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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병인순교 150주년 프랑스 순례: 조선의 선교사들의 고향과 파리외방전교회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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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21 ㅣ No.1538

[병인순교 150주년 프랑스 순례] 조선의 선교사, 그들이 태어나 신앙 결실 맺은 고향을 가다


조선 땅에서 순교한 선교사들… 앵베르 주교 생가엔 새남터 흙 한줌

 

 

- 베르뇌 주교 유해함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순례단.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조규만 주교)는 병인순교 150주년과 한불수호조약 130주년을 기념해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특별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3월 2일부터 11일까지 열흘간 진행된 순례는 조선대목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고향 오드레삭부터 딘느의 샤스탕 신부 생가까지 프랑스 선교사 6명의 신앙여정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열띤 환영 받은 마리냔느

 

순례단은 3월 2일 파리를 경유해 프랑스 제2의 도시 마르세이유에 도착한 뒤 이튿날 성 앵베르 주교의 고향 마리냔느를 찾았다. 순례 첫 미사는 성 앵베르 기념 성당에서 10여 명의 현지 신자들과 함께 한국어로 봉헌했다.

 

이어 순례단은 브리카르 지역에 있는 앵베르 주교의 생가를 방문했다. 생가에는 앵베르 성인의 생가 터라는 기념판과 함께 성인이 순교한 새남터의 흙이 보관돼 있다. 1796년 태어난 성인은 1년 정도 생가에서 살았고 이후 인근 칼라 지역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한국 순례단 방문은 현지 신자들의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순례단이 도착하자 현지 신자들은 물론 마리냔느 관광청에서도 관계자들이 나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관광청측은 마리냔느가 조그만 도시지만 앵베르 주교와 같은 위대한 성인을 배출해 자랑스럽다고 밝히기도 했다.

 

마리냔느 지역 30여개 본당은 ‘성 앵베르 기념사업회’를 조직해 활발하게 성인에 대한 현양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성 앵베르 기념사업회 장-프랑수와 모렐 회장은 기념성당, 생가, 성인이 사제수품 후 첫 미사를 봉헌한 것으로 알려진 카브리에 성당 등을 순례단에게 소개했다.

 

 

성 샤스탕 신부 자취 서린 딘느

 

3월 4일에는 성 샤스탕 신부의 생가 방문을 진행했다. 샤스탕 신부는 1804년 딘느 지역의 마르쿠 마을에서 태어났다. 생가에는 샤스탕 신부의 막내 여동생의 후손이 아직도 살고 있다. 

 

이 집 주인인 피에르 마르탱 씨는 어릴 적 부모님으로부터 할아버지 중에 한국에서 순교한 신부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고 전했다. 그는 “집에 기념판도 있고 해서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지만 어릴 적에는 이와 관련해서 찾아오는 이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샤스탕 신부님의 시성 후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를 포함해 나이 든 신부와 수녀들이 찾아오곤 했는데, 이제는 간간히 오는 한국 순례단 말고는 찾아오는 이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연이어 찾은 마르쿠성당은 샤스탕 신부가 세례를 받고 사제수품 뒤 첫 미사를 드린 곳이다. 마르쿠본당 크리스티앙 비앙 신부는 “한국에서 샤스탕 신부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고 이렇게 한국 신자들이 찾아오는 것이 놀랍고 존경스럽다”고 전했다. 하지만 비앙 신부는 “한국 신자들은 샤스탕 신부에 관해 자부심을 갖고 이야기하는 반면 프랑스 신자들은 샤스탕 신부에 관해 잘 모른다”고 안타까워했다.

 

 

순례단에 큰 선물 준 퀴퀴홍

 

이어 순례단의 발걸음은 조선대목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태어나고 자란 퀴퀴홍으로 향했다. 페레올 주교가 세례를 받은 퀴퀴홍 성당에서는 1961년부터 17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태요한 신부(Olivier Tellier)가 순례단을 맞이해 그 의미를 더했다. 태 신부는 대전교구 대천성당과 금사울 성당에서도 사목했었다. 

 

이날 퀴퀴홍 신자들은 한국 순례단에게 큰 선물도 안겨줬다. 바로 페레올 주교의 생가를 확인해준 것. 이 지역 역사가인 르네 볼로(Rene Volot)씨는 페레올 주교의 집안이 푸줏간을 운영한 점에 주목해 관련 사료들을 종합 연구한 끝에 생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과거 푸줏간이었던 이 장소에는 현재 마을 주민이 거주하고 있지만, 한쪽 벽에서 과거 푸줏간 입구였던 것으로 보이는 문을 확인할 수 있다.

 

 

포도주 향기 가득한 오드레삭

 

조선대목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끝내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선종했다. 당시 태국 샴 교구 부주교였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1년 조선대목구 설립과 함께 초대대목구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비록 조선에 입국하지 못했지만 교구 설정과 선교사 파견을 주도하는 큰 역할을 했다. 

 

순례단은 3월 5일 브뤼기에르 주교의 고향인 오드레삭을 찾았다. 생가는 파리에 거주하는 한 사람이 소유 중이었지만, 한쪽 벽면에는 기념판을 걸어놓고 있었다. 특히 오드레삭 부스케 디디에 시장은 오드레삭 성당에서 현지 신자들과 미사를 봉헌한 순례단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과거에는 관광객이나 순례객이 찾아오면 인근 와이너리를 소개하느라고 바빴는데, 지금은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해 소개한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국인 선교사제 활동하는 아미앵

 

프랑스 순례 중 루르드 성모 발현 성지에서 하루를 머문 순례단은 3월 8일 성 다블뤼 주교의 고향 아미앵을 방문했다. 아미앵 대성당에는 서울대교구 김지훈 신부가 선교사제로 파견돼 보좌신부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순례단은 김 신부의 안내로 다블뤼 주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던 아미앵 대성당 곳곳과 다블뤼 주교가 세례를 받은 인근 생 류 성당 등을 돌아봤다. 김 신부는 순례 중 “이곳의 사제가 부족해 교회가 문을 닫는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 선교사제로 자원하게 됐다”면서 “다블뤼 주교님의 고향과 세례 장소 등을 제대로 보존하고 후대에 물려주는 것 또한 우리의 역할일 것”이라고 말했다.

 

 

베르뇌 주교 현양 샤토 뒤 르와르

 

성 베르뇌 주교는 1814년 프랑스 르망교구 샤토 뒤 르와르에서 태어나 1837년 사제품을 받았다. 고향에는 그가 세례를 받은 성당과 생가 터가 있다. 안타깝게도 그의 생가는 화재로 소실됐고, 그 자리에는 새로 지은 주택이 들어서 있다.

 

다른 프랑스 선교사들에 비해 베르뇌 주교의 현양사업은 활발히 진행되는 편이다. 샤토 뒤 르와르 본당 브루노 델라로쉐 신부는 2012년 부임 후 베르뇌 주교의 삶과 영성에 관해 찾고 알리는 활동을 다방면으로 펼치고 있다. 2014년에는 베르뇌 주교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행사를 열었고, 역사학자들을 초대해 관련 역사를 공부하는 컨퍼런스를 마련하기도 했다. 

 

델라로쉐 신부는 “쉽지 않지만 베르뇌 주교 관련 기록을 열심히 찾고 있다”면서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하나씩 일궈내는 중”이라고 말했다. 특히 르망교구도 이 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본당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최진성 신부가 파견돼 활동 중이다.

 

 

파리외방전교회 태요한 신부가 한국 순례단원들에게 페레올 주교가 세례를 받은 퀴퀴홍 성당을 소개하고 있다.

 

 

 

오드레삭에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 생가.

 

 

 

- 블뤼 주교 유해가 안치됐던 아미앵 대성당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순례단.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20일, 프랑스 최용택 기자]

 

 

[병인순교 150주년 프랑스 순례]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선교


목숨 건 선교, 100년 넘게 교회 기반 닦으며 자립 도와

 

 

파리외방전교회와 한국교회의 관계는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대목구장으로 임명하면서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에서 진행한 선교역사가 한국 천주교회사의 굵직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전교회와 한국교회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됐다.

 

-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순교 성인 10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 베르뇌 주교, 볼리외 신부,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다블뤼 주교, 유스토 신부, 도리 신부.

 

 

프랑스 선교사들은 초대대목구장부터 1942년 노기남 대주교가 제10대 교구장으로 임명되기까지 약 110년간 9대에 걸친 교구장직을 승계했다. 병인박해 때까지 재임한 5명의 대목구장 중에서는 병사한 브뤼기에르 주교와 페레올 주교를 제외하고 3명이 시성되기도 했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던 초대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역설적이게도 조선 땅에 입국하지 못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맨 처음 한국에 입국한 신부는 성 모방 신부였다. 그는 1836년 조선에 입국했고, 이듬해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에 성공했다. 이로써 조선대목구는 교구 설정 6년 만에 주교와 사제, 신자로 구성된 교회조직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이들 세 선교사는 모두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이들 세 선교사는 입국한 뒤 가장 먼저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교황청 포교성성 직할 선교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의 설립 정신에 근거해 ‘본토인 성직자 양성’에 나선 것이다. 이를 통해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배출됐다.

 

- 뤼 드 박 128번지 위치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파리외방전교회는 1853년에는 충청도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해 성직자를 양성하기도 했다.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과 파리외방전교회의 이 같은 방침은 선교 지역에 자립 교회를 빨리 만들어 정식 교계제도를 설정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신학생 양성뿐만 아니라 출판 및 당시 기록 수집에도 큰 역할을 했다. 앵베르 주교와 페레올 주교는 오랜 세월 동안 한국 순교자들의 치명사적을 조사해, 이후 1925년 79위 순교자가 시복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선교사들은 파리 본부에 각종 보고서와 서한을 보내 한국교회의 소식을 전했다. 이러한 기록은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로 이어졌다.

 

또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건축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코스트 신부는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을 설계하고 건축해 고딕양식의 벽돌 건물을 한국에 소개했다. 이밖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교육, 시약소 운영 등의 의료 활동도 진행했다. 이 같이 활동들은 100여 년간 한국교회를 포함해 한국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기나긴 박해는 수많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로 이어졌다. 1839년 기해박해로 3명의 선교사 순교했고, 1866년 병인박해에는 무려 9명의 선교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 중 10명의 선교사는 1984년 시성됐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현재 사목 활동을 대부분 현지인 성직자에게 인계하고 주요 특수사목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그간 4300여 명의 선교사를 아시아 각국으로 파견했고, 그 중 170여 명이 순교했다.

 

 

 

 

■ 서울 순교자현양위원회 부위원장 원종현 신부 


“103위 성인 중 10명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현양사업 함께 이어가야”

 

 

“한국에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생적으로 탄생한 한국교회를 보편교회 안에서 성장하도록 돌봐준 소중한 은인들입니다. 한국교회는 100여 년간 우리 교회를 이끌어 온 이들 선교사들의 신앙과 죽음을 무릅 쓴 선교정신을 이어나가 복음화를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병인순교 150주년과 한불수호조약 130주년을 기념해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3월 2일부터 11일까지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이라는 주제로 프랑스 특별 순례를 다녀왔다. 

 

순례단을 이끈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부위원장 원종현 신부는 “죽음을 각오하고 조선 행을 택한 이들의 신앙여정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면서 “한국교회 성장에 도움을 준 이들 선교사의 숭고한 순교정신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이들에 대한 현양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몇몇 사람들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병인양요를 일으키는 등 선교를 표방한 프랑스 제국주의의 팽창 정책에 앞장섰다고 비난하지만, 이들이 목숨을 바쳐 증거한 신앙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면서, “이들의 작은 과오보다는 신앙을 위해 조선에 온 이들 선교사의 뜻을 봐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원 신부는 “이들 선교사들은 프랑스를 출발하는 순간 조선 땅에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굳은 결의를 맺은 사람들이라면서, 한번 떠나면 되돌아오지 못할 길을 나선 사람들”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한국교회나 프랑스교회나 이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1984년 시성된 한국의 103위 성인 중 10명이 프랑스 선교사들이지만 한국 신자 중에 이들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이들 선교사에 대한 현양사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원 신부는 그나마 한국 신자들이 이들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찾으면서 프랑스교회가 이들에 대한 현양사업의 필요성을 각성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뒀다. 그는 “과거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조선 신자들의 양육에 도움을 줬다면, 지금은 거꾸로 한국 신자들이 프랑스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찾아 프랑스를 방문하고 그로 말미암아 프랑스교회가 이들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 양국 교회는 물적 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위해 이들에 대한 현양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원 신부는 오는 10월에 예정된 프랑스 주교회의 한국 순례단 방문이 양국의 교류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프랑스 주교회의가 어느 한 나라에 대규모 공식 순례단을 파견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면서 “이는 한국에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의 영성과 삶이 이들이 보고 배워야할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임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20일, 프랑스 최용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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