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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선 의금부 국문 기록한 추안급국안 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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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12 ㅣ No.640

조선 의금부 국문 기록한 「추안급국안」 완역


시복 · 시성 추진시 1차 사료 자료로 큰 의미 지녀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국역사업이 모두 마무리돼 오는 15일 발간된다.

조선조 최고 사법기관인 의금부에서 국문한 내용을 기록한 「추안급국안」이 완역됨으로써 조선 후기사는 물론 천주교회사의 세세한 복원이 가능해졌다. 3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변란과 역모, 왕릉 방화 등과 관련된 중죄인 심문기록이 모두 망라, 갖가지 사건의 진실을 드러낸 것이다. 이로써 1978년 아세아문화사에서 나온 영인본 30책에 이어 「국역 추안급국안」이 전 90권으로 선보이게 됐다. 특히 「추안급국안」은 우리나라 4대 박해 중 병오박해(1846년)를 제외한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의 심문 기록을 담고 있어, 천주교 재판 기록의 기본이 되고 있다. 어떤 책인가

「추안급국안」은 조선조 중죄인 심문 기록이다. 1601년(선조 34년)에서 1892년(고종 29년)에 이르기까지 292년간 의금부에서 주관하는 추국청의 추안(推案) 및 국안(鞫案) 331책을 한데 모은 것이다.

원문 글자 수는 672만 6000여 자, 국역문은 200자 원고지 15만 매에 이른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과 달리 요약 압축하지 않고 심문과 진술 형식으로 가감 없이 수록했다. 사건 이면에 숨겨진 실체적 진실이나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 베일에 싸인 궁중 내 갈등 등 조선 후기 역사의 속살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이뿐 아니라 교회사에서, 특히 최근 한국교회가 추진 중인 시복ㆍ시성에서 「추안급국안」은 ‘1차 사료’다. 물론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 제4권인 「조선 순교사 비망기」나 제5권인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 등 교회 측 사료도 있지만, 정부 측 사료는 ‘1차 사료’로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또한 최근 시복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약전에도 「추안급국안」은 1801년 신유박해에 관한 정부 측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와 함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내년 상반기에 나올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에도 「추안급국안」은 빼놓을 수 없다.


국역 과정

조선왕조실록 국역사업을 잇는 방대한 「추안급국안」 국역은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소장 변주승)가 주축이 됐다. 2004년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 지원과제로 선정돼 10억 5000만 원의 연구비를 받아 3년간 번역이 이뤄졌다.

그러고 나서 김진소(전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신부의 연구실이 있는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산재에서 힘겨운 퇴고가 이어졌다. 변주승(연구책임자, 전주대)·김우철(한중대)·조윤선(청주대) 교수 등 전문 번역자 10명과 전주대 사학과 대학원의 연구보조원 등 총 30여 명이 참여했다.

특히 천주교 관련 사건과 관련해선 신유박해 기록은 이상식 덕성여대 연구교수가, 기해ㆍ병인박해 기록은 서종태(스테파노) 전주대 교수가 각각 번역을 맡았다.


국역을 통해 밝혀진 내용은

「추안급국안」은 서울대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한국교회사연구소, 절두산순교성지 등에 다양한 형태로 소장돼 있기에 이미 중요한 내용은 모두 공개돼 있다. 이번 국역은 이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고 사료 가치가 높은 서울대 규장각본을 기초로 번역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규장각본은 신유박해 당시 주문모(야고보) 신부 등 45명, 기해박해 당시 앵베르 주교 등 8명, 병인박해 당시 베르뇌 주교 등 21명 등 중죄인들의 심문 기록이 모두 포함돼 있다. 그 분량이 두 권 가까이나 된다.

신유박해 당시 정약용(요한) 형제들의 국문 내용이 흥미롭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나주정씨 4형제, 곧 정약현ㆍ약전ㆍ약종ㆍ약용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보인다. 형제들 가운데 가장 머리가 좋은 ‘모범생’ 정약용은 “내게 포졸 두 명만 붙여주면 천주교도들을 다 잡아들이겠다”며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댄 뒤 강진으로 유배된 뒤 복권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 반면 당시 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에 천주교를 버렸던 정약전은 출세만을 위해 달려가지 않았고,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대지 않았기에 조정의 미움을 받아 섬(흑산도)으로 유배됐다. 또한 죽음 앞에서 의연했던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복자는 순교했다.

「추안급국안」은 또 천주교 박해의 진실 규명과 신자들의 내면, 갈등 구조 등을 파악할 수 있기에 원천사료로서 그 의미가 깊다. 기해박해 당시까지도 황사영(알렉시오)의 백서에 나오는 ‘대박청래’(大舶請來, 서양 군함 요청) 사건의 여파가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 등 서양 선교사들에게 대박청래에 대한 선교사들의 생각은 어떠한지를 집요하게 추궁한다. 이에 대해 이들 선교사와 정하상(바오로) 성인 등은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말했지만, 이들은 결국 순교하고 만다.

또한 「추안급국안」의 번역으로 병인박해의 새로운 원인이 밝혀졌다. 병인박해 당시 풍양조씨 세도가문과 연결돼 있던 조철증이 리델 신부의 중국 탈출을 도운 내역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병인박해의 원인은 이뿐만이 아니겠지만, 「추안급국안」에는 조철증과 천주교회와의 관계, 특히 베르뇌 주교와의 접촉, 지자익이나 김창실, 장치선, 최인서 등 천주교 신자들과의 교류 내용 등이 세세히 드러났다.

조광(이냐시오) 고려대 명예교수는 “문화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업적일 뿐 아니라 신유ㆍ기해ㆍ병인박해 기록이 포함된 천주교 재판기록은 앞으로 다시 이뤄질 시복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1차 사료가 될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기해 · 병인박해 기록 번역한 서종태 전주대 교수

 

 

“추안 및 국안의 천주교 자료들은 국문을 받은 신자들이 당시에 직접 진술한 것이기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큽니다.”

「추안급국안」 가운데 두 권이 채 못 되는 천주교 관련 재판기록 중 기해ㆍ병인박해 기록을 번역한 서 교수는 “서울대 규장각에는 세 종류의 추안 및 국안 자료가 소장돼 있는데 전체 추국의 한 부분일 뿐 낙장이나 낙질된 것도 많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처럼 한계를 드러내지만 「추안급국안」은 규장각본 「추국일기」나 「포도청등록」같은 관찬 사료를 통해 보완하면 되고, 나아가 일반 신자들 심문기록은 「사학징의」가 보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서 교수는 “「추안급국안」이나 「추국일기」는 보완적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국문 내용 기술이 서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어 이들 사료를 비교 검토해 가며 대조해볼 필요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규장각 소장본을 기본으로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본, 절두산순교성지 소장본 등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이나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추국일기」 등을 비교 검토해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 교수는 특히 “규장각본 「추안급국안」은 당시 조선에서 활동했던 선교사와 교회 지도자들의 공초 기록이 가장 많이 수록돼 있기에 한국 천주교사는 물론이고 정치사를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평화신문, 2014년 10월 12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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