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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체ㅣ구역반

전문 봉사자 양성은 소공동체 도약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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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7 ㅣ No.20

전문 봉사자 양성은 소공동체 도약의 열쇠

 

 

소공동체 교회를 건설하는 데 가장 큰 희망이자 현재의 정체 국면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전문 봉사자의 양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글에서는 소공동체 운동 초기에는 별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전문 봉사자에 대한 문제가 1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크게 대두된 이유를 규명해 보는 한편, 기대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논지를 명확하게 하고자, 현재는 거의 전무한 형편이지만 앞으로 본당에서 이 문제만 전담하고 총괄할 극소수의 평신도 지도자를 ‘전문 봉사자’, 현재의 반장처럼 단위 소공동체를 이끌어갈 평신도 봉사자를 ‘일반 봉사자’로 구분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1. 소공동체 교회 건설의 핵심 요소들과 현재적 의미

 

모든 사회현상의 기저에는 그 현상이 태동하고 발전할 수 있는 전제조건들이 있게 마련이다. 소공동체 교회 건설 역시 존재론적인 필연성과 상황적인 필요성에 따라서 추진하는 새로운 교회상 정립의 대역사(大役事)이지만, 태동과 성장에 적합한 조건들이 전제될 때에만 비로소 순조로운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공동체 태동과 성장에 필요한 핵심요소들은 무엇이고, 그것들이 이 문제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당시와 현재의 의미를 검토해 보는 작업은 앞으로 성장을 촉진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1) 사회적 배경

 

소공동체 교회 건설의 배경이 되는 사회적 여건이나 환경은 그 태동과 성장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상을 교화시키는 힘보다 세상이 교회를 속화시키는 힘이 상대적으로 커지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서 소공동체 건설을 추진하고 있더라도 세상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소공동체 건설의 선행사례가 되는, 1960년대 초에 브라질에서 시작된 기초공동체를 준거틀로 하여 우리의 소공동체 현실을 비교하고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계기와 배경은 우리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단순히 비교하여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선행사례가 태동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이고 절박한 상황이나, 그들을 하나로 묶었던 연대의식이나 공통분모가 없다. 당시의 상황적 필연성에 불을 댕겨 신자들이 의식혁명과 연대행동을 통한 현실참여로 나서게 했던 기제(機制)가 우리에게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현대화 과정에서 땀 흘려 추구했던 민주주의의 진전, 자유의 확충, 그리고 경제적 번영은 소공동체의 존립 기반이 되는 연대성의 강화 대신 오히려 개인주의, 이기주의 풍조를 만연하게 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공동체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의 실현이 소공동체적 측면에서는 탈공동체 현상이라는 역풍으로 불어 닥치면서 오히려 불모의 척박한 풍토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관계 인식을 소홀히 한 채 소공동체 건설 10여 년의 성과를 과소평가하거나, 당위론에 도취된 나머지 전망을 낙관하는 것은 두 가지 모두 금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우리의 소공동체 건설을 시대적 당위로 수용하면서도 그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전망 대신 회의적 태도를 견지하는 까닭도 사실은 사회적 환경의 불모성에 대한 우려에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우리의 소공동체 교회 건설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만들어야 할’ 도전적 과제라는 점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소공동체 교회 건설에서 사회적 배경은 아주 중요한 영향 인자이지만, 이것은 추진하는 주체의 의지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불가항력적 요소이므로 기정사실로 수용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반공동체적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소공동체 교회 건설 또한 상황적인 불리를 이유로 포기할 수 없는 핵심 문제이므로 전도가 험난해도 도전할 수밖에 없는 과제인 것이다. 

 

2) 소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신자들의 수준

 

기존 본당 교회가 제구실을 하고 구성원인 신자 일반이 모든 면에서 기대 역할에 제대로 부응하였다면, 교회가 굳이 소공동체 교회 건설이라는 모험적인 과제에 도전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기존의 본당 교회라는 틀로서는 시대가 요구하는 사목적 기능과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라는 공동체 교회관을 수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각성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의 지평에서 소공동체의 수준, 곧 구성원 일반의 수준의 총화(總和)가 낮은 상태에 머물러있고, 또 향상 속도가 더디다는 사실에 굳이 실망하거나 우려를 나타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가 직면하는 대부분의 소공동체의 문제들은 사실 소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문제는 바로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소공동체는 이 문제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설파한 아더(Arthur) 신부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처럼 소공동체 수준 향상의 절대적 요인이 되는 신자 일반의 의식수준이 기대 이하에 머물러있지만, 신자 재교육이나 집체 교육을 통하여 전체 신자의 의식 수준을 한 번에 끌어올리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기존의 본당 교회에서는 좀처럼 향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신자의 수준이 이 소공동체 교회를 통해서는 점차 개선될 희망의 여지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낙관한다. 그것은 접근 방법으로서의 시스템의 변화와, 이를 향상시킬 수 있는 인적 자원의 배양, 곧 소공동체 전문 봉사자의 양성을 전제로 하는 기대이다. 

 

3) 본당 사목구 주임의 기대 역할

 

교구장이 소공동체 교회 건립을 사목정책으로 채택하여 추진하더라도 본당 사목구 주임이 이것을 수용하는 데 소극적이라면 활성화되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주임사제가 그러한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본당의 다른 누가 이 일에 간여하거나 주임사제를 뛰어넘어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는 것이 우리 교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단위 본당에서 초기에 소공동체 교회 건립을 사목지침으로 채택하고 추진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당 주임사제의 몫이다. 또한 다 같이 이를 추진하더라도 사제의 사목적 신념과 열정, 그리고 실천의지에 따라서 성과에는 천차만별의 차이가 생길 것이다.

 

비전을 제시하여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모든 사목 시스템을 소공동체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개편하며, 인적 능력을 배양하는 등 도입 초기의 주임사제에 대한 기대 역할은 소공동체 교회 건설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소공동체 교회 건립 10년을 넘기면서, 성과에 대해서 상반된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긍정적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우리 교회가 새로운 시대의 교회상 정립이라는 대장정을 시작하면서 견인차 역할을 감당해야 할 본당 사목구 주임들에 대한 교도권 차원의 공감대 형성 노력이 미흡했다고 본다. 이는 당시 상황의 불가피성이라는 변명만으로 다 호도될 수 없는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본당 사목구 주임에 대한 기대 역할은 많이 축소되었다. 이제 소공동체 교회 건설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대세이므로 어느 주임사제도 드러내놓고 대안 없이 이를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도입 초기와는 달리 평신도 전문 봉사자에게 책임이 넘어온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사제이고 예언자이며 왕’인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에 참여하며, 거기에서 나오는 사명과 봉사의 책임을 진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83항). 이제는 평신도도 직무 사제직에 의존적이었던 퇴영적(退창的) 자세를 과감히 탈피하고 ‘참여와 공동책임’의 자세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응답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더 이상은 모든 책임을 주임사제에게 돌릴 수 없다. 이미 그 문제는 사제의 손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제는 이제 소공동체 교회 건설에서 기수(旗手)가 아니라 보조성 원리에 따른 협조자로서 사목 시스템을 소공동체 지향적으로 개편하고, 사목 협력자인 평신도 전문 봉사자를 양성하여 이 역사적 과업이 자율적으로, 그리고 주임사제의 임기와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4) 룸코 모델에 대한 논란

 

‘소공동체’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복음나누기 7단계’일 것이다. 이 둘은 거의 등식 관계로 오해될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공동체 모임에서 ‘복음나누기’가 주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바로 소공동체는 아니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소공동체를 하나의 초라한 형식으로 전락시키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다. 소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적 친교(communio divina)를 본받아 주님을 가운데 모시고 이웃끼리 함께하는 삶의 공동체이며, 현장 교회이다. 이러한 삶이 전제되지 않고 단순히 ‘복음나누기 7단계’를 하는 모임이라면 그것은 ‘말씀나누기’ 모임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것은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으며, 교회라고는 더 더욱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소공동체에 관한 일반론은 일단 피하고 ‘복음나누기 7단계’만 떼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교구마다 룸코에서 안출(案出)한 ‘복음나누기 7단계’의 진행 방법이나 내용을 조금씩 바꿔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같은 본당 안에서도 구역·반장 등 일반 봉사자에 따라서, 또한 성별에 따라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대체로 자질을 갖춘 봉사자가 이끄는 여성 모임은 공동활동 문제만 예외로 한다면 나무랄 데 없이 잘 진행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합한 자질을 갖추지 못한 봉사자가 이끄는 여성 모임과 대개의 남성 모임은 기본적인 것조차 지키지 못한 채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우리 소공동체 현장의 일반적인 현실이다. 규범을 지나치게 일탈하거나 방관적인 태도를 보이는 참여자가 있어도 이를 올바로 이끌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해치우는 수가 많다. 실로 공동체나 교회라는 말을 붙이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룸코 모델이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타박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이것이 토착화를 바라는 상황적 요구에 맞지 않는다기보다는 오히려 기도하지 않는, 성서를 읽지 않는, 신앙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공부하지 않는 신자들 자신에게 책임이 더 크리라는 고언(苦言)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룸코 모델이 개선의 여지도 없이 완벽한 것이라고 억설(臆說)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이 비판할 만한 위치에 있는지 겸허한 성찰이 앞서야 한다는 말이다. 토착 모델 개발을 위한 연구에 박차를 가해야 하겠지만 현재의 룸코 모델을 소공동체 교회 건립에 장애 요소로 거론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5) 일반 봉사자의 수준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 제자는 다 배우고 나도 스승만큼밖에는 되지 못한다(루가 6,40).” 한 소공동체의 평균 수준이 그 소공동체의 봉사자 수준 이상으로 오르기는 어렵다. 수준 높은 구성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봉사자가 이들을 포용하지 못하면 이탈하든가, 방관자로 전락하기 때문에 봉사자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어느 교구나 비슷하겠지만 구역·반장 교육을 상시화하고 온갖 역량을 여기에 기울일 것이다. 그런데도 소공동체 모임 현장에 들어가보면 소공동체에 대한 인식 수준이 대체로 미흡한 편이다. 소공동체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나 소공동체의 비전, 공동체 교회관 등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반모임’을 ‘소공동체’로 승화시켜 나가는 봉사자를 만나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소경이 소경을 이끌면 둘 다 구렁에 빠진다”(마태 15,14). 리더의 수준이 그런 정도라면 그 조직의 질적 승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연륜이 쌓여도 반모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봉사자 교육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는데도 향상의 기미를 찾지 못하게 된 원인이 당장의 필요에 따른 반모임 진행을 위한 기능인(?) 양산 시스템에 있지 않나 의심해 본다.

 

 

2. 전문 봉사자의 양성과 그 기대 역할

 

이 글의 첫 머리에서 필자는 전문 봉사자 양성은 소공동체 교회 건설의 희망이자 현재의 정체 국면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래의 두 가지 추정에 근거한 판단에서이다. 첫째는 전문 봉사자에 대한 기대 역할이 크게 대두되었는데도 그 양성에 소홀했기 때문에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성장 잠재력이 매우 크리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추진 주체가 전문 봉사자 양성에 온 역량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것이 다른 어떤 요소에 투입하는 것보다도 회수 효율이 가장 높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문 봉사자 양성 문제만 잘 해결하면 소공동체 수준이 획기적으로 향상되리라고 본다.

 

소공동체 교회 건설이 지난 10여 년간 한국 가톨릭 교회의 최대 사목적 주제가 됨으로써 구역·반 모임은 더 바랄 수 없는 활황(活況)을 이루고 있다. 구역·반 모임이 소공동체로 탈바꿈하기 전의 알[卵]이 되고 접목(接木)을 위한 접본(接本)이 된다는, 말하자면 잠재적인 소공동체라는 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환영할 일이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그러나 반모임은 오직 잠재적인 소공동체의 가능태일 뿐이다. 시간만 간다고 변태(變態)나 접목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듯, ‘반모임’도 저절로 ‘소공동체’가 되지는 않는다. 잠자는 ‘반모임’을 흔들어 깨워 ‘소공동체’로 변태시키려면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이 일을 맡을 이들은 바로 소공동체 전문 봉사자 외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감상의 문제점이 용인된다면 이들이 바로 의식혁명의 기수 역할을 해야 한다. 전문 봉사자는 철저한 의식화 교육을 통해서 현재의 반장 등 일반 봉사자를 양성하고, 일반 봉사자는 도제식 전달교육을 통해서 단위 소공동체 구성원의 의식을 전환시켜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잠자는 반모임 하나하나가 소공동체로 태어날 때, ‘아래로부터 위로’의 의식혁명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갈 것이고, 비로소 소공동체 교회 건설은 제2의 도약기를 맞게 될 것이다.

 

전문 봉사자를 양성하려면 집체, 대량 교육이라는 기존 방식을 탈피하여 소수의 전문가를 집중적으로 양성하고 그들을 각 본당에 배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본당에서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 소속되지 않고 소공동체 육성만을 전담하도록 해야 한다. 일반 봉사자에 대한 의식화 교육을 통해 이들을 정예요원화하고, 주임사제와 협의하여 본당의 사목 시스템을 소공동체적으로 재조정하는 한편, 소공동체 간의 문제를 조정하고, 모범사례를 확산시키며, 늘 현장에 다가가서 지도해 주는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전문 봉사자 양성은 소공동체 전국 사목국장 협의회 산하의 양성위원회를 활성화시켜 활용하고, 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과과정을 개발하며, 이수자에게는 자격증을 부여하면 될 것이다.

 

 

3. 나가는 말

 

한국 가톨릭 교회의 소공동체 운동사 10여 년을 되돌아보면서 실로 착잡한 감회를 감출 수 없다.

 

제2의 교회 창립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온갖 상식과 회의(懷疑)라는 역풍에 맞서며 치달렸던 지난날이 기억 속에 아스라하다. 돌이켜보건대, 새로운 교회상 정립이라는 역사적 과제 앞에서 우리는 찬반(贊反)에 관계없이 대체로 너무 조급하고, 근원적 인식에 소홀했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 교회 2000년사도 형성(formation)과 자기 수정의 과정이었다면, 당위라는 명분만으로 교회 안팎의 상황과 보편적인 인간의 심성을 거슬러 의식혁명을 이루어야 하는 이 장정(長征)이야말로 시한(時限)을 정한 목표가 아니라 평생의 삶 자체로서 ‘마지막 날’까지 가야 할 끝없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불과 10여 년을 놓고 성과에 대해서 논란하는 것 자체가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교회는 그 예형(豫型)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적 친교(communio divina)를 분유(分有)한 지상(地上)의 모상(模像)이다. 교회는 수직적으로 교계적 친교, 더 나아가 신적 친교에 참여하며, 수평적 전개인 형제적, 또는 신자 상호 간의 친교 소명에 역동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교회는 안으로 지상생활에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성가정을 본받아 그 핵심인 개별 가정이 성가정의 모상이 되도록 힘쓰며, 밖으로 열려 외연적(外延的)인 자기확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 보존이자 파견 사명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필연성에 대안(代案) 없는 상황론으로 맞서거나 단순한 ‘선택 사항’으로 경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재 추진하는 소공동체만이 유일하다는 절대주의적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공동체성이라는 본질과 파견사명은 한결같지만 이를 담는 형식은 변화 앞에 언제나 열려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10주년이 된 소공동체 교회 건립 운동도 재정향(再定向, reorientation)의 조정기(調整期)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전환기의 고뇌 속에서 평신도 전문 봉사자, 곧 의식혁명의 기수를 새로운 성장 엔진으로 소개하면서, 그 양성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권하는 말로 마치고자 한다. 인간의 힘만으로도, 방관자적인 의탁만으로도 안 되는 한계를 아는 우리가 인간적인 노력을 다하면서 드리는 겸손한 기도에 성령께서 응답하실 때 가능의 지평이 열리리라 확신한다.

 

[사목, 2004년 10월호, 윤득길(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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