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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10: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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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28 ㅣ No.1992

[성 김대건 · 최양업 전] (10)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선교사


선교사들, 선교지 조선에 뼈를 묻을 각오로 왔고 실제로 그랬다

 

 

- 샤를르 쿠베르탕이 그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위앵(왼쪽부터)·볼리외·도리·브르트니애르 신부의 파견 예식 장면. 이들의 파견 예식은 조선을 향해 파리를 떠나던 1864년 7월15일경에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소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였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은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당시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는 극동 무역의 전초기지일 뿐 아니라 유럽 선교사들의 극동 선교 거점 도시이기도 했다. 모방 신부가 이들 세 신학생을 마카오로 보낸 것은 이곳에 또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세 신학생의 마카오 유학 시절을 살펴보기에 앞서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 선교사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자. 이에 대한 독자들의 선지식이 있어야 세 신학생의 이후 삶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루할 수 있지만 인내하며 읽어주길 바란다.

 

 

파리외방전교회

 

파리외방전교회는 1658년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교황청 포교성성 직할 사도생활단 선교단체이다. 선교지는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던 샴(태국과 말레이시아), 베트남 통킹과 코친차이나, 중국 서남부 사천성ㆍ운남성, 중국 동남부 복건성 흥화 지역 등 작은 선교 지역을 교황을 대리해 관할했다. 그래서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선교를 원하는 교황청의 요청에 자신이 나서 조선에 대한 파리외방전교회의 관할권을 확보함으로써 청나라 땅 만주와 대만, 나아가 일본까지 선교 기반을 확보하려 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선교 활동을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여러 대표부를 운영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교황청 포교성성과 연락사무를 맡은 ‘로마대표부’와 해외 선교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극동대표부’였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는 1685년 중국 광동성에 처음으로 설치됐다가 1732년 포르투갈 식민지인 마카오로 이전했다. 이후 1847년에는 영국 식민지인 홍콩으로 이전했다. 이때부터 홍콩대표부는 총대표부로 승격해 싱가포르(1856년)ㆍ상해(1864년)ㆍ사이공(1901년)대표부를 설치, 운영했다. 또 1867년 이집트 수에즈 운하가 개통하면서 선교사를 태운 배 출항지가 프랑스 마르세유로 일원화돼 이곳에 1879년 대표부를 설치했다. 마르세유대표부는 선교사들의 출항 업무를 전담할 뿐 아니라 아시아 각지에서 보내온 선교사들의 우편물들을 접수하는 역할을 했다.

 

18~19세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파견될 때 본부 장상들로부터 선교 임지를 통보받기도 하지만 마카오까지 온 다음 극동대표부가 배정한 임지로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모방 신부처럼 선교 임지에 도착한 후 자원해 임지를 바꾸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마카오에 도착해 보면 막상 자신이 배속받은 선교지가 박해로 갈 수 없는 상황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또 극동대표부의 판단에 따라 선교사가 긴급히 필요로 하는 선교지로 발령을 내릴 수 있었기에 선교사들의 임지는 항상 바뀔 수 있었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신부도 샴대목구로 발령을 받았지만, 마카오에 도착한 다음 조선 교회의 상황을 듣고 임지를 바꿔 조선으로 가길 희망한 것이다.

 

프랑스 교회는 1789년 대혁명 이후 ‘안으로는 재건, 밖으로는 선교’라는 신앙 회복 열기가 거셌다. 교구 사제들은 해외 선교를 지원해 파리외방전교회에 앞다퉈 입회했다. 신자들은 십시일반으로 선교 기금을 후원했다. 교황청이 1822년부터 1922년까지 100년간 파견한 선교사 가운데 절반이 프랑스 출신이었다.

 

오늘날 인문학자와 역사학자 일부는 이 같은 프랑스 교회의 선교 열풍 원인을 신앙적인 것으로만 단정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프랑스 교회의 해외 선교 운동이 결과적으로 프랑스 식민주의와 결부돼 있다고 꼬집는다. 하지만 교회사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의 시선이 어떻든 교회는 세상 복음화를 위해 선교를 이어 갔다. 선교는 예수님의 명령이요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정원에 있는 ‘순교자들의 모후’ 경당. 동료 회원들은 이곳에서 선교사를 위해 파견가를 노래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조선 선교사

 

교황청 포교성성은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 책임을 맡겼다.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1831년부터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까지 35년간 파리외방전교회는 21명의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했다. 이들 중 앵베르ㆍ다블뤼ㆍ베르뇌 주교와 모방ㆍ샤스탕ㆍ프티니콜라ㆍ푸르티에ㆍ오메트르ㆍ위앵ㆍ볼리외ㆍ도리ㆍ브르트니에르 신부 등 12명이 순교했다. 또 브뤼기에르ㆍ페레올 주교와 메스트르ㆍ장수ㆍ랑드르ㆍ조안노 신부 등 6명이 병사했다. 그리고 리델 주교와 칼레ㆍ페롱 신부는 조선 선교지를 떠나 다른 곳에서 선종했다.

 

조선에 입국할 때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평균 나이는 29세였다. 이들은 평균 7년간 사목을 하다 36세 즈음 사망했다. 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와 함께 1845년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는 21년간 조선에서 사목했다.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ㆍ프티니콜라 신부도 10년간 선교사로 활동했다. 반면 장수 신부는 입국한 지 3개월 만에 뇌염으로 선종했다.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파리외방전교회가 1832년부터 1866년까지 아시아 전역에 파견한 선교사 수가 531명”이라며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가 같은 시기 전체 선교사 중 약 4%에 불과한 것으로 볼 때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는 조선 선교지 비중을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참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대부분은 농민의 자식이거나 지방 소도시 노동자 집안 출신이었다. 그들 중에는 파리나 리옹, 마르세유, 보르도와 같은 대도시 출신은 아무도 없었다. 아미앵의 명문 부르조아 가문의 다블뤼 주교와 부르고뉴 지방의 귀족이었던 브르트니에르 신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선박업을 가업으로 하던 리델 주교만이 부유층 출신이었다. 엑상프로방스 마리냔 출신 앵베르 주교와 앙굴렘 출신 오메트르 신부는 초등교육도 받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따라서 조선 선교사 대부분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소ㆍ대신학교 교육 외에는 일반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소신학교 교육을 대체할 초ㆍ중등 교육 체제가 제도적으로 마련돼 있지 않았다. 조선 선교사 중 프티니콜라 신부만이 오늘날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에콜을 다녔다. 오늘날 중등교육기관인 콜레주를 다닌 이도 베르뇌ㆍ리델 주교, 모방ㆍ메스트르 신부가 전부이다. 문학사 학위를 받은 후 대신학교에 입학한 이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유일하다. 이들 외 조선 선교사들은 교구 사제의 개인 교습이나 소신학교 교육을 이수한 다음, 교구 대신학교에 입학해 신학 교육을 마치고 사제품을 받았다.

 

조현범 교수는 “이러한 사실은 조선 파견 선교사들이 서구 근대 문명에 대해 익숙하지 못했으며, 과거 절대 왕정 시대의 교육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브뤼기에르ㆍ페레올ㆍ다블뤼ㆍ베르뇌ㆍ리델 주교와 모방ㆍ샤스탕ㆍ메스트르ㆍ프티니콜라ㆍ페롱ㆍ랑드르ㆍ위앵 신부는 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또 앵베르 주교와 장수ㆍ조안노ㆍ칼레ㆍ오메트르ㆍ볼리외ㆍ도리ㆍ브르트니에르 등 8명의 선교사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해 신학 교육을 마치고 사제품을 받았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역으로의 파견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라는 회칙(194항)에 따라 선교지에서 뼈를 묻을 결심으로 떠났다. “출발하라! 복음의 영웅들이여, 그대들이 기도로 청하였던 그 날이 왔도다. 이제 그 무엇도 그대들의 열정을 묶어두지 못하리.… 그대들의 발자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친구들이여, 이생에선 안녕을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파견가 중에서) 24살부터 30대 초반의 젊은 사제들이 아시아 선교지로 파견될 때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정원에 모여 동료 선교사들이 함께 부르던 노래다. 남아있는 사제들은 떠나는 선교사들에게 지상에서의 이별을 고하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떠나는 선교사들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모두가 복종해 칼과 도끼에 용감히 맞서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죽을 것”이라고 외쳤다.

 

이 결의에 찬 노래가 끝나면 파견 선교사들은 동료들과 마지막 포옹을 나누고 아시아 선교지로 떠났다. 그리고 1년 이내 이들의 순교 소식이 어김없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날아들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6월 27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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