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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본 나가사키 신앙의 역사2: 소토메, 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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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22 ㅣ No.1067

일본 나가사키 신앙의 역사, 세계유산을 향해 가다 (2) 소토메 · 고토

박해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기도와 열정으로 성전 건립 이뤄



- 고토의 풍경.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나가사키의 성당과 교회 관련 유산’들을 실제로 찾아가보면 서양의 성당들처럼 아름답고 빼어난 건물을 만날 수는 없다. 오히려 초라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유산들의 진정한 가치는 건물 자체에 있지 않다. 그 건물에 얽힌 나가사키 신자들의 삶과 역사가 바로 세계유산, 즉 인류에 대해 보편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세계유산을 향해 가는 일본 나가사키의 12곳의 유산, 2회에 걸쳐 그 유산들이 들려주는 신앙의 역사를 연재한다.


소토메 - 시츠성당, 오노성당

- 시츠성당.


 

나가사키시에서 북서쪽으로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넘어가니 푸른바다가 보였다. 거친 파도와 거센 바닷바람이 이곳이 소토메임을 알려줬다. 한자로 외해(外海)라고 표기하는 소토메는 동쪽의 오무라 만(灣)과 달리 바깥 바다와 맞닿는 지역으로 농·어업에 적합하지 않아 박해 이전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곳이다.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척박한 땅을 선택했다.

소토메가 있는 오무라 영주의 영토는 일본에서 가장 교회문화가 융성하던 곳 중 하나였다. 1562년 일본 영주로서는 최초로 세례 받은 오무라 스미타다는 적극 영지에 신앙을 전파했지만 그가 죽고 박해가 시작되자 가장 큰 신앙의 땅은 가장 가혹한 박해의 땅으로 돌변했다. 영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주민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것은 신앙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지낸 시간이 250년이었다.

능선을 따라 듬성듬성 솟아있는 건물 사이로 십자가가 달린 새하얀 건물이 보였다. 소토메 최초의 성당인 시츠성당이다. 낮은 지붕에 반듯하게 지어진 이 건물은 새하얗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런 꾸밈도 없다. 종탑과 십자가만이 이 건물이 성당임을 말해줬다. 박해를 딛고 신앙을 되찾은 소토메 신자들을 위해 파리외방선교회의 도로(Marc Marie de Rotz, 1840-1914)신부가 설계하고 지은 이 건물은 오로지 실용성에 중점을 둬 건축비용을 최소화했다.

 

- 오노성당.



도로 신부의 이름은 길가의 간판 등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에 와 죽기까지 평생을 소토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그는 지금도 신앙을 막론하고 소토메의 아버지로 불리며 존경받고 있다. 도로 신부는 밀 농사를 가르치고 파스타 면을 만들어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비싼 값에 팔았으며 어망 기술을 가르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소토메 지역의 경제를 살려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시츠성당에서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자 오노성당이 나타났다. 역시 도로 신부가 설계한 이 작은 성당은 외벽이 독특하다. 자연석이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외벽은 사실 당시 신자들의 아픔이 스민 벽이다. 성당 건축 당시 이 지역의 신자는 120가구. 그러나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가구는 26가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박해의 두려움이 채 가시지 않았고 자신들이 떠나 박해 기간 자신들을 지켜준 절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열악한 재정과 신자간의 갈등, 그 속에서도 신자들은 기도할 집을 짓고자 자신들의 손으로 성당 벽을 쌓았다.

지금도 소토메 사람들의 40%가 하느님을 섬긴다. 그러나 그중 4분의 1은 아직도 교회를 찾지 못하고 숨어 기도한다.

 

 

고토 - 구 노쿠비성당, 카시라가지마성당, 구 고린성당, 에가미성당

- 무인도에 홀로 남은 노쿠비성당.


 

척박했던 땅 소토메를 뒤로하고 서쪽으로 바다를 가로질러 고토를 향했다. 바다 위에 길게 수놓인 고토 열도가 장관을 이뤘다. 배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에 소토메의 신자들이 고토를 향하며 불렀던 노래가 절로 떠올랐다.

“‘고토로! 고토로!’하며 모두 가고 싶어 한다네. 고토는 은혜롭다네, 토지까지도!”

척박한 환경에서 신앙을 숨기며 고군분투하던 소토메의 신자들은 1797년 고토로 대이주를 시작한다. 고토와 오무라 영주의 협정으로 영지의 주민을 보냈기 때문이다. 소토메 주민들이 신자임을 짐작하던 오무라 영주가 소토메 주민들을 고토로 보내기 시작하자 고토로 가면 생활이 나아지리라 기대한 신자들이 몰래 이주해 그 수가 약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희망의 노래는 곧 절망의 노래로 변했다. 히라도에는 이런 노래가 전해 내려온다.

“고토는 극락, 가서보니 지옥. 두 번 다신 가지 않으리, 고토란 섬.”

 

- 신자들이 직접 채석한 돌로 지은 카시라가지마성당.



고토의 성당은 50개. 나가사키 전체 성당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신자 비율도 높고 신앙심도 깊다. 그런데 이 성당들의 위치가 독특하다. 어업이 생계의 중심인 고토의 큰 마을은 모두 바닷가에 있는데 성당은 대부분 산속에 있다. 후대에 이주해온 신자들이 바닷가에 살지 못하고 산속으로 내쫓겼기 때문이다. 고토 지역에서 신자들에 대한 차별은 40년 전까지도 지속됐다. 세계유산 후보지인 노쿠비·카시라가지마·구 고린·에가미성당 역시 산 위나 배를 정박하기 힘들어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지역에 지어졌다. 그러나 가난과 차별은 신앙을 이기지 못했다.

 

어선을 빌려 타고 사람도 살지 않는 외딴 섬, 노자키 섬을 찾았다. 마을이 있었지만 사람이 떠나 모두 황폐해져 있었다. 섬에 오르자 반기는 것은 사슴뿐 아무것도 없었다. 가파른 언덕을 20여분 올랐을까 웅장한 벽돌조 건물이 보였다. 노쿠비성당이다.

이곳 신자들 역시 가난한 신자들이었다. 항구도 갖지 못하고 돈을 벌 직업도 없었다. 하지만 ‘기도하는 집’에 대한 열망은 컸다. 옆 마을 항구를 빌려 물고기를 잡고 마을 전체가 공동 취식을 하며 끼니를 줄였다. 몇 백 명에 불과한 신자들은 그렇게 수년에 걸쳐 돈을 모았다. 성당이 완공되자 신자들은 지금 돈으로 몇 억에 해당하는 돈을 동전으로 항아리에 담아 지불했다고 한다.

 

- 박해가 채 끝나기도 전에 지어진 고토 최고(最古)의 구(舊) 고린성당.



나무로 지은 성당이라면 얼마든지 지을 수 있었지만 신자들이 바란 것은 그런 성당이 아니었다. 후대의 후대에 이르기까지 언제까지라도 남아있는 기도하는 집. 그 바람이 사람조차 남지 않은 이 땅에 성당을 남겼다.

노쿠비성당만이 아니었다. 나뭇결이 있는 나무를 살 돈이 없어 값싼 나무에 손으로 나뭇결을 그린 에가미성당과 신자들이 직접 채석한 돌로 지은 카시라가지마성당, 박해가 아직 채 끝나지도 않았음에도 수난을 무릅쓰고 지은 고토 최고(最古)의 구 고린성당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성당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고 기도하는 집을 갈망하던 고토 신자들의 뜨거운 믿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가난과 차별에 시달리던 고토 신자들은 오랜 노력으로 이제 오히려 고토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됐지만 일거리가 적어 해마다 사람들이 급감하는 현재 성당을 유지하는 신자들은 대부분 60~70대다. 취재단을 안내하던 야마구치 히토시(나가사키순례센터)씨는 “지금까지는 신자들이 필사적으로 성당을 지켜왔지만 앞으로 점점 더 힘들어진다”면서 “세계유산 등록 추진에는 이런 신자들의 고민도 함께 담겨있다”고 전했다.



- 에가미성당.

[가톨릭신문, 2012년 10월 21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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