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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본 나가사키, 같으면서도 다른 순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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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1-10 ㅣ No.1399

일본 나가사키, ‘같으면서도 다른 순례의 길’ (상) 핏빛 박해 속, 7代에 걸쳐 믿음이 지켜진 곳



박해 당시 통에 넣어 땅에 묻고 대축일이 다가오면 조용히 꺼내 보여주곤 했던 성모 성화.

 

 

최근 여러 교구의 본당들이 일본 나가사키로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일본으로 성지순례를 간다는 것’은 생소하게 느껴진다. 일본에 대한 특유의 거부감 때문일 수도 있고, 방사능에 대한 공포 때문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일본에 성지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가사키현은 나가사키대교구와 함께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자국의 교회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고 시도 중이며, 이미 오우라성당을 비롯한 나가사키 일대의 성당들과 천주교 관련 유적들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했다. 아울러 ‘신자 발견’ 150주년인 2015년을 성대히 보내고자 준비 중에 있다.

‘신자 발견’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일본의 신앙 선조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나가사키 순례를 통해 알아보자.


일본 천주교회의 산실, 나가사키

2012년 일본 주교회의 교세통계에 따르면 1억2600만 명이 넘는 일본의 인구 중 천주교 신자는 0.35%에 불과한 44만4000여 명이며, 그나마도 서서히 줄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다른 교구들에 비해 나가사키대교구는 4.373%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나가사키대교구가 일본 천주교회의 싹이 트고 자라난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가사키는 일본교회가 체험했던 혹독한 박해의 현장이기도 했다.

유럽이 일본을 침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와 예수회 수사, 신자 26명을 나가사키 니시자카에서 처형했다. 당연히 1614년 천주교 금교령이 내려졌고, 신자들에게는 혹독한 박해가 가해졌다.

 

- 박해 당시에는 기둥에 성모상을 숨기고 사람들이 없을 때 몰래 열어 기도했다고 한다.



박해 속에도 몰래 지킨 신앙

1614년 금교령으로 선교사들은 추방당하고, 성당들은 모두 파괴됐다. 1629년에는 나가사키에서 ‘후미에’를 통해 신자들을 색출해 고문하고 처형했다. 후미에란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새긴 목판이나 금속판을 길거리에 놓고 사람들을 불러서 밟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천주교도를 적발했던 것을 말한다. 은밀하게 천주교 신앙을 믿었던 이들은 차마 신앙의 대상이 새겨진 판을 망설이거나 밟기 전 예를 표하게 마련이었고, 이를 보고 관리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효과적으로 색출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체포된 많은 신자들은 결국 고문을 당하고 순교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에서도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대부분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했다.

2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서구 열강들의 문호개방 압박으로 일본은 쇄국정책을 풀었다. 1858년 나가사키 행정관은 ‘후미에’의 중지를 선언했고, 다음 해에는 개신교 선교사가 상륙했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가 1863년 요코하마를 거쳐 나가사키에 들어왔고, 1865년 2월 19일 오우라의 외국인 거류지에 성당을 세웠다.

혹독한 박해로 신자들이 남아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한 달 뒤인 3월 17일 일반 구경꾼들과는 다른 무리가 성당을 찾아왔다. 주임 신부는 이들을 성당 안으로 인도했고 그들의 질문 몇 개에 답을 하자 그 중 한 여성이 “우리들의 마음은 당신과 같다. 마리아상은 어디에 있습니까”하며 신부에게 신앙을 표명했다. 사제를 기다리며 7대에 걸쳐 믿음을 지켜온 신자들이 마침내 사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신자 발견’이라 불리는 이 사건 이후 각지에서 몰래 신앙을 지켜온 이들이 사제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1865년 3월 신자발견이 이뤄진 오우라성당.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으며,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간직한 오우라성당은 건물 자체의 가치도 높아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그 옆에는 신학교로 사용되던 건물이 있으며, 현재는 박해 당시의 유물들이 전시된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에는 후미에를 비롯해 박해 당시 고문 방법을 그린 그림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나가사키에서 선교를 하면서 사용했던 도구들도 함께 볼 수 있다.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가며

우리 신앙선조들이 박해를 피해 깊숙한 산 속으로 가 교우촌을 형성했던 것과는 달리 일본의 신앙선조들은 박해를 피해 섬으로 향했다. 비옥한 농지와 생선이 많이 잡히는 어항 근처는 그 지역사람들이 이미 점령했기 때문에 신자들은 산간벽지의 메마른 토지나 어업이 불편한 해변에 살 수 밖에 없어 가난했지만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하며 살았다.

1873년 금교령이 철폐되고 마침내 박해에서 해방돼 신앙의 자유를 얻은 신자들은 가장 먼저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성당을 지을 돈이 없어서 근처 사암을 깎아 만든 가시라가시마 성당의 경우에는 재료에 대한 자신이 없어 먼저 사제관을 짓고 가능성을 타진한 후 짓기 시작했다. 이처럼 신자들은 가난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재산과 노동을 바쳐 성당을 세웠고, 일본 국토의 1% 면적에 불과한 나가사키현에는 일본 성당 10% 이상에 해당하는 130여 개의 성당이 설립됐다. 이때 세워진 성당들은 대부분 외국인 신부의 지도 아래 서양 건축기법과 일본인 도편수의 전통적 기술이 조합된 독특한 건축물들이 됐다.

 

빼어난 경관의 카미고토 성당들

고토는 카미고토(상 고토)와 시모고토(하 고토)로 나뉜다. 비교적 큰 시모고토와는 달리 카미고토는 시골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름답고 맑은 바다와 싱그러운 녹음을 선사해주는 산을 바라보면, 순례는 관광이 아니라는 사실도 잠시 잊게 될 정도다. 카미고토의 아름다운 경관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주는 성당들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해야 한다. 그러나 성당과 성당의 거리가 멀지 않아 그리 고된 작업은 아니다.

놀라운 것은 안내인 하나 없는 성당이지만 와이파이(Wi-Fi)를 이용한 안내가 제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용 안내부터, 성지 소개와 동영상 등을 모두 한국어로 보고 들을 수 있다. 동영상 재생시 들리는 어설픈 발음과 어색한 번역들도 생각 외로 재미있다.

성당 주변에는 각양각색의 꽃들을 찾아볼 수 있다. 꽃집도 없는 시골이라 신자들은 성당 주변에 시기별로 피는 꽃들을 키우고 그 꽃들로 제단 앞을 장식한다고 한다. 사제는 물론 신자들의 수도 많지 않아 3~5개의 성당을 하나의 본당으로 묶어 관리하고 있어 매일 미사는 어렵지만 매 미사 때마다 참례율은 100%에 가깝다고 한다.


박해를 피해 세 가구의 신자들이 찾기 힘든 해안 동굴에서 숨어 지냈다. 현재 크리스찬 동굴로 불리고 있으며, 입구에 3m 크기의 그리스도 상이 안치돼 있다.



 
근처 사암들을 깎아 만든 가시라가시마성당. 1873년 금교령이 철폐되자 신자들은 가장 먼저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카미고토 내 여러 성당에서 볼 수 있는 Wi-Fi 안내문. 한글 설명도 적혀있다.

[가톨릭신문, 2014년 11월 9일, 
김진영 기자]

 

 

일본 나가사키, ‘같으면서도 다른 순례의 길’ (하) 비극에도 희망 꽃피운 일본교회사의 살아있는 현장

 

 

- 미사 시간을 알리는데 썼던 소라 나팔.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모습들

카미고토와 시모고토의 성당들을 순례하다보면 우리나라의 오래된 공소들을 순례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종종 받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볼 수 있었던 공소의 모습들은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고, 성당 뒤쪽이 아닌 제대 옆쪽에 마련된 고해소는 젊은이들에게는 신기함을 어르신들에게는 반가움을 가져다 준다. 또한 역대 주임 신부들의 사진들을 보면서 익숙하고도 재미있는 기분을 맛보기도 한다.

반면 미사 시간을 알리는 소라 나팔과 조개로 된 성수대 등 일본 신앙선조들의 삶이 담긴 유물들과 이들 성당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동백꽃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색다른 느낌이 들게 한다. 본래 동백꽃은 다섯 장의 잎으로 돼 있으나 고토 지역 신자들은 네 장으로 줄여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사용하곤 했다.

카미고토에서 시모고토로 향하는 길에 들르는 고린 성당은 두 번의 해체 위기를 넘긴 성당이다. 1881년 설립된 하마와키 성당이 1931년 개축될 때 해체한 자제들을 그대로 고린 지구로 옮겨와 조립한 고린 성당은 이후 노후화와 태풍, 해일에 의한 침수 등을 겪어 다시 해체될 상황에 이르렀으나 섬 안의 불교신도의 조언으로 문화재로 보전됐다. 1985년에 고린 성당 옆에 새 성당을 지어 기존의 성당을 구 고린 성당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 단 두 가정만이 고린 성당에서 3주에 한 번씩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고 있지만, 고린 성당은 앞으로 꾸준히 그 역할을 다 할 것으로 보인다.

 

- 고토지역 성당에서 볼 수 있는 동백꽃을 형상화한 스테인드글라스.



‘신자발견’ 이후 고토 지역의 박해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독특한 멋을 자랑하는 성당들과는 달리 고토 지역의 박해는 끔찍하고 잔인했다. 신자발견 이후 다시 심해진 천주교 박해로 나가사키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유배됐고, 고토 각지에도 천주교를 금지하고 신자들을 신고하라는 내용의 방이 걸렸다. 그 결과 고토 각지에서 심한 박해가 일어났다. 손발이 묶인 채 바다로 던져지고, 삼각으로 깎은 나무 위에 정좌로 앉혀진 후 무릎 위에 큰 돌을 올려놓는 등 다양한 고문이 행해졌다.

또한 신자 200명을 6평 남짓의 공간에 가두고 8개월동안 아침저녁으로 작은 고구마 한 조각만 주는 만행도 벌어졌다. 발이 땅에 닿지도 않고 선 채로 몸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배고픔과 더러움이 신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고령자와 아이, 젖먹이 등 39명이 세상을 떠났고, 석방된 이후에도 3명이 더 숨을 거뒀다. 이들을 추모하고자 옥터에 건립된 성당이 로야노사코 순교기념성당이다. 성당 옆에는 순교자들을 기리는 비와 함께 사망 원인에 대해 밝히고 있으며, 성당 안에는 바닥에 붉은색으로 당시 신자들이 갇혔던 공간의 크기가 얼마만한지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 끔찍한 박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부모들이 자신들의 몫으로 나온 고구마를 아이들에게 줘서 허기를 달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부모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했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부모의 복수를 다짐했으나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박해자들을 용서하기로 하고 그 아름다운 ‘용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 6평 정도의 공간에 200명을 8개월 동안 가둬놨던 자리에 세워진 로야노사코 순교기념성당. 옆에는 순교자들의 사인이 적힌 위령비들이 세워져 있다.



몰래 신앙 지킨 선조들 이야기

고토 지역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유물은 관음상을 닮은 성모상이다. 기나긴 박해로 인해 불교도로 위장할 수밖에 없었던 신자들은 관음상 모습의 성모상을 보며 위안을 얻거나 불상 뒤에 십자가를 새겨 평상시에는 불상으로, 기도할 때는 뒤로 돌려놓아 십자가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했다. 그마저도 없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새긴 조개나 돌멩이를 가지고 다닌다거나 땅바닥에 십자가를 긋고 기도 후에 지우는 등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후미에’를 통한 신자 색출이 잦아지자 신자들은 새 신을 준비해 후미에에 임하고 그 후 그 신을 태워 남은 재를 물에 타 마시기도 했다. 혹은 후미에 전날에 발을 최대한 깨끗이 씻고, 성상의 얼굴을 피해 밟은 후 집에 온 즉시 발을 씻고 그 물을 다 마시고 통회의 기도를 바쳤다고도 한다.

 

- 로야노사코 순교기념성당 앞 순례자들이 꾸며놓은 돌멩이들. 동백꽃을 그려넣었다.

 

 

1873년 금교의 방들이 철거되고 신앙의 자유가 선포됐다. 그 해 신자들의 요청으로 선교사가 고토로 파견됐고, 도자키에 방문한 선교사는 12월 24일 밤 해변에서 횃불을 태우며 성탄을 축하했다. 1877년 마루만 신부가 고토지구의 사목을 담당하게 됐으며, 1880년 도자키에 임시 성당을 짓고 세례명부에 적혀있는 신자들을 방문하고, 불행한 아이들의 구제 사업도 시작했다. 지금도 고토에서는 이때 시작한 사회복지사업들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잿더미 속에서 핀 희망의 꽃

신앙의 자유는 얻었지만 나가사키에 큰 비극이 일어났다.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원폭투하지점에서 불과 5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우라카미 성당에서 미사를 준비하던 2명의 사제와 24명의 신자가 그 자리에서 숨졌고, 8000여 명의 신자들도 이후 피폭에 따라 전부 사망했다. 성당은 전소됐고, 잿더미 속에서 머리만 남은 성모상이 발견됐다. 현재 우라카미 성당에서 볼 수 있는 ‘원폭의 성모님’이 바로 이때 발견된 것이다. 그 외에도 검게 그을린 천사상, 성인상 등도 찾아 볼 수 있다.

 

신자들을 고문할 때 사용됐던 고문돌. 삼각형으로 깎은 나무 위에 무릎 꿇린 후 그 위에 올려 고문했다.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방사능에 대해 무지하던 신자들은 우라카미 성당의 피폭된 벽돌들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 벽돌들을 옮겨 구타이노우라 성당의 종루를 만들었다. 자신의 건강이 망가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성당에 튼튼한 종루를 만들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을 구타이노우라 성당의 신자들을 생각해보면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원폭에서 살아남은 신자들은 그해 12월 24일 기와와 자갈을 파내고 찾은 큰 종을 울리고, 이듬해 12월에는 임시성당을 지었다. 자신들의 절박한 삶보다도 성전을 짓는 것이 더 급했던 것이다. 1959년에는 콘크리트로 새성전을 짓고, 1962년에는 주교좌성당이 됐다.

혹독하면서도 길었던 박해는 일본에 복음이 퍼지는 것을 어렵게 했지만, 그 뿌리마저 해하지는 못했다. 일본의 신앙선조들은 사제도 선교사도 없는 긴 암흑기 속에서도 저마다 담당을 정하고, 전례력을 지키며 신앙을 유지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기도문은 오랜 세월이 흘러 본래의 발음과 멀어지긴 했지만 꾸준히 내려왔다. 곳곳에 남아있는 일본 신앙선조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나가사키는 한국교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을 주는 일본 천주교회사의 살아있는 현장이다.

 


 
삼각형 나무 위에 무릎을 꿇고 고문 체험하는 모습.


 
복원된 구스하라 감옥 터. 박해시기 신자들은 낮에 노역을 하고, 저녁에는 눕기조차 힘든 좁은 공간에 갇혀 지내야 했다.


 
우라카미 성당의 피폭된 벽돌로 만든 구타이노우라 성당 종루.

[가톨릭신문, 2014년 11월 16일, 
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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