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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수원교구가 현양하는 복자, 어떤 이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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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8-17 ㅣ No.1344

수원교구가 현양하는 복자, 어떤 이들일까?


‘103위 성인’ 아버지 세대인 초기 교회 순교자들



윤유오는 형인 윤유일을 통해 입교한 후 고향 안근에서 교리 모임을 가지며 신앙을 지키다 체포됐다. (탁희성 작)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복된 124위 중 교구가 현양하고 있는 복자는 31위다. 교구가 현양하는 복자들은 어떤 이들일까. 교구와 관련 있는 31위 복자에 관해 알아보자.

124위 복자는 우리나라에 신앙을 뿌리내린 초기 교회의 신자들로 103위 성인의 아버지 세대다. 1984년 시성된 103위 성인은 기해(1839년)·병오(1846년)·병인(1866년)박해에 순교한 반면, 이번 시복된 124위는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대부분이 1801년 신유박해에 순교하는 등 103위 성인보다 30년 이상 앞선 세대의 순교자다. 103위 성인도 124위 복자들의 신앙을 이어받았다. 교구가 현양하는 31위 복자도 을묘박해(1791년) 3위, 신유박해(1801년) 20위, 을해박해(1819년) 2위, 기해박해(1839년) 3위, 병인·무진박해(1866~1868년) 3위 등으로 대부분 초기 교회 신자들이다.

을묘박해에 순교한 윤유일(바오로)·최인길(마티아)·지황(사바) 복자는 성직자 없이 뿌리내린 조선교회에 성직자를 들이기 위해 밀사로 활약했던 이들이다. 선교사가 조선에 올 수 있도록 윤유일과 지황은 여러 차례에 걸쳐 북경을 방문했고, 이들의 노력으로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 역관이었던 최인길은 주 신부가 거처할 집을 마련하고 통역을 맡았다. 밀고로 주 신부의 입국이 발각되자 주 신부를 피신시켰다. 그들은 판관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심한 고문에 맞아 죽기까지 주 신부의 거처를 말하지 않았다.

 

이중배는 옥중에서 의술을 베풀었다. ‘그를 찾아온 이들은 모두 낫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몰려온 이들로 옥문이 장터 같았다고 한다. (탁희성 작)

 

 

주문모 신부는 비밀리에 신자들을 만나 성사를 집행하고 명도회를 조직, 교리서 집필 등 다양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의 노력으로 조선교회의 신자수가 1만 명에 달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활동한지 6년이 되던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주 신부의 거처를 말하지 않고 고문과 죽음을 당하자 주 신부는 스스로 박해자 앞에 나가 순교한다.

124위 복자들이 가장 많이 순교한 신유박해는 교구가 현양하는 31위 중에서도 20위의 복자가 순교한 큰 박해였다. 이때 신자들이 많이 살았던 양근과 여주, 광주유수의 치소가 있었던 남한산성 등에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윤유오(야고보)를 비롯한 7명의 복자가 태어난 여주 지역과 조용삼(베드로)를 포함한 5명의 복자의 고향인 양근은 신자들이 생활하던 터전임과 동시에 순교의 현장이 됐다. 양근은 선교사 없이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던 신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또 천진암이 인근에 있는 여주 역시 일찍부터 천주교가 전파됐다. 복자들은 자신만이 신앙의 길을 걷지 않고 가족과 신앙을 나누며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때 순교한 복자 중에도 가족이 많은데 윤유일의 동생 윤유오와 그의 사촌 윤점혜(아가타)·윤운혜(루치아) 자매, 윤운혜의 남편 정광수(바르나바)와 정순매(바르바라) 남매 등의 복자들이 이때 함께 순교했다.

 

한덕운은 끔찍하게 고문 당해 죽어있는 교우들 시신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일일이 장례를 치러주다 자신도 교우임이 발각돼 체포됐다. (탁희성 작)



사제가 없던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이어온 복자들은 깊은 믿음으로 신앙을 증거했다. 복녀 윤점혜·정순매 등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동정녀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고, 옥중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켜나갔다. 아직 예비신자였던 복자 조용삼도 부활대축일에 복자 이중배(마르티노)·원경도(요한)와 함께 체포됐는데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숨을 거뒀다.

광주 지역에서 난 복자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광주에서 태어나 신앙을 키우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정철상(가롤로) 부자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명도회장으로 최초 한글교리서 「주교요지」를 집필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던 복자 정약종도 신유박해에 순교했다. 부친 정약종과 함께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복자 정철상은 부친이 체포되자 옥바라지를 하다가 정약종의 순교 이후 체포돼 부친을 따라 순교했다.

당시 광주유수의 치소였던 남한산성에서는 복자 한덕운(토마스)이 순교했다. 신자로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아무도 거두지 않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수습하던 한덕운은 혹독한 형벌에도 밀고하지 않고 참수를 당했다.

 

신유박해 이후에도 복자들은 교구 내 교우촌에서 신앙을 실천하며 살아갔다.

복자 조숙(베드로)·복녀 권천례(데레사) 부부는 1819년 8월 10일 함께 순교했다. 이들 부부는 동정부부로 생활하면서 신심이 날로 깊어져 기도와 복음 전파, 남을 위한 애긍을 실천하며 살다 1817년 잡혔다. 부부는 2년 이상 옥살이를 하면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키다 참수형을 받았다.

죽산에서 순교한 복자 박경진(프란치스코)과 복녀 오(마르가리타) 부부도 어떤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다 1968년 9월 28일 같은 날에 순교했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복녀 이성례(마리아)는 박해를 피해 수리산에 정착해 남편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일궜다. 이성례는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손수 음식을 준비해 포졸들을 대접한 다음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끌려가 1940년 당고개에서 목숨을 잃었다.

요당리 지역 교우촌에서 태어난 복자 장(토마스)도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교회의 일을 도왔다. ‘착한 사람’으로 불리던 복자는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다”며 믿음을 지켰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4년 8월 17일, 이승훈 기자]

 

 

시복 위한 수원교구 노력 - 천진암성지 중심으로 교회 뿌리 찾는데 주력



2009년 6월 2일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홍문리 48-7에서 열린 ‘여주 순교자 현양비’ 축복식 모습. 교회 사료 등을 근거로 원경도 등이 순교한 곳을 찾아 세워진 현양비에는 여주에서 순교한 20여 명의 순교자 명단과 순교자 찬가가 새겨져 있다.



이번 124위 시복은 복자들의 신앙 후손인 한국교회 신자들의 손으로 현양하고 준비하며 일궈낸 시복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103위 성인은 선교사들의 기록과 노력으로 시복이 이뤄졌지만, 124위는 사제·수도자·성직자 등 한국교회의 구성원이 힘을 모아 순교자들의 기록을 찾고 널리 알리며 기도·성지순례 등으로 현양한 결과 성취될 수 있었다. 교구 역시 시복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교구가 시복을 위해 해온 활동을 정리해 본다.

초기 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1984년 103위 시성식을 준비하면서 부터다. 103명이라는 많은 수의 순교자가 시성됐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순교자들이 시복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다. 시복 추진에 대한 관심은 신앙 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배우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반성에서 시작됐다.

전국적으로는 103위 시성식 이후로 초기 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관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지만, 교구는 이미 우리 신앙의 뿌리를 찾는 노력을 해오고 있었다. 이전부터 천진암성지를 중심으로 초기 한국교회와 순교자들에 관해 연구해오던 교구는 1986년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초기 교회를 연구하고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한국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 5위를 현양해왔다.

이런 흐름 속에서 1995년 12월 김병열 신부(현 교구 원로사목자)가 교구 관련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김 신부는 어농성지를 개발하고 시복대상자들에 대한 연구 작업을 시작했다. 이어 1996년 교구는 당시 교구장 고(故) 김남수 주교의 승인으로 주문모 야고보 신부, 윤유일 바오로, 윤유오 야고보, 윤점혜 아가타, 윤운혜 루치아, 정광수 바르나바,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등 8위의 시복시성 추진을 결정하고 시복시성추진위원회를 결성, 성지별 자료조사와 각 순교자에 관해 연구했다.


2006년 3월 8일 순교자들에 대해 공적 경배 행위를 검증하기 위해 수원교구 현장조사단은 최덕기 주교(왼쪽에서 네 번째) 등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권상문 순교자 묘소를 살피고 있다.



1997년부터는 주교회의에서 124위를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시복을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시복 사업이 전국 단위로 통합됐지만, 교구는 교구 내 복자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활동했다. 시복시성추진위원회는 전국 단위의 노력에 함께했고, 수원교회사연구소도 많은 연구를 통해 시복 사업에 힘을 더했다.

2002년부터 2011년에 이르기까지 4차례에 걸쳐 한국교회 창설주역 시복시성을 위한 심포지엄을 실시하고 심포지엄의 자료를 수합해 「한국 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을 발간하기도 했다.

2011년부터는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시복을 향한 염원이 뜨거워졌다. 교구 총회장단은 2011년 7월 3일 ‘시복시성을 위한 우리의 결의’를 발표하고 모든 본당과 함께 시복시성기도문과 묵주기도를 바치고 도보성지순례, 문화활동 등을 통해 순교자들의 삶을 체험하고 알리고 실천하기로 다짐했다.

또 순교자를 기억하고 따르기 위한 방법으로 도보성지순례를 비롯해 성지순례가 활성화되기도 했다. 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는 2011년 8월 임원진을 중심으로 시복시성에 지향을 두고 도보성지순례를 실시했다. 교구 청소년국도 교구 내 15개 성지를 잇는 성지순례길 ‘디딤길’를 마련하고 자료집을 발간해 누구나 도보성지순례를 통해 순교자의 삶을 체험하고 묵상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는 2012년 3월 「수원교구 관련 하느님의 종 31위 발자취를 따라서」를 발간해 124위 중 교구 내 8개 성지에서 현양하고 있는 교구와 관련된 31위에 관한 자료를 정리해 교구민들이 성지순례를 하며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고 배울 수 있도록 도왔다.

31위의 복자를 현양하는 직접적인 활동은 교구 내 성지들을 중심으로 이어져왔다. 각 성지는 해마다 순교자성월, 순교자현양대회를 통해 31위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했다.


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가 발간한 「한국 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과 「수원교구 관련 하느님의 종 31위 발자취를 따라서」



천진암성지는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유해를 성지에 이장하고 묘역을 조성해 현양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정약종이 쓴 한글교리서 「주교요지」를 8개 국어로 번역해 웹사이트로 공유하고 있다.

양근성지는 성지에 복자 조숙(베드로)·권천례(데레사)·윤점혜(아가타)의 동상을 세우고, 순교지 인근 양근섬에 복자들과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조형물 ‘영원으로 가는 사다리’를 설치했다. 그리고 도보·수상성지순례 코스를 개발해 순례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31위 중 가장 많은 17위를 현양하고 있는 어농성지는 복자 윤유일(바오로),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 주문모(야고보) 신부, 윤유오(야고보), 윤점혜(아가타), 윤운혜(루치아) 정광수(바르나바), 강완숙(골룸바)를 현양하기 위한 가묘를 조성했다. 또 이들이 청년이라는 점에서 청소년·청년을 위한 성지로 삼아 의미를 더하고 있다.

또한 남한산성순교성지는 복자 한덕운(토마스)을, 수리산성지는 복자 이성례(마리아)를, 요당리성지는 복자 장(토마스)를, 죽산성지는 복자 박경진(프란치스코)·오(마르가리타)를 각각 현양하고 있다.

성지로 조성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복자의 삶의 터전이자 순교지이기도 했던 여주 지역은 여주본당이 복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여주의 순교터에는 순교치명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4년 8월 17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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