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종교철학ㅣ사상

내 삶을 흔든 작품: 내 신앙은 성가에서 출발했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1-28 ㅣ No.131

[내 삶을 흔든 작품] 내 신앙은 성가에서 출발했다


남자들이 살아가는 동안 제일 많이,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 군복무 시절이라고 한다. 여자들의 경우는 첫아이 낳을 때와 시댁 이야기가 아닐까.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자주 떠올린다는 것, 흔들렸다는 것은 내 마음 깊숙한 곳에 화살처럼 꽂혀 몹시 아파했거나 신열에 들뜬 듯 뜨거웠다는 뜻이겠다. 뜨거웠든 미지근했든 신앙의 길에서 사는 사람들이 자주 반추하는 이야기는 역시 ‘입교 이야기’가 아닐는지.


내 가슴에 꽂힌 성가

1984년 마음이 힘들고 사는 일이 고달프고 춥고, 그러나 살아내야 한다는 필연으로 지쳤을 때 친정집 골목에 못 보던 표지판이 하나 걸렸다. ‘00동성당.’ 중학생일 때 모니카란 세례명을 가진 친구 성숙이를 따라 처음 서울 후암동성당에 갔다. 미사보, 묵주, 촛불이 흔들리는 제대…, 그리고 경건한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친구 따라 성당에 가고 싶었지만 그 당시, 들어갈 수 있는 예비신자 교리반이 없었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나 내 눈에 그 표지판이 들어온 것이다.

인생에 원인을 알아낼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이 있을 때 신과 무관하게 살아온 사람도 소스라치며 그분과 상견례를 한다. 골목길 끝에는 그야말로 그 당시에도 보기 어려운 판잣집 성당이 있었다.

예비신자 교리반에 등록을 하고 첫 미사에 갔을 때 내 귀에는, 내 마음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당시 박성구 신부님께는 죄송하지만 교리고 전례고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고 다만 이문근 신부님이 만드셨다는 성가 325번, 그 선율만 그야말로 ‘총 맞은 것처럼’ 내 가슴에 와 꽂혔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개정 전 가사).” 하는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엾고 불쌍하고 남루한 작은 아이가 되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어지는 대영광송, 거룩하시다, 천주의 어린양…. 세상에 무슨 멜로디가 이렇게 한 번에, 단숨에 알게 되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지금도 이문근 신부님이 살아계시다면 여쭤보고 싶다. “어떻게 이런 선율이 나올 수 있었나요?”라고.

그 미사곡이야말로 울고 싶은 내 뺨을 후려갈겼으며, 끓고 싶을 때 뜨거워지지 않는 내 마음을 100도로 올려주었으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노래하며 그때까지 꺾이지 않았던 내 무릎 뒤를 걷어차인 것 같았다.

그 뒤 십오륙 년이 지나 평화방송 라디오에서 일할 때 성가 387번 ‘주님의 기도’를 만드신 이종철 신부님을 인터뷰하면서 “저는 387번 ‘주님의 기도’ 신자입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어쩌면 그렇게 선율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발성에 무리가 없게 펼쳐지며 기승전결이 그렇게 우아할까요?” 하고 여쭤보니 신부님은 매우 기뻐하셨다.


나 대신 울어주는 성가

나는 초등학교만 빼고 유치원에서 대학교까지 개신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개신교 찬송가의 독특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삶의 신산함을 경험하는 가운데 만난 가톨릭 성가는 그 아름다움에 유연함과 고풍스러움까지 스며있었다. 함께 부를 때 벅찬 노래도 있으며 나를 절대고독에 숨을 수 있게 하는 견고함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교리에서 출발한 신앙이라기보다는 내 설움에 겨워, 성가에서 출발한 신앙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시편 42편을 노래한 성가 58번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와 130편을 노래한 성가 517번 ‘내가 절망 속에’도 울고 싶을 때 나 대신 울어주는 것 같은 성가이다. 성가 153번 ‘오소서 주 예수여’는 최민순 신부님의 유순하고 소박한 노랫말에 늘 감동한다.

나는 두 아들만 있어서 그런지 그리 살갑거나 다정한 엄마가 아닌 것같다. 3년 전, 작은아이가 먼저 혼배를 했는데 홀로된 엄마가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객들이 감동 내지는 동정을 할 텐데 이건 묵은 짐 부려놓는 사람처럼 심상했다. 오신 분들과 인사하느라 좀 부산하기는 했다. 이윽고 시작성가가 울리는데 성가 329번 슈베르트의 ‘미사 시작’이란 곡이었다.

“기쁨이 넘쳐 뛸 때 뉘와 함께 나누리. 슬픔이 가득할 때 뉘게 하소연하리.” 그제야 나는 세 식구를 두고 먼저 하느님 나라로 간 사람이 번쩍 떠올랐다. 가장 먼저 전했어야 할 사람을 이 성가가 깨우쳐준 것이다. 그제야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눈물의 심원이 가슴이라는 것을 그때 새삼 깨달았다. 몇몇 사람들은 내가 아들 혼배에서 울 사람은 전혀 아니니 기도하는 줄 알았단다. 뭐가 더 좋게 말해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부족한 나의 신앙이 벅차오기를

세례 받은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이즈음, 미사 때마다 글썽이던 눈물도, 벅차오르던 가슴도 메마를 때가 대부분이다. 세상의 고통은 세례를 받으면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견진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성가란 나같이 철혈여성으로 보이는 사람도 울게 하고 새끼양의 솜털처럼 부드럽게도 만들어주고 첫영성체하러 나가는 어린 소녀처럼 설레게도 한다. 하느님께서 불러가실 때까지, 이렇게 미사 안에서 성가로 부족한 나의 신앙이 벅차오기를 바란다. 최근 내가 이런 마음으로 듣게 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곡 ‘위령의 날(Allerseelen)’의 가사를 여기 옮긴다. 헤르만 폰 길름이라는 사람의 시다.

“테이블 위에 향기로운 레세타 꽃을 꽂고 마지막 피는 붉은 과꽃을 가져오라. 그리고 우리 이제 다시 사랑을 말하자. 오월의 그날처럼. 내게 그대의 손을 달라. 남몰래 붙잡을 수 있도록. 네 달콤한 눈길을 한 번만 더 내게 던져다오. 오월의 그날처럼. 오늘 모든 무덤에 꽃은 피고 향기가 풍긴다. 한 해 하루 죽은 영혼이 해방되는 날 너를 다시 안을 수 있게 내 가슴에 오라. 오월의 그날처럼.”

* 맹경순 베로니카 - 기독교방송, 동아방송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다 1975년 해직된 후 MBC, KBS에서 프리랜서로 일했다. 1990년 평화방송 개국 준비위원으로 입사해 ‘따뜻한 동행’, ‘신앙상담’ 등을 진행하고 2010년 정년퇴직했다. 1999 대한민국 방송대상 아나운서상과 2007년 한국아나운서협회 ‘올해 최고의 아나운서’ 대상을 받았다. 지금 본당 등에서 ‘올바른 독서 해설’ 교육을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1월호, 맹경순 베로니카]


2,44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