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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37: 교황령의 성립과 기원 - 세습지 수입으로 빈민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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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28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37) 교황령의 성립과 기원 - 세습지 수입으로 빈민구제

 

 

[로마=김상재 기자] 교황령은 교황의 세속주권이 인정되는 교황국가의 영토를 말한다. 자연 교황령은 교황의 권위에 따라 시대마다 달랐지만 언제부터 시작됐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교황국가의 성립은 베드로 세습령(patrimonia petri)이라고 부르는 교회 소유의 토지와 더불어 황제들의 교회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교황들의 노력. 여기에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랑고바르드 족의 침입이라는 국제정세, 로마 전통적 귀족세력의 몰락과 무관계층의 지위향상 및 이탈리아내의 반 비잔틴 경향 등의 사회적 요인이 중요 요소로 작용했다.

 

이중에서도 가장 기본적 토대는 역시 교회가 일찍부터 소유해 온 많은 토지재산인 베드로 세습지였다.

 

161년에 고린토의 디오니시우스 주교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로마교회의 신자들이 다른 지역의 교회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로마의 이러한 원조는 상황에 따른 일시적 기부에 의한 것이었지만 교회가 안정되면서 일시적 기부금 외에도 빈민구호를 위한 항구적 기금이 마련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교회 재산은 몰수되기 일쑤였던 박해시기 동안에는 토지로 소유하기 어려웠지만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관용령으로 교회재산의 합법화가 이뤄짐으로써 토지의 형태로 보유하게 됐고 각계에서의 기증도 이어져 세습지의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

 

이러한 세습지에서 나오는 수입은 주로 교황에게 지급되는 것과, 성직자를 위한 성직록, 교회건물 유지, 빈민구제와 자선을 위해 사용됐다.

 

그중에서도 빈민구제와 자선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으며 토지관리관의 임무 중에서도 빈민들을 돌보고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이러한 자선활동을 체계화한 최초의 교황은 그레고리오 1세였는데 그는 티베르강 옆에 곡물저장창고를 짓고 정부와는 별도로 식량을 분배했다.

 

연이은 침략과 전쟁 등으로 로마의 식량난이 극심했던 7세기와 8세기에는 오늘날의 무료급식소와 비슷한 디아코니아(diaconia)를 만들어 수도자들을 직원으로 두었다. 하드리아누스 1세 교황 시절에는 특정지역의 빈민들이 금요일에 디아코니아에 모여서 가까운 목욕탕까지 노래하며 인도됐으며 목욕후 식량을 배급받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의도에 의해 유지되어 온 베드로 세습지는 6세기 후반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으로 상당히 상실되기도 했으나 8세기에 들어와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함께 더욱 확장됐다.

 

이 과정에서 프랑크 왕국의 역할은 지대했다. 754년 스테파노 2세 교황과 동맹을 맺은 피핀은 랑고바르드 족이 점거한 지역의 반환을 약속함으로써 교황령이 형성될 기초를 놓았고 그의 아들 카알대제는 774년 4월 기존 랑고바르드 족의 영토는 물론 베네치아, 이스트리아까지 양도를 약속했으며 781년과 788년 두차례에 걸쳐 광대한 토지를 양도했다.

 

교황령의 확대와 함께 교황의 세속적 권한은 증가됐는데 이는 단순히 비잔틴 제국의 쇠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국가의 간섭에서 교회를 독립시키려는 교황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교권과 속권의 갈등은 313년 그리스도교의 공인 이후 계속됐으며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비잔틴 제국의 쇠퇴가 맞물린 반면 교황의 지위가 확대된 5세기 이후 표면화 됐다. 이후 800년까지 악화된 동서제국 간의 갈등 속에서 교황들은 중부 이탈리아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을 배제시켜 나갔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교황의 노력과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는 황제들간의 이러한 갈등은 마침내 비잔틴의 레오 3세 황제에 의한 이탈리아에 대한 중과세(725년)와 성화상 파괴 정책(726년)의 실시와 함께 결정적 전환점을 맞는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세금지불과 성화상 파괴를 거부했고 황제는 이런 교황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이미 유명무실해진 비잔틴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지방민들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러한 긴장의 연속에서 생활하던 교황들은 더 이상 국가의 간섭을 받지않기 위해 교황이 세속적 권력까지 영유하는 '성 베드로 공화국' 사상 곧 성 베드로가 교황을 통하여 지배하는 로마교황국을 제창한 것이다.

 

선임 교황들의 사상을 이어받은 스테파누스 2세는 교황령을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 로마인들의 공화국'(Sancta Dei ecclesia, res publica romanum)으로 불렀다. 이로써 교황은 황제의 피보호자가 아닌 동등하거나 우월한 권리를 가진 권력을 갖게 됐다.

 

8세기에 이르러 교황들이 이렇게 강력하게 비잔틴 제국으로부터의 이탈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롭게 편성되는 국제정세와 여기서 파생된 사회적 요인에 힘입은 바가 크다.

 

비잔틴 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후계자로서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지만 5세기 이후 그 영향력은 현저히 감소했다. 더욱이 이민족의 침입 앞에서 제국 정부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반면 교회와 교황은 유일한 피난처로서 이민족들을 개종시키고 백성들을 구제했다. 뿐만 아니라 랑고바르드 족의 위협과정에서 맺어진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의 동맹은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국제정세의 변화는 사회적 변동 또한 가져왔는데 6세기 로마인들이 도처에서 살해됐던 고트족과의 전쟁과 이후 정치세력과 제국의 행정력이 쇠퇴하고 관리들의 억압과 부패, 성화상 파괴와 같은 종교적 탄압, 이탈리아에 대한 비잔틴의 속주화에 대한 로마인들의 불만 등으로 반 비잔틴 사상이 커져갔다.

 

이같은 사회상 속에서 원로원과 같은 전통적인 로마의 귀족세력이 약화되고 무관계급의 정치·사회·경제적 지위향상이 이어졌다. 이들은 교황을 응징하려는 비잔틴 세력에 강력히 대처하여 교황을 보호함으로써 교황국가 성립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이처럼 교황국가는 730년경부터 800년까지 교권 수호라는 일관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형성된 것으로, 서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찾아 온 전쟁과 사회 경제적 불안정 등에 기인한 공백을 교회가 메움으로써 세속적 지배권을 확대한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교황들의 세속주권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교황의 위신을 실추시켰고 속권을 유지하기 위한 교회 징벌의 남발과 재정난에 따른 과도한 조세, 지방행정 당국과의 분쟁 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1월 13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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