37~38쪽.

78) 《推案及鞫案》 辛酉 2월 20일.

79) 달레, 중, 77쪽.

80) 달레, 중, 57쪽.

81) 달레, 상, 500쪽.

82) 달레, 중, 82쪽 ; 여진천, <한국 초기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앞의 논문, 52쪽.

83) 달레, 중, 121~122쪽.

 

84) 박재만, <순교 영성의 재발견을 위한 시도>, 《사목》 155(1991. 12), 10~13쪽 ; 여진천, <한국 초기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앞의 논문, 54~58쪽 ; 구본식 · 한명수, <대구의 순교자들의 영성(靈性)에 관한 소고>, 앞의 논문, 16~18쪽.

 

85) 달레, 상, 405쪽.

86) 달레, 상, 401쪽.

87) 달레, 상, 369쪽 ; 여진천, <한국 초기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같은 논문, 55쪽.

88) 달레, 상, 452쪽.

89) 달레, 중, 143쪽 ; 여진천,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앞의 논문, 45쪽.

90) 달레, 중, 152쪽.

91) 달레, 중, 151쪽.

92) 여진천, <한국 초기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앞의 논문, 58쪽.

93) 다블뤼, 187쪽.

94) 달레, 중, 147쪽.

95) 달레, 중, 168쪽 ; 달레, 중, 176쪽.

96) 다블뤼, 346쪽.

97) 달레, 중, 158쪽.

98) 달레, 상, 605쪽.

99) 《邪學懲義》 卷1, 正法罪人秩, 黃日光.

100) 달레, 중, 173쪽.

101) 달레, 상, 424쪽.

102) 달레, 상, 517쪽.

103) 달레, 중, 478쪽.

104) 달레, 상, 413쪽.

105) 달레, 상, 443쪽 ; 달레, 상, 545쪽.

106) 다블뤼, 131쪽.

107) 달레, 상, 466쪽.

108) 달레, 상, 426쪽 ; 달레, 상, 450쪽 ; 달레, 중, 156쪽.

109) 다블뤼, 176쪽 ; 달레, 상, 423쪽 ; 달레, 상, 419쪽 ; 달레, 상, 505쪽.

110) 달레, 상, 369쪽 ; 달레, 상, 603~604쪽.

111) 다블뤼, 82쪽 ; 다블뤼, 185쪽 ; 달레, 상, 405쪽.

112) 달레, 상, 143쪽 ; 달레, 상, 420~421쪽 ; 달레, 상, 461쪽 ; 달레, 중, 78쪽 ; 달레, 중, 118쪽.

113) 다블뤼, 206쪽 ; 달레, 상, 154쪽 ; 달레, 상, 402쪽 ; 달레, 상, 517쪽 ; 달레, 중, 95쪽.

114) 다블뤼, 121쪽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자료집 제5집》, 147쪽.

115) 달레, 중, 132쪽.

116) 다블뤼, 116쪽 ; 달레, 중, 169쪽.

117) 달레, 상, 368쪽 ; 달레, 상, 548쪽 ; 달레, 중, 117쪽 ; 달레, 중, 159쪽.

118) 달레, 상, 471쪽 ; 달레, 상, 504쪽 ; 달레, 상, 511쪽 ; 달레, 중, 168쪽.

119) 달레, 상, 419쪽 ; 달레, 상, 472쪽 ; 달레, 상, 513쪽.

120) 달레, 상, 519쪽.

121) 다블뤼, 177쪽 ; 달레, 중, 67쪽 ; 달레, 상, 478쪽 ; 달레, 중, 158쪽 ; 달레, 중, 421쪽.

 

[교회사 연구 제45집, 2014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강석진(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소장 신부)]



파일첨부

2,75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