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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발칸: 플리트비체가 준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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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02 ㅣ No.1509

[발칸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플리트비체가 준 숙제



-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에 미사를 드린 코레니카의 작은 성당에는 햇살이 가득 들어와 그렇잖아도 환한 내부가 더 밝고 따뜻했다.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에 코레니카라는 작은 마을에 내렸다. 햇빛 아래 키 큰 성당 건물만 보였다. 제대와 독서대 앞에 희고 붉은 꽃이 장식된 간결하고 환한 성당이었다. 동네 공원 벤치 같은 등받이 없는 의자들이 줄지어 있고, 크레파스로 그린 듯한 14처가 동화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제오르지오 성인이 제대 중앙에서 용을 제압하고 있었다.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성당에서 제오르지오의 형상은 명확하게 핵심으로 다가왔다. ‘오늘의 용, 오늘의 유혹, 오늘의 악령은 무엇인지 대면하라.’ 낯선 곳에서 미사를 드리고 드디어 플리트비체를 향해 나섰다.

 

발칸 유럽에서 잘사는 편인 크로아티아지만 시골 마을의 평원을 지날 때는 낮고 둥근 나무들 사이로 종종 작고 낡은 집들이 보였다. 열악해 보이는 환경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생각할지 문득 궁금했다.


 

- 플리트비체는 크로아티아의 8개 국립공원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답기로 잘 알려져 있다.

 

 

실은 발칸의 낙후한 나라를 다니면서 자꾸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묻고 있었다. 경제수준이 조금 낮아 보이지만 그들은 무척 안온하게 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누리는 생활의 편리함이나 세련됨의 문제가 아니라 원초적인 만족과 따뜻함의 문제, 공감이 가능하고 정직과 성실 같은 가치가 아직 소용이 있는 사회 같았다.

 

- 크고 작은 호수 16개와 92개의 폭포가 장관을 이루는 플리트비체의 산책로에는 자연에서 얻지 않은 재료로 만들어진 구조물이 없다. 오로지 나무로 만든 길뿐이다.

 

 

삶의 농밀함을 만끽하며 ‘잘 살고 있는’ 듯한 그들의 삶을 스치면서 부러운 마음으로 줄곧 기원했다.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 귀결시키는 광풍에 휩쓸리지 않고 천천히 자연스럽게 살아가기를. 그래서 이웃을 덜 의심하고 더 믿을 수 있는 행운을 오래도록 놓치지 않기를. 우리가 순식간에 잃어버린 아름다운 덕목이 오랫동안 그들의 행복지수를 유지해 주기를 바랐다.

 

출발하기에 앞서, 플리트비체에 가면 창조주께서 빛과 숲과 물과 뭍을 만드시던 그 순간, 사람을 만드시고 어울려 잘 살라고 하신 그 순간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과 가장 어울리는 모습으로 그 원초의 자연을 거닐고 싶었다. 우리를 위해 준비한 그 다채로운 축제의 공간에서, 세상 만물을 우리를 위해 창조해 주신 분을 기억하며 한없이 감사드리고 찬미하는 시간이 되기를 꿈꿨다.

 

플리트비체 호수는 크로아티아의 국립공원 여덟 곳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답기로 잘 알려져 있다. 1949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7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내전 중에 매설된 지뢰 때문에 1992년 ‘위기에 놓인 세계유산’으로 분류되기도 했는데, 크로아티아 정부의 지뢰 제거 작업으로 1998년 본디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 푸른 물길과 푸른 숲, 푸른 수초와 푸른 이끼의 길을 사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젖어 걸었다.

 

 

크고 작은 호수 16개와 호수로부터 쏟아지는 92개의 폭포가 8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지는 공원은 계속 물길이었다. 폭포든 작은 도랑이든 발 딛는 모든 곳이 물길로 이어져서 자칫하면 풍덩 물에 빠질 수도 있었다. 눈이 부신 햇빛 아래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포를 올려다보다가 발아래를 내려다보고 하느라 무척 바빴다.

 

플리트비체 호수에 요정이 산다던데(?) 때론 정말 물속에 잠긴 나뭇가지를 밟고 요정이 퐁당퐁당 건너올 것도 같았다. 사방팔방에서 물이 흘렀다. 수직으로 흐르는 물은 폭포가 되고, 수평으로 흐르는 물은 호수를 이루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물이 흘러서 물소리가 발 아래, 머리 위, 옆구리에서 일렁거렸다. 호수마다 물의 색깔이 제각각 달라 그 다채로운 빛깔 덕분에도 눈이 호사를 누렸다. 석회암 지반이 물에 분해되고 깎이며 만들어낸 호수와 골짜기여서, 호수 바닥에 석회암이 얼마나 가라앉아 있는지에 따라 물 색깔이 달라진다고 한다.


 

- 플리트비체 공원의 상부와 하부 지역 경계인 코자크 호수는 전지의 힘으로 움직이는 배를 타고 건넌다. 소음 없는 배가 고요한 호수를 떠가고 있다.

 

 

영겁을 느끼게 하는 푸르른 이끼와 수초들의 향연을 지나 선착장에 닿았다. 명성이나 규모에 비해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선착장이었다. 플리트비체의 상부와 하부 지역의 경계로 가장 긴 쪽의 길이가 약 3킬로미터에 달하는 코자크 호수를 전지의 힘으로 움직이는 배를 타고 건넜다.


- 나무다리 아래로 한없이 맑고 푸른 물이 흐르고 있다.

 

 

바람 잔 호수는 한없이 고요했다. 배도 소리 없이 흘러가니 온 세상이 그저 그림 속인 듯싶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수질 오염이나 소음이 발생하지 않게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공원의 모든 것 또한 자연에서 얻은 것들이었다. 그 광활한 공간에 콘크리트를 바른 구조물이나 조악한 조형물 따위는 아예 없었다. 최소한의 친절로, 호수의 고도와 수량 등을 적어 꽂아놓은 푯말 말고는 사람이 다니는 물길 위의 나무다리가 전부였다. 공원을 전체 돌아보려면 족히 몇 시간은 걸린다는데 그 흔한 매점 하나 화장실 한 곳 보이지 않았다.

창조주 하느님의 눈부신 작품인 플리트비체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은 더욱 아름다운 곳이었다. 정성스럽게 관리되고 있는 장엄하고 신비로운 자연을 뒤로하고 다시 사람들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날 플리트비체는 숙제를 안겨주었다. 스스로를 창조의 순간처럼 맑고 건강하게 복구하라. 찌그러지고 완고해지고 삐뚤빼뚤해진 자신을 처음처럼,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 그때처럼 복원하라. 나를 치유하고 주변을 태초처럼 복구하는데 함께하라는 것이 플리트비체가 안겨준 과제였다.

 

오롯이 창조의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시시각각 엄습하는 상처에도 창조성을 복구하고자 애쓰겠다고, 여태 제대로 낫지 않아 깊이 곪아있는 부분들과도 화해하고 말짱한 관계가 되도록 애써보겠다고, 나름 대견한 마음을 먹으며 그 푸른 물의 나라를 떠나왔다.


 

- 하느님께서는 ‘만드시고’ 사람들은 잘 보존하는 플리트비체. 그 정성 덕분에 더 아름다웠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그 자체로 가없는 절경이었다.

 

* 이선미 로사 -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성지를 순례하다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5년 8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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