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새로운 복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 생부와 양부의 길을 따른 효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15 ㅣ No.1522

[새로운 복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 생부(生父)와 양부(養父)의 길을 따른 효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경기도 양근 한감개(현재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출신으로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권 세바스티아노는 교회 창립주역 중의 한분이었던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아들로 태어나(1769), 학문적 명성과 덕망이 높아 많은 제자(초기 한국 천주교회 활동 주역들)를 두었던 권철신(암브로시오, 권일신의 형)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생부(生父)와 양부(養父)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온몸과 마음으로 배운 권 세바스티아노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학문과 신앙을 이어받아 자연스럽게 열심한 신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교회 창립의 주역이었던 이벽(요한 세례자)의 죽음(가문 박해로 인한 순교) 이후 교회 지도자로서 그 역할을 다했던 생부 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신앙활동과 순교(1791년 杖死)를 보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생부와 양부의 교회 활동에 자연스럽게 참여한 권 세바스티아노는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배우고 기도를 하며 신앙과 교회활동의 미래 지도자로 성장해 갔습니다. 이때 함께 했던 동료로는 조동섬 유스티노, 윤유일 바오로, 윤유오 야고보 등이 있었습니다.

 

권 세바스티아노는 신해박해(1791)로 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죽임을 당하자 두려운 마음에 한동안 교회 활동을 주저하였습니다. 그러나 1795년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로는 용기를 얻어 서울로 이주하여 고해성사를 받았고, 다시 고향인 양근으로 내려왔습니다. 이후 을묘박해(1795)로 주 신부가 피신 생활을 하게 되자 양근에 있는 자신의 집에 머무르도록 도와주며, 주 신부로부터 교리를 배워 신앙을 견고케 하였습니다.

 

1800년 6월, 경기도 양근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권 세바스티아노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양근과 경기 감영(현재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한창일 때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고문을 이기지 못해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멀리하는 것처럼 행동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전에 한 말을 취소하였으며, 가혹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끝까지 (천주교 신앙을) 후회하지 않고 그대로 깊게 믿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형조에서는 그의 최후 진술을 들은 후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생부 권일신이 사망한 이후에도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아울러 요사한 말과 글을 오로지 대중을 미혹시키는데 이용하였다.” 사형 선고 후 ‘권상문을 고향으로 이송하여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권 세바스티아노는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되었는데, 이는 그 지역 주민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권 세바스티아노는 33세의 나이로 양근 형장에서 생부와 양부의 길을 따라 순교(참수)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2015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수원주보 4면, 최인각 바오로 신부(인계동본당 주임)]



2,97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