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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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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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478

[특집 신유박해 200주년]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으며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아 월간 「빛」에서는 신유박해 기획시리즈를 마련합니다. 그 첫 번째로 이번 호에서는 대구대교구를 중심으로 한 전반적인 박해 상황들에 대해 알아보고, 다음 호부터는 2년 여에 걸쳐 대구순교자 23위 개개인의 삶과 영성을 심층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 편집자 주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연구와 노력에 의해 시작된 한국교회는 신앙이 전래된 지 100년도 지나지 않아 네 차례의 대박해를 겪는다. 이 전국적이며 잔혹했던 박해들은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이다. 네 차례의 전국적인 박해 외에도 지역적인 여러 박해로 인해 이 땅은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어갔으나 우리 선조들의 신앙은 더 굳건해졌고 한국에 천주교가 뿌리 내릴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 박해를 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해관심을 가져 선교의 몫도 하였다.

 

특히 올해는 네 차례의 박해 중 최초로 일어난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분들을 단 한 분도 시복시성하지 못한 과오를 남겼다. 그래서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아 각 교구에서는 순교자 현양 신앙대회 및 학술회가 열리고,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분들의 시복시성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신유박해의 과정

 

신유박해는 1801년(辛酉年)에 일어난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이다. 이 박해에는 정치적 요인도 있었는데 그 배경으로는 1800년(정조 24년) 음력 6월에  천주교에 대한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펴왔던 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가 겨우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고, 순조의 계증 조모이자 노론벽파였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여 천주교인들과 남인 시파(時派)를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국상으로 즉시 박해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국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배교자 김여삼의 밀고로 서울의 회장 최창현을 시작으로 수많은 교인들이 잡혀 들어가게 된다. 이어 10월에는 공식 박해령을 내려, 오가작통법⑴을 실시하여 전국의 천주교인을 모두 고발하게 하고, 배교하지 않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엄명을 전국에 내렸다.

 

엄명을 내린 지 9일 만에 명도회장(明道會長) 정약종의 책롱(冊籠)이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던 중 발각되는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난다. 이 책롱에는 천주교 서적과 성물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이 들어 있었다. 이에 천주교를 엄단하라는 상소문이 계속해서 올라와 마침내 정약용, 이승훈 등을 잡아다가 국문(鞠問)⑵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권철신, 정약종도 잡혀 의금부에 갇히게 된다.

 

결국 정약종, 홍락민, 최창현, 홍교만, 최교필, 이승훈 등 6명은 참수되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하고,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해는 지방으로 확대되어 많은 신도들이 옥에 갇히거나, 유배 또는 처형되기에 이른다.

 

남인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참수, 또는 옥사, 유배됨으로써 끝난 것으로 보였던 이 박해는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 박차를 가하게 된다. 중국인 주신부는 1793년에 입국한 조선교회의 최초의 유일한 사제로서 강완숙의 집에 거처하면서 사목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포졸들이 그의 거처를 알아내어 덮쳤으나 다른 곳으로 피신한 주신부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도피로 많은 교우들이 잡혀 옥에 갇히거나 고문당하게 되자, 중국으로 피신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수를 결심한다. 주신부는 결국 군문효수(軍門梟首)되고 그를 6년 간 헌신적으로 도왔던 강완숙도 아들 홍필주와 함께 잡혀 참수된다. 이러한 주문모 신부의 순교는 본인이 의도와는 반대로 박해가 더욱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시작된 박해는 전국으로 점차 퍼져나가 전주에서는 유항검, 유관검 형제를 비롯하여 일가족이 체포된다. 이어 불과 며칠만에 200여 명이 옥에 갇히게 되나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된다. 그러는 동안 신유박해는 황사영의 체포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오랜 기간 동안 체포령이 내려졌었던 황사영은 이미 잡힌 유항검과 황심의 실토로, 함께 피신 중이던 김한빈과 함께 충북 제천 배론에서 잡힌다. 황사영은 박해가 일어나자 이곳에 숨어살면서, 박해로 폐허간 된 조선 교회의 실정과 조선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북경주교에게 전달할 비밀편지인 『백서(帛書)』를 작성하고 있었다. 백서의 주요 내용으로는 당시의 교세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 상황과, 체포 그리고 순교상황 및 박해 희생자에 대한 설명을 기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국내 정치 정세와 조선포교에 관한 근본방침에 대하여 쓰면서 만일 할 수 있다면 외국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백서는 황사영 혼자서 구상하고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정약용, 이치훈과 함께 공모한 것이라며 문초했다. 그러나 공모에 대한 증거도 없고, 단독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증거도 없어 능지처참의 사형이 집행된다. 그래서 북경 주교에게 백서를 전달할 계획 또한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어린 순조가 박해의 이런 잔악성을 알게 되자, 이 사건에 친히 관여하여 이미 끝난 소송을 재개하는 것을 일체 금지시키는 관용정책을 폈다. 이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도 더 이상 수색하지 말 것을 명하고 국청(鞠廳)⑶을 해체시켰으며 박해의 전말과 옥사를 변호하는 반교문(頒敎文)⑷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처결되지 않은 사학죄인들에게 대해서는 속히 처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12월 22일(음)에는 이른바 토사교문(討邪敎文)⑸이 반포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신유박해는 끝나게 되었다. 즉 이미 내려진 사형선고는 이를 속히 집행할 것과, 미결 사학죄인에 대한 신문도 빨리 끝내고 더 이상의 수사는 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가혹하고 잔인했던 신유박해는 끝났는데, 박해로 희생된 자들의 수는 처형된 자가 약 100명, 그리고 유배된 자가 약 400명으로 그 피해는 약 500명에 달하였다. 토사교문의 반포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은 일단 멈추었으나, 천주교를 국가의 적으로 단정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가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셈이 되어, 천주교 전파에 커다란 장애물로 등장하였다.

 

또한 신유박해의 결과 교세를 확장시켜가던 조선 천주교회는 완전히 황폐화되고,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 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며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게 되면서 많은 배교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가운데 새로운 입교자도 늘어났다. 교회는 그 후에도 전국적인 규모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지역적인 박해를 끊임없이 받으면서, 신앙을 굳게 지켜나갔고, 선교사와 사제를 다시 영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는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분들이 남겨주신 유산인 한국 교회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아울러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진정한 마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일상의 매순간을 순교자의 삶을 닮아야 할 것이다. 과거 교회처럼 피로써 신앙을 증거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선조들의 서로를 위하고 나누는 모습처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불목하지 않으며 나눌 줄 아는 이 시대의 순교자가 되어야 하겠다. 신유박해 200주년을 계기로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운동에 좀더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기도함으로써 그분들의 순교 정신을 만방에 알리고 그들의 신앙을 계승하는 자랑스러운 후손이 되어야겠다.

 

결국 시복시성은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분들의 삶과 영성을 밝혀 내어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 이야말로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는 우리의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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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숙종 원년(1675)에 범죄자의 색출, 세금 징수, 부역의 동원 등을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하여 다섯 민가를 한 통(統)으로 묶던 호적제도, 현조 때에 이르러서는 가톨릭 교도를 적발하는데 이용함.

(2) 국청에서 중죄인을 신문하는 것.

(3) 조선시대에 역적 등 중죄인을 신문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했던 기관.

(4)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백성에게 알리던 교서.

(5) 조선 헌종이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 전국의 백성에게 내린 임금의 말씀(1839).

 

[월간빛, 2001년 11월호, 정리 이은영 데레사(본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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