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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철학 에세이: 행복은 정말 변해가는 마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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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3-23 ㅣ No.96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3]

행복은 정말 변해가는 마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요?


“꽃처럼 한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그대여. 새벽바람처럼 걸어, 거니는 그대여”(심규선 Lucia with 에피톤 프로젝트).

“그런데 그것은 온 생애를 통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온다고 봄이 오는 것도 아니요, 하루아침에 그리되는 것도 아닌 것처럼, 인간이 복을 받고 행복하게 되는 것도 하루나 짧은 시일에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6장).


변해가는 마음, 사라지는 행복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 유명한 문장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시작입니다. 몇 줄로 요약할 수 있을 법한 얼핏 보면 통속적인 소재에서 그 시대와 사람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독자들을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는 인생의 본질에 대한 절실한 통찰에 이끄는 힘에 이 소설의 비범함이 있습니다.

시작 문장 역시 걸작에 어울리게 단순하면서도 심오합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며 등장인물들의 사상과 심리를 알아갈수록 이 문장은 명제가 아니라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아무튼 이 긴 호흡의 작품을 읽어가며 독자들은 불행만이 아니라 행복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비극을 보면서 인생이란 대체 어디서 왜 어긋나게 되는 것인지를 곰곰 따져보게 되고, 또 다른 등장인물 레빈을 통해 톨스토이 자신이 이 작품을 쓰던 40대에 고민하였을, 훌륭한 삶을 위한 ‘결정적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 함께합니다.

좋은 문학작품이 늘 그렇듯 「안나 카레니나」에서 우리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함께 체험합니다. 그 삶은 욕망과 만족과 공허가 끊임없이 서로를 끌어들이고 밀어내는 격전지입니다. 소설에서 안나는 (아마도) 한때는 그녀에게 상류사회에 자리 잡았다는 만족감을 주었을 카레닌과의 결혼생활을 점차 위선과 허위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 그녀에겐 새로운 행복의 돌파구였던 브론스키와의 격정적 사랑 역시 결국엔 환멸과 증오로 변해갑니다.

톨스토이의 냉정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욕망이 충족을 통해 행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변해가는 마음과 함께 또 다른 욕망으로 바뀐다는 것을 생생히 느끼게 됩니다.

욕구의 충족이 행복의 비밀이라는 상식이 이렇게 변해가는 마음 앞에서 좌초하는 것은 소설의 일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끊임없이 만나는 현실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마음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질주하는 욕망은 나의 주위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나의 세계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그러기에 변화 안에서 행복은 순간과 한철의 즐거움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우리의 ‘올바른’ 상식은 우리에게 항구함에서 행복을 찾으라 합니다. 그러기에 욕망에서 행복을 찾는 생각은 모순에 빠집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이러한 모순을 인식하는 것을 바로 행복에 대한 철학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나라인 마케도니아 출신으로서 고대 그리스 시대 학문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 정착해 활동한 철학자입니다. 스승 플라톤, 플라톤의 스승이자 철학자의 대명사 격인 소크라테스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지닌 진정한 의미의 고전철학을 세웠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서양철학에는 크게 세 가지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먼저 서양철학은 지중해의 여러 도시들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의 궁극적 이치를 탐구한 자연철학자들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어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라는 두 명의 천재적인 철학자들이 존재와 생성이라는 철학의 심오한 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에는 철학을 인간사로 이끌어와 수사학과 권력의 기술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대중화시킨 소피스트들이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선 철학자들이 내세운 질문들과 논증들을 비판하기도 하고 심화시키기도 하면서 존재와 인간사 모두를 포괄하는 철학의 전통을 이루었습니다.

인간사에 관련해 그들은 무엇보다 특별히 삶의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행복에 대한 질문 역시 이러한 성찰에 속합니다. 그들의 철학의 내용과 태도는,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 대한 예리한 관찰에서 시작해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가치의 세계로 다가가고 반대로 윤리적인 가치를 깨닫는 것과 매일매일의 삶을 만나게 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고전적 철학을 가장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종합하였고, 우리는 우리 탐구의 주제인 행복에서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와의 ‘대화’를 통하여 적절한 출발점을 발견하고 긴 여정의 안내를 받게 됩니다.


행복의 자리는 선에 있는가, 욕망에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행복을 우선 욕망이라는 현상을 통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현상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해 윤리학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좋음(선)”이라는 개념과 연관시킵니다. 그런데 스승들의 철학적 탐구를 이어받되 사람들의 상식과 접점을 찾아서 행복을 ‘인간의 선’ 안에서 이해합니다. 여기서 선이란 도덕적 가치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로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건강, 부, 지위, 성공, 좋은 인간관계들, 긴 수명, 미모, 행운 모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애써 살아가는 이유가 좋은 것들을 추구하고 욕망하는 것이기에 어느덧 ‘좋음’이 곧 욕망의 대상인 것으로 쉽게 오해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오해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욕망과 행복 사이의 관계를 반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생각이 오해인 이유는 욕망과 좋음에 대한 관계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좋음’을 통해 욕망에 대해 말하고 평가할 수 있지만, 반대로 욕망을 통해 ‘좋음’의 내용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한 욕망과 행복 사이의 모순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식의 전도에 있습니다. 욕망이 선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기에 반성되지 않는 욕망의 충족은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참으로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이런 불일치의 이유를 욕망에서 찾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입장에서 볼 때 행복의 탐구를 위한 출발점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됩니다. 먼저 행복이 지속성을 요구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 하나의 사건만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바라봐야 하고 이러한 인생을 규정짓는 삶의 방식에 입각해 행복을 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욕망이 좋음에 의해 질서 있게 정향될 수도 있지만, 또한 우리가 반성되지 않은 욕망에 의해 단지 좋은 것으로 보이는 대상에 고착되어 살아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복은 좋은 삶이며 그것이 가능한 삶의 방식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바로 행복에 대한 탐구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간이 아닌 생 전체를 말하는 행복의 정의는 충분한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어떤 삶이 다른 삶보다 낫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을 기다려봅니다.

* 최대환 세례자 요한 - 의정부교구 신부. 교구 신학생 영성지도를 맡고 있으며 철학을 공부하면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연재하는 동안 행복에 대한 독자들의 견해와 질문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린다(theophile@catholic.or.kr).

[경향잡지, 2012년 3월호, 최대환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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