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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경상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한 을해박해, 정해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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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9 ㅣ No.477

[신유박해 200주년] 대구 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경상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한 을해박해, 정해박해

 

 

경상도 지역의 박해

 

여러 차례의 박해 가운데 경상도 특히 대구지방의 복음전파와 밀접하게 연관된 박해는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이다.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를 중심으로 이 지방에 순교자들에 의해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또한 그 복음이 전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이미 1801년 신유박해 때까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들(충청도-이존창, 전라도-유항검)이 있어서 일찍이 복음이 전해졌지만 경상도에는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유교와 불교가 성행한 경상도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된 것은 1785년(을사년) 봄에 서울 명례방(지금의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신자들이 모여서 신앙집회를 하던 중에 갑자기 추조(형조)의 금리(禁吏)들이 들이닥쳐 그곳에 참가한 신자들을 체포한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상도 밀양 단장으로 귀양간 김범우의 가정과 문중박해를 받고 족보에서 파적된 채 경상도 상주로 이사온 서광수의 가정에 의해서 경상도 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서 신유박해를 피해온 신자들보다 더 먼저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셈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서 경상도 북부 산간 지대인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영양 일원산 등으로 피난온 신자들이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산간 지방에 복음을 전하며 14년동안 자급자족 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따르다가 1815년 을해년에 터진 을해박해 때이다.

 

 

1815년 을해박해 흐름도

 

- 2월 22일 청송 노래산 신자촌 급습 40명 체포

- 며칠 뒤 진보 머루산 신자촌 급습 23명 체포

- 3월 영양 일월산 곧은정 신자촌 급습

- 4월 23일 봉화 우련전 신자촌 급습(총 71명 체포)

- 경주, 안동 진영에서 고문 끝에 38명 배교 석방(경상감영 33명 압송)

- 경상감영에서 고문 끝에 2명 배교, 4명 옥사(27명 남음, 순교자 최봉한 프란치스코, 김아가다 막달레나)

- 경상감영 2차 심리와 고문, 11명 배교, 3명 옥사(13명 남음)

- 1815년 10월 18일 조정에서 13명에게 사형 선고

- 1816년 10월 21일 사형집행 명령

- 순교를 기다리며 5명 옥사(안치룡, 서석봉 안드레아, 김시우 알렉스, 김홍금, 김장복)

- 1816년 11월 1일 대구 관덕정에서 7명 순교(김종한 안드레아, 고성운 요셉, 고성대 베드로, 김희성 프란치스코, 김약고배 야고보, 구정일 발바라, 이시임 안나)

 

 

1815년 을해박해(乙亥迫害)

 

천주교를 전혀 접할 수도 없었고, 알 수도 없었던 경상도와 대구지방에서 지역민들이 천주교인을 직접 보고 그들이 말하는 교리를 듣고 가슴속으로 천주교를 느끼게 만든 것은 바로 박해였다.

 

을해박해는 순조 15년인 1815년 을해년에 경상도 지방에서만 발한 국지적 박해사건이다. 이미 신유박해(1801년) 때 천주교를 사학으로 치부하고, 항상 우리 신자들을 괴롭히는 악법의 올가미인 ‘토사교문’이 발표돼 천주교 신자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자 경기도, 전라도, 충청도 지역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경북 동북부지역으로 숨어들어 청송 노래산(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 진보 머루산(영양군 석보면 포산리), 일월산의 우련전(봉화군 재산면 갈산리)과 곧은정(영양군 일원면 융화리 혹은 봉화군 소화면 남회룡리)으로 숨어들었다.

 

처참한 박해가 끝난 후 겨우 살아남은 신자들은 혹독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전답이나 가옥등을 모두 버리고 깊은 산골로 숨어들어 나무뿌리와 도토리로 연명하거나 화전을 일구고 옹기와 숯을 구워 팔며 신자촌을 형성하여 14년 간 외부세계와 단절한 채 가난하게 살면서도 목숨보다 소중한 신앙을 간직하며 살고 있었다.

 

마침 1814년(순조 14년) 6~7월에 우리 나라에서 큰 홍수가 지고 흉년이 들어 당장 추수할 곡식조차 없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우리 나라는 오랫동안 쇄국정책으로 다른 나라들과 교역을 하지 않아서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구원의 손길도 받을 수가 없었고 굶어죽는 사람이 자꾸 늘고 있었다. 하지만 경북 북부지방의 신자촌에서는 적은 곡식이라도 서로 나누어 먹으며 기근을 피했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교회를 미워하는 사악한 무리들이 신자들을 해치고 자기들의 배를 채우려는 못된 흉계를 품게 되었고, 신자촌에서 구걸을 일삼던 ‘전지수’란 자가 신자들의 재산을 탐내서 국법으로 금지한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이 청송현에 있다고 밀고했다.

 

탐욕에 차있던 관장과 포졸들은 조정의 허락도 없이 밀고를 받아들여서 1815년(을해년) 예수부활대축일(음력 2월 22일)에 ‘청송 노래산 신자촌’을 급습했다. 박해를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신자들은 너무도 의외여서 처음에는 도둑이 쳐들어오는 줄 알고 몸이 날쌔고 기운이 센 고성운 요셉의 지휘에 따라 힘으로 대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관헌이 파견한 포졸들이라는 것을 알게되자 모든 저항을 거두고, 포승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고성운, 고성대 형제와 서석봉, 최봉한, 구성렬,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 등 40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경주진영으로 압송됐다.

 

경주진영에서는 고문과 굶주림으로 인하여 많은 신입신자들이 배교를 하였고, 박 바울로, 박관서, 고산의 김서방, 경상도 사람 김사일 등 7명은 옥사하고 나머지 서석봉 안드레아, 그의 아내 구성열 발바라, 사위 최봉한 프란치스코, 김시우 알렉스, 고성대 베드로와 그의 동생 고성운 요셉,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 등 7명은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됐다.

 

며칠 후에는 다른 포졸들이 진보 머루산 신자촌을 급습하여 23명의 신자들을 붙잡아 안동 진영으로 끌고갔다. 이곳 신자들도 청송 노래산 신자들과 같이 배교를 하고 풀려났으며 김홍금 부자는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세상을 떠났고 최 안드레아와 최 마르띠노 형제들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여 최 마르띠노는 안동에서, 최 안드레아는 대구 경상감영에 이송된 후 옥사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박씨 부부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여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된 후 감옥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이시임 안나와 아들 종악 김약고배 야고보 등은 안동에서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됐다.

 

그해 3월에는 배신자 전지수가 안동 포졸들을 데리고 느닷없이 일월산중에 있는 곧은정 신자촌을 급습하여 김희성 프란치스코를 체포하여 안동 진영으로 끌고 갔고,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다시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됐다.

 

4월23일에는 역시 일월산중의 우련전 신자촌을 습격하여 김종한 안드레아와 예비자인 이윤집을 체포하여 안동진영으로 압송했다.

 

그 밖에도 그해 4월에는 안동의 포졸들이 진보 머루산에 살다가 울진으로 이사를 간 김강이 시몬 집을 습격하여 김강이와 아우 타대오를 체포하여 안동진영으로 압송했다. 그 후 두 형제는 원주감영으로 이송됐다.

 

을해박해 때 청송에서 40명, 진보에서 23명, 영양 곧은정과 봉화 우련전에서 8명 등 총 71명이 체포됐다. 이 가운데 38명은 배교하고 석방됐으나 33명은 국사범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경상감영으로 이송됐다. 경상감영의 1차 고문에서 2명이 추가로 배교했고 최봉한 프란치스코,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 김진성, 김악지 등 4명이 옥사했다.

 

이때 옥사한 최봉한 프란치스코와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 두 분은 이번 천주교 대구대교구 순교자 시복시성추진운동에 포함돼 있으나 김진성, 김악지 등 두 분은 관찬사료에는 옥사자로 기록돼 있으나 교회사료가 없어서 이번 시복시성추진에서 제외됐다. 이로써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천주교를 믿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은 교인은 27명으로 줄어들었다.

 

경상감영에서 열린 2차 고문에서 11명이 추가로 배교했고 3명은 옥사했다. 이때 옥사자는 신광채, 심경, 김광억 등이다. 이들 3명은 순교자임에는 분명하지만 관찬사료만 있고, 교회사료가 없어서 이번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시복시성 추진운동에서 제외됐다. 이로써 13명이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끝까지 그리스도 신앙을 간직했다. 1815년 10월18일 남은 13명에게 사형 판결이 떨어졌고, 1816년 10월21일에 사형 집행명령이 조정으로부터 하달됐다.

 

그러나 사형되기 전에 안치룡, 서석봉 안드레아,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 김시우 알렉스, 김흥금, 김장복 등 5명이 순교하기 전에 모진 고문과 굶주림의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1816년 11월1일에는 김종한 안드레아, 고성운 요셉, 고성대 베드로, 김희성 프란치스코, 구성열 발바라, 이시임 안나 등 7명이 경상 감영의 형장인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당했다.

 

1815년에 경상도 지역에서 발생한 을해박해에서 순교의 피로 지역에 그리스도를 알리고 신앙을 선포한 순교자는 모두 14명이다.

 

이듬해인 1916년(병자년)에 나라에서 사형집행이 내려져서 김종한, 김약고배 야고보, 고성대, 고성운, 이시임, 구성열, 김희성 등 7명의 남은 신자들은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순교하였고, 임시로 형장 근처에 매장됐다가 그 이듬해에 친척과 신자들에 의해서 이장됐다. 을해박해 때 순교자 가운데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시복시성 추진운동의 대상자로 선정된 14명(옥사자 7명, 참수자 7명)은 교회사로 뿐만 아니라 관찬사에까지 확실하게 기재된 이들이다. 을해박해 때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분들 가운데 관찬사료낙 교회사료를 찾지 못해서 시복시성 추진운동에서 빠진 분들도 상당수이다.

 

 

1827년 정해박해 흐름도

 

2월 - 전라도 곡성에서 천주교 신자 고발사건 발생

3월 - 전라도 곡성과 고산에서 240명 체포

4월 - 경북 상주 멍에목, 앵무당 등에서 31명 체포(박보록 바오로,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안군심 리카르도 등)

5월 - 봉화 순흥고을에서 이재행 안드레아 체포, 김세박 암브로시오 자수, 체포

사형을 선고 받고 경상감영에서 3명 옥사(박보록 바오로, 김세박 암브로시오, 안군심 리카르도)

1839년 4월 14일 대구 관덕정에서 3명 참수(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이재행 안드레아)

 

 

1827년 정해박해(丁亥迫害)

 

을해박해(1815년) 보다 12년 후인 순조 27년(1827년)에 전라도와 경상도 등지에서 일어난 박해이다. 을해박해 이후 경상도 지방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으나 갑자기 박해의 회오리 바람이 다시 불어닥쳤다.

 

1827년 2월에 전라도 곡성에서 천주교 신자를 고발함으로써 발생한 정해박해로 3월 한달간 전라도 곡성과 고산 등에서 여신자를 포함하여 240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간데 이어서 4월에는 경상도에까지 박해의 손길이 뻗쳤다.

 

그해 4월에는 전주감영의 포졸들이 경상도와 서울로 파견되어 당시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신태보와 이경언을 체포하러 나섰다. 신태보 베드로는 교회재건에 앞장섰다가 경상도 상주잣골(상주군 이안면 배모기 부근)에 은거하면서 교회서적 등을 베껴서 나누어주다가 4월 22일에 체포돼 전주감영으로 끌려갔다. 신태보 베드로가 끌려간데 이어 4월 24일에는 다른 포졸들이 같은 상주고을의 앵무당(상주군 화북면 평온리) 신자촌을 급습했으나 신자들이 모두 도망가서 한 사람도 체포되지 않았다. 그 해 4월 말경 신자들이 많이 사는 신자촌 4~5군데를 급습, 상주고을 멍에목(문경군 동로면 명전리) 신자촌에서 박보록 바울로와 박사의 안드레아 부자가 체포됐으며, 앵무당 마을에서 김사건 안드레아와 안군심 리카르도를 비롯한 31명의 신자들이 체포됐다.

 

이어서 봉화 순흥고을 곰직이(붕화군 물야면 오전리)에 살고 있던 이재행 안드레아가 체포됐으며,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의 순교자인 김범우의 먼 친척 김세박 암브로시오는 그해 5월에 스스로 안동 진영에 나아가서 체포됐다. 또 경상도와 경계지역인 충북 단양의 깊은 골(충북 단양군 대강면 신구리)에 사는 유성태 라우렌시오의 집에서는 그와 경상도 지역에서 피난온 20여명의 신자들이 체포됐다.

 

이밖에 안동에 살던 신 요한과 신 이냐시오 형제도 체포되어 5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고, 그후 신 이냐시오는 전라도 고산으로 가서 살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이 박해는 1827년 2월부터 3개월 동안 계속되어 5월에 신자들의 체포로 끝이 났는데, 경상도 상주, 안동, 순흥 신자촌이 파괴되었다.

 

정해박해 때 붙잡힌 신자수는 모두 500여 명에 이르지만 대개가 배교를 하고 풀려났으며 전라도에서 8명, 경상도에서 6명, 충청도에서 1명 등 모두 15명이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옥사하거나 순교했다.

 

정해박해 때 경상도 지역에서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은 신자 가운데 박사의 안드레아, 이재행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등 3명은 이전의 박해와는 달리 선고 후 만 12년이 흐른 1839년 4월 14일(음력)에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참수 치명당했고, 박보록 바울로, 김세박 암브로시오, 안군심 리카르도 등 3명은 형 집행 전에 옥사했다.

 

<참고> 영남교회사연구소 마백락님이 쓴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신앙의 씨앗을 뿌린 사도들"

 

[월간 빛, 2001년 11월호, 최미화 글라라(대구대교구, 순교자 시복시성 추진위원회 홍보분과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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