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레지오 단원은 화와 분노를 봉헌해, 평화 살아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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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05 ㅣ No.582

[레지오 영성] 레지오 단원은 화와 분노를 봉헌해, 평화 살아내는 사람

 

 

사랑을 ‘살아낸다’는 것은 꾸준하게 인내하며 살아가겠다는 다짐의 또 다른 말입니다. 삶에서 만나는 모든 관계에는 ‘인내’라는 단단하고 야무진 괸 돌이 꼭 필요하니까요.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설명하면서 가장 먼저 “참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적었을 듯 싶은데요. 성경은 우리에게 누누이 이릅니다. 분이 나고 화가 나더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에페 4,26) 라고 상세히 당부합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는 악마의 것이기에 마음단속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지요.

 

이처럼 화를 내거나 분노를 터뜨리는 것만으로 어둠에 사로잡혀 죽음을 향하게 된다니, 얼마나 섬뜩한 경고입니까? 잠시 잠깐, 화를 참지 않는 것이 악마에게 우리의 행복을 앗아가도록 허락하는 꼴이라니, 화를 내고 분을 터뜨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잘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국인들의 분노폭발 감정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언짢은 평가이지만 더없이 예의바르고 상냥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욱’하며 돌변하는 걸 흔히 보는 형편이니 항변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욱 순간의 스트레스로 인한 ‘우발적 살인’과 ‘우발적 방화’가 해마다 늘어나는 우리의 현실을 염려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참을성을 잃고 충동적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독특한 민족성을 어찌해야 할까요?

 

화풀이는 스스로 좌절하고 패배한 마음을 삭이지 못한 결과에서 빚어지는 잘못된 감정입니다. 설핏 생각하면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감정이라서 단순한 듯 보이지만 이 작은 생각이 엄청난 사건으로 발전하는 빌미가 됩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품고 있는 ‘화’와 ‘분노’가 죄악이라는 점을 잘 증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분노는 교만과 매우 밀접한 관련 있어

 

정신과에서는 과도한 분노로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행위를 정신장애의 일종으로 진단합니다. 사회학에서는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대화하려는 문화가 줄어든 결과라고 풀이합니다. 갈등을 조장하는 사회적 풍토가 갈수록 인내할 줄 모르는 개인 성향을 키우고 있는 것으로 분석합니다.

 

한편 “당장 결과를 보려는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참고 타협하는 절차를 기다리지 못하게 하여 우발적 범죄를 증가시킨다고 설명하는데요. 언제나 무슨 일에서나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잘못된 가치관이 상대방은 틀렸다고 우기는 것, 나아가 적으로 간주하여 응징하려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스스로 화를 돋우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무시당하고 비아냥거림의 존재로 전락했다고 느끼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이렇게 곰곰이 헤쳐 보면 분노가 교만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기에 나의 작고 사소한 감정표현이 상대를 죽음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힐 때, 인내심이 사라집니다. 경멸의 말투와 모욕적인 언사를 선택하여 구사합니다. 따지고 대들며 저주스런 악담마저 서슴지 않고 뱉는 우를 범합니다. 마침내 본인이 원하지 않는 것은 모두 폭력으로 몰아내려는 극성으로 발전합니다. 곧 누군가에게 보복하고 상해를 입히려는 ‘나쁜 의지’가 바로 분노의 맨 얼굴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어느 누구도 화를 내지 않는 재간을 지닌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분통이 터지는 일을 겪을 수 있고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 안절부절 짜증을 부리게도 되니까요. 그래서 일까요. 세네카는 화를 ‘어떤 악습보다 비천하고 광포한 격정’이라고 정의합니다. 소크라테스는 화를 ‘마음의 질병’이라고 단언하며 “화를 내서 승리하는 것은 결국 지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댑니다. 또한 석가모니는 “그대가 화를 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게 아니라 그대가 낸 화가 그대를 벌하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지요.

 

사실 분노함으로 얻는 해악은 본인에게 가장 치명적인데요. 무엇보다 먼저 내 마음을 망가뜨리기 때문이고 욕심을 줄이거나 마음을 비워내는 방법을 잃게 하기 때문입니다. 끝내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일에서든 불만을 품고 감정싸움을 일으키도록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화를 참을 수 있는 방법을 묻습니다. 어떻게라도 고치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차오르는 화를 물리치지 못하고 마음에 일어나는 분의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고 지냅니다. 또 다시 화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하기를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정말로 화를 참고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지내기가 이렇게 힘이 듭니다.

 

 

화를 이기려면 매순간 주님께 하소연하고 기도해야

 

때문일까요? 교부들은 말합니다. 분노로 인하여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마음을 단속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누이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분노의 장벽을 넘어설 때 다른 모든 욕정을 이길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욕망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인내심이 최고의 명약이라고 말합니다. 항구함과 꾸준함과 오래 견딤에 익숙해지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을 살아내는 최선의 비결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땅에 그런 용한 힘을 가진 사람이 있기나 할까요?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것이 아닐까요?

 

화를 이기기 위한 뾰족 수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때문에 화를 이기기 위해서는 오로지 끊임없이 하늘을 향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매일 매 순간마다 주님께 하소연하고 맡겨드려서 툴툴툴 털어내는 기도 방법만이 유일한 묘수인 겁니다.

 

의학은 심호흡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누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하지요. 때문에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그래도 화가 나면 참지 말라”고 권하기도 하는데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그 숫자 열을 셀 동안에 간단한 기도를 올리는 방법이 훨씬 더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화가 나면 얼른 거울을 보거나 자신의 표정을 떠올리는 것도 아주 좋은데요. 이것은 제가 애용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의 흉해진 눈빛과 표정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얼른 화를 털어내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만큼 화를 낸 얼굴은 스스로에게 낯설기 이를 데 없고 끔찍하니까요. 거울에 비친 일그러진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라… 악마의 얼굴이라는 걸 선명히 느끼게 됩니다. 혹시 운전석에만 앉으면 입이 거칠어지는 분이 계십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이 또한 아주 모호한 방법으로 화풀이를 하면서 살아가는 증거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순간에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만 제일 중요하다”는 진리를 되뇌어 보십시오… 거짓말처럼 마음속에 차오르는 평화를 만나게 되실 겁니다.

 

저는 이런 방법이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믿습니다. 충분히, 아낌없이, 마음껏 소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것이라고 강조해드리고 싶습니다.

 

지나친 분노는 죄입니다. 이 진리를 알면서도 거듭 화를 내고 분노한다면 이야말로 “토한 것에 도로 눕는” 미련한 돼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1분 화를 낼 때마다 당신은 60초 동안 행복을 잃는 셈이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셈 빠른 한국인들이 가장 솔깃할 수 있는 명언이라 싶어 전해드립니다. 화를 내는 것만큼 행복을 잃는다면… 정말로 큰 손해이니까요.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고 그리스도인의 자긍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안에서 차오르는 분과 화를 주님께 봉헌해드리며 평화를 누리는 레지오 단원이 많아지시길 기도드립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7월호,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부산교구 사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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