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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화학에게 길을 묻다: 기도와 눈물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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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01 ㅣ No.82

[화학에게 길을 묻다] 기도와 눈물의 어머니

 

 

지난 겨울은 집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어찌나 추운지 그저 웅크리고 지낼 뿐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눈이 내리면 가끔씩 낭만에 젖어들기도 했건만, 이번에는 부대로 쏟아 부어대듯 그것도 자주 내리니 어서 염화칼슘을 뿌려서 통행이나 편하게 해주면 좋겠다는 것밖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쉽사리 얼거나 끓지 않게 하려면

 

그런데 염화칼슘을 뿌리면 왜 얼음이 빨리 녹을까요? 또 왜 하필이면 소금이 아니라 염화칼슘일까요? 값이 더 싸서일까요? 가격을 알아보니 소금보다 염화칼슘이 더 비쌉니다. 그러니 가격은 이유가 아닙니다.

 

그건 염화칼슘이 섞였을 때 물의 어는점을 낮추는 효과가 크기 때문입니다. 대기압에서 순수한 물의 어는점은 섭씨 0도인데 물에 고체 같은 비휘발성 물질이 녹게 되면 어는점이 0도보다 아래로 내려가서 영하에서도 잘 얼지 않게 됩니다. 이를 용액의 ‘어는점 내림 효과’라 합니다.

 

용액 속에 녹아있는 물질의 농도가 크면 어는점은 더 많이 내려갑니다. 소금(NaCl) 의 경우에는 물에 녹으면 한 분자에서 2개의 이온, 곧 나트륨이온(Na+)과 염소이온(Cl-)이 생성됩니다.

 

그에 반해, 염화칼슘(CaCl2)은 소금보다 물에 더 잘 녹기도 하려니와 칼슘이온(Ca 2+) 1개와 염소이온(Cl-) 2개를 가지고 있으므로 한 분자가 녹아도 3배의 농도가 되는 셈이어서 최대한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도 얼지 않게 됩니다. 참고로 소금은 어는점을 영하 15-20도까지 낮추므로 지난 겨울 같은 추위의 눈을 녹이기는 어렵겠지요?

 

여기에 염화칼슘을 제설 작업에 사용하는 또 다른 큰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이 물질의 조해성(潮解性) 때문입니다. 조해성이란 고체가 대기 중에 있는 수분을 흡수하여 액체가 되는 성질을 말합니다.

 

이렇게 염화칼슘은 공기 중의 습기를 빨아들여 염화칼슘 수용액이 되고 이 수용액은 얼음을 만나서 녹입니다. 이 녹은 물이 염화칼슘 용액과 합쳐지게 되면 어는점이 내려가 다시는 얼지 않게 되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용액은 어는점 내림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끓는점 오름 효과도 있습니다. 끓는다는 것은 대기가 누르는 압력과 액체에서 올라가는 증기압이 같아질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순수한 용매에 고체 물질이 섞이게 되면 그 액체의 증기압이 줄어들게 되니 끓게 하려면 더 높은 온도로 가열해서 증기의 압력을 높여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물에 어떤 물질을 넣어 녹이면 쉽사리 얼지도 않고 또 끓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동차의 냉각수로 사용하는 부동액이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부동액의 주성분은 에틸렌글리콜이라는 화합물인데, 여기에 부식방지제 등 다른 화합물을 첨가함으로써 여름에는 폐쇄된 용기 내의 액체의 압력을 낮춰주고 겨울에는 얼지 않게 해줍니다.

 

 

마음이 얼어붙거나 끓지 않게 하려면

 

이러한 현상은 마음이라는 물 속에 기도라는 물질을 충분히 넣어 녹이면 용액이 된 우리의 마음도 쉽사리 냉혹해지거나 분노로 끓어오르지 않게 되리라는 사실과 아주 많이 닮아있지요? 기도는 사랑의 표현이며 이웃 사랑의 원동력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 5,3-4).

 

이렇게, 어떤 모욕을 당해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결국은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므로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달랠 수 있고, 아무리 부정적이거나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려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인내할 수 있기에 마음이 얼어붙지 않습니다.

 

‘눈물의 기도로 인내한 어머니!’ 하면 누구보다도 모니카 성녀가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아들아, 내 치마폭에는 눈물과 기도가 담겨있다”라는 책에 실린, 자식의 회심을 위해 30여 년을 기도한 성녀의 생애를 전하려 합니다.

 

그녀는 이교도인 파트리치우스와 결혼하면서 고난과 인내의 세월이 시작됩니다. 난폭하고 방탕한 남편에게 모니카는 관대함, 올곧음, 충실함, 품위 있는 언행으로 18년간의 결혼생활을 일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남편은 죽기 전에 회심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모니카는 남편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맏아들인 아우구스티노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교도 명문교에 입학하였고 독서에 대한 강렬한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때 아들은 이미 어린아이의 껍질을 뚫고 나왔음에도 그 내적 혼란을 철저히 숨겼기에 어머니는 아들이 순진무구하여 죄에 물들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육체의 쾌락이 아우구스티노를 이미 삼켜버렸음을 알게 되었을 때, 어머니의 충고는 모자 사이의 틈을 벌어지게만 할 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를 알면서도 도리어 아들이 남자가 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더 높은 학문에 정진시키려고 카르타고의 수사학(修辭學) 학교로 보냈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곳에서 연애를 시작하여 18세에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잘못을 하고도 홀로 남은 어머니의 너그러움을 믿고 가족 부양 문제까지 떠맡겼으니, 속수무책의 아들로 말미암은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모니카 축일을 ‘어머니 눈물의 축일’이라 부를까요.

 

 

인생길에서 폭설을 만났을 때

 

당시에 아들은 선과 악의 이원론, 곧 사탄도 하느님 못지않은 영원불멸한 존재임을 주장하는 마니교에 빠졌습니다. 육체적 감각과 물질적인 것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유물론의 오류에 빠졌던 것이지요. 또한 성경이 수사학적으로 미려한 문장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읽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니교의 이론을 천문학에 관심이 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론과 비교했을 때 자연현상의 계산에서 많은 착오를 발견하였습니다. 이후 기대했던 마니교 주교인 파우스투스의 연설을 듣고는, 그의 연설은 아름답지만 빈 꽃병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떠나기로 했던 어머니를 속이고 아들은 몰래 로마로 떠났고, 그런 배신에도 어머니는 아들 사랑하기와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후에 어머니는 기어이 로마로 가서 아들과 만났습니다. 로마에서도 그는 여전히 마니교도들과 어울렸고, 회의론(懷疑論)을 주장하는 아카데미학파들과도 어울렸습니다.

 

이때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오를 만나 강론을 듣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배우려는 마음보다는 어떻게 말하는가에만 골몰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참석하면서 편견이 무너지고 빛이 그의 영혼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플라톤을 접하면서 처음으로 물질적인 것들을 초월한 이데아의 세계와 ‘정신’이란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경은 평이한 문체로 기술되어 있지만 심오한 가르침을 내포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비참한 인간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음을 고백한 바오로의 서간(로마 7,18-25 참조)이 그를 가장 감동시켰습니다.

 

육체의 죄로 고통 받던 그는 그 말씀에서 경건한 얼굴과 참회의 눈물, 그리고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 인간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욕망을 위해 육신을 돌보지 말라는(로마 13,14 참조) 말씀으로 법열이 넘쳤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아들을 가톨릭으로 귀의시키려고 모진 고통을 인내했던 모니카에게서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셨습니다.”(시편 30,12)라는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뒤에 아우구스티노가 ‘은총의 박사’로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은 그 자신의 노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가 기도하지 않을 때도 어머니가 눈물로 기도했기에 가능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고 보면 모니카 성녀야말로 인생길에서 뜻밖에 폭설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온 생애를 통해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분 덕분에 막막한 인생길에서 염화칼슘보다 더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기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식 문제로 가슴 아파하는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모니카 성녀가 띄우는 희망의 메시지는 바로 기도와 믿음의 힘이 아닐는지요.

 

* 황영애 에스텔 - 이학박사(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화학과). 상명대학교 교수이며 저서로 “화학에서 인생을 배우다”(2010, 더숲)가 있다.

 

[경향잡지, 2011년 5월호, 황영애 에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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