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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생활교리: 시노달리타스,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걸어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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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1-16 ㅣ No.3010

[생활교리]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걸어가는 여정

 

 

신학교, 수도원 그리고 군대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힘든 일은 뭘까? ‘함께 사는 일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를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났듯이 전 인류에게 ‘함께 사는 일’은 이젠 그저 맞이해야 하는 ‘도전’을 넘어, 반드시 살아내야 하는 ‘사명’이 되었다. 이점은 교회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더욱이 하느님은 사람들이 각자 개별적인 방식이 아닌 오직 백성을 이루어 당신을 알고 섬기도록 원하셨다(『교회헌장』 9항 참조). 이렇게 본다면, 교회 구성원 모두는 이미 함께 사는 여정에 불리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 혼자서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열두 제자를 부르셨고, 또 제자단 공동체 역시도 다른 누군가를 계속해서 교회의 일에 동참시켰다. 이렇듯 교회는 처음부터 하느님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말씀, 하나의 세례, 그리고 하나의 믿음을 함께 나누는 신앙공동체와의 친교를 이루며 더불어 존재하고, 함께 살아간다.

 

최근 교회 내에서 ‘함께 살아가기’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다시 활발하게 꽃 피우고 있다. 그 중심에는 ‘시노드’(Synod)에서 나온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라는 새로운 신학 개념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선 시노드는 그리스어로 ‘함께’를 뜻하는 ‘쉰’(syn)과 ‘길’을 일컫는 ‘호도스’(hodos)가 합성된 것으로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걸어가는 여정’을 말한다. 곧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걷는’ 시노달리타스는 시노드의 핵심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시노달리타스를 ‘공동합의성’으로 번역하여 사용해왔는데, 일부는 ‘합의’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서 토론과 논쟁 끝에 다수의 투표로 결정되는 의회주의나 민주주의 개념으로 그 의미를 혼동하기도 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시노달리타스를 ‘공동협의성’, ‘공동식별여정’ 등으로 달리 불렀지만, 그 본뜻을 충분히 담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주교회의는 ‘미사’나 ‘알렐루야’와 같이 시노달리타스를 라틴어 발음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그렇다면 시노달리타스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나?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시노달리타스를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생활방식과 활동방식의 고유한 특성”이자, “하느님 백성 전체가 교회의 삶과 사명에 관련되고 참여하는 것”(『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6-7항)으로 정의한다. 이렇게 본다면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삶과 행동방식으로서 기본적으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참여를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점은 현대 가톨릭 교회의 나침반 역할을 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공의회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 백성 모두의 공통된 존엄성과 평등함을 선포함으로써(『교회헌장』 32항 참조), 이전과 달리 전 세계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참여를 적극 장려하고, 무엇보다 다양한 계층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하느님 백성 전체가 함께 걸어가기를 초대했다. 그리고 공의회 이후 반세기가 훌쩍 넘은 상황 속에 “2000년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하느님 백성 모두가 참여하도록 부름받은”(P. 코다)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2021-2023년) ‘잔치’가 개막하였다. 물론 이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직 낯설고, 어색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왜, 교회는 “함께가는 길에 대한 이름”(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이기 때문이다!

 

[2022년 1월 16일 연중 제2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팔봉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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